“북한의 자력갱생...주민들 못살아도 참아야한다는 의식에 사로 잡혀있어”송광호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 북녘땅의 빛과 그림자(上)지난 1980년대 말 첫 평양취재부터 오래전 기억으로 글을 쓰니 어긋난 부분이 있다. 첫 방북체류기간이 9박10일이고, 해외이산가족송금액 수수료가 3%였다. 북녘 땅을 여러 차례 방문하다보니, 연대에도 바뀐 부분이 있다. 오류가 있으면 양해를 구한다. -------------------* * * * -----------------------------------------
북한에서 태어나 오랜 세월 살다 온 탈북자라도 평양구경 한번 못한 주민들이 많다. 북한은 주거이전자유가 없다. 특별허가가 없으면 평생을 한 지역에 묶여 살아야 한다. 주변 명승지, 온천 등도 못 가 본 주민들이 상당수 있다.
외화벌이의 캐나다입국을 시초로 토론토는 매년 탈북자가 늘어나 한때 2,200여명까지 달했다
평양에서도 금강산을 못간 시민이나 북 공무원(안내원)들이 의외로 많음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어느 공적인 기회가 없으면 자의적 행동은 결코 용납 안 되는 북녘사회 아닌가. 어디로 움직여도 통행증이 필요하다. 한 탈북자는 “주민들끼리도 서너 명이상 모여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없다.”라고 토로한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은 주민행위가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이다. 토론토에 온 한 탈북자 경우를 든다. 그는 평양에서 청년 인재로 뽑혀 한 10년간 외화벌이(공무원)로 중국공관에 체류했다.
하루는 북경대사관에서 한-중 축구경기를 동료들과 함께 볼 때다. 그는 ‘한국이 먼저 한 골을 넣자 순간적으로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는 이유(동료의 상부밀고)로 북에서 송환통보 위기에 처해졌다.
그러자 북한귀환대신 캐나다 토론토에 도피키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외화로 중국에서 급히 위조여권을 만들어 토론토 행의 첫 탈북자가 돼 버렸다. 그 외화벌이의 캐나다입국을 시초로 토론토는 매년 탈북자가 늘어나 한때 2,200여명까지 달했다. 2010년대 전후해 토론토 이민전문 한인변호사가 공식 밝힌 통계이다.
그러나 현재도 4-5백 명 정도 탈북자가 토론토에 남아있다고 한다. 토론토는 대도시이고 한인교포도 인구15만 명 정도다. 진작 탈북자협회도 형성돼 있고, 그들끼리 정기적으로 정보교환과 모임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다.
토론토 탈북자에게 희소식은 비록 그들이 추방명령까지 받았지만, 결국엔 영주권을 받게 된 탈북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는 한 탈북자도 추방령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거처를 옮기고, 숨어살다 나중 운 좋게 “인도적 차원”판정으로 5년 만에 영주권을 받은 경우를 보았다.
탈북자들이 지속적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캐나다 정부는 뒤늦게야 거짓 난민신청이 ‘탈남’임을 알았다
그는 내게 “이제야 캐나다에서 떳떳이 생활하게 됐어요.”하고 환희에 차서 소리쳤다. 그를 축하해주기는 했지만, 이를 보면 세상일은 정말 요지경속이다. 현지법을 어기고 최악의 순간에도 끝까지 버틴 놈이 결국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토론토의 다른 탈북자의 자조적인 말이 생각난다. “송 기자님, 함경도고향에 있을 때 우리끼리는 이런 말을 자주 주고받았어요. 이제 고향에는 교활하고 억센 ‘여우와 승냥이’만 살아남았다”고 말입니다. 북에서 배급이 끊긴 후에도 혹시나 정부선전을 믿고 대책을 기대했던 순진한 인민들은 그때 다 굶어 죽었어요.”
일부 탈북자들은 한국에 입국 후 정부지원금을 받은 뒤 얼마 안 있어 서방세계로 보따리를 쌌다. 처음엔 유럽의 영국 런던등지로 몰려들었다가 길이 막히자, 토론토로 방향을 바꾸었다. 캐나다는 인도적인 세계적 복지국가이고, 어느 나라보다 정치적 난민등록을 쉽게 받아주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이 지속적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캐나다 정부는 뒤늦게야 그들의 거짓 난민신청이 ‘탈남(脫南)’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왔다”고 캐나다정부를 속였다. 이름과 나이 등을 제멋대로 바꾸고 한국여권은 숨겼다.
결국 한국정부에 난민신청자들에 대해 지문요청 조회결과 그들 모두가 한국국적임이 밝혀지면서 캐나다난민(이민)국은 탈북자들에 대해 대혼란을 겪었다.
탈북자들은 한국에 와선 곧 미 뉴욕관광객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이아가라 폭포관광 명목으로 육로(버스)로 미국·캐나다국경을 통과 후 근교 대도시 토론토에 둥지를 트는 과정이다.
이들을 위해 토론토 200여 남짓한 한인교회들은 “불쌍한 극빈 탈북자 동포”라는 인식아래 어디든 물심양면 이들을 돌봐줬다. 탈북자를 위한 전문 이민브로커 등 직업소개까지 생겼다. 토론토 곳곳에 탈북자들이 따로 몰려 사는 아파트도 있다.
캐나다 연방정부는 (피)난민등록이 접수되면 영주권자와 꼭 같은 혜택을 준다. 100% 병원 무료치료 및 약 제공, 자녀에겐 고교졸업까지 기본교육을 보장한다. 또 영주권심사(보통1-2년)시까지 매달 1인당 600달러 생활보조금을 제공한다. 시간당 노동수당도 처음엔 한국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지금은 한국정부 또한 시간당 인건비를 대폭 올린 상태지만 아직 소득에는 차이가 있다.
탈북자 중에 질 나쁜 범죄자들 있어 수년 전 토론토교포사회에서 발생한 사기사건도 남녀탈북자가 일으킨 대형사건이었다
토론토에서 탈북자 만남은 어렵지 않다. 웬만한 한인교회는 아직 두세 명의 탈북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입지가 확립되면 어느 순간 모두 교회를 떠난다. 당초 신앙 때문에 교회에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김정은 정권아래 평양도시 겉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과거 방북 시와 비교하면 천지개벽할 만큼 변모됐다. 그만큼 빈부격차도 더욱 심해진 듯하다. 수년 전 토론토를 방문했던 한 북한간부는 대화 중에 “평양에 자신의 새 아파트가 두개”라고 은근히 자랑했다. “그렇게 개인이 둘씩 가질 수가 있나요?”하고 물으니 “하나는 친척이름으로 해 놓았다.”고 한다.
북에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한 것으로 소문나 있다. 평양거리엔 하이힐을 신고 신형유모차를 끄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민들의 휴대폰 (손 전화)사용과 어린이 ‘인라인’ 스케이팅 등은 도심 어디든 발견된다. 현대식 변모된 구조물과 새 레스토랑 등 과연 이곳이 배고픔에 아사자가 속출했던 북한인가를 의심케 한다.
김일성 정권시절엔 그가 사망하면 곧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 믿는 풍조가 있었다. 김일성사후 극심한 국가경제파탄으로 소위 ‘고난의 행군시기’를 겪고 진작 배급까지 끊겼다. 북한주민들 생활이 극히 어려워도 북 주민들은 결코 반국가시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북 주민들은 조국(북한)을 이해하려 애쓴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잘사는 이유는 순전히 미국과 일본 등 외국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라고 깊이 세뇌돼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력갱생으로 남 도움 없이 홀로 일어서야 하니 아무리 못살아도 참아야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있다.
평양 다녀온 길을 밝히는 이유는 오래전 얘기지만, 방북당시 미 CIA의 정보능력에 대한 놀라움이 생각나서다
이제 북한방문길은 토론토에서 중국‘직항’노선이 생겨 편해졌다. 그러나 1980년대 캐나다에서 북한행은 항공로가 복잡했다. 미국(시카고)을 경유해 일본(도쿄)과 중국(북경)에서 하루씩을 묵어야했다. 북경(베이징)에 닿으면 북한대사관을 찾아 입국사증을 받자마자 곧 항공권을 구입 뒤 공항으로 부산히 움직여야 하는 코스였다.
수년전부터는 중국 심양(선양)에도 평양노선이 생겨 방북길이 간편해졌지만 대부분의 북미교포들은 북경을 거친다. 기왕 중국을 지나니 하루 시간을 이용해 만리장성, 자금성 등 북경유적지관광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평양 다녀온 길을 밝히는 이유는 오래전 얘기지만, 방북당시 미 CIA의 정보능력에 대한 놀라움이 생각나서다. 북한관광코스 도중 판문점을 방문해 2층 ‘판문각’에서 남쪽의 산하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있을 때다. 바로 건너편 남쪽엔 ‘자유의 집’이 보였다. 북쪽 편으론 인민군 병사들이 부동의 자세로 임하고 있고, 남쪽(한국)곳곳엔 미군병사 모습만이 보였다. 단 한명의 한국병사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막사에서 우르르 미군 병사들이 몰려나와 2층의 나를 겨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고급 버버리(Burberry)겨울코트를 입은 차림새 모습을 드러내니 어느 거물급 인물로 여긴 듯싶다. 며칠 후 방북 일정을 마치고 항공로 그대로 돌아올 때였다. 시카고 공항에 닿으니 미 정보요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나만 따로 불러 심문했다. 캐나다 시민권자니 캐나다여권을 내보였다. “당신직업이 뭔가.” “신문기자다.” “기자라고 확인할 수 있는 증명서 2개를 보여라. 사진이 부착된 증명서를 원한다.” 명함을 내밀다말고 내 얼굴이 부착된 당시 조선일보신분증 및 토론토 경찰국본부발행의 기자출입증을 보였다.
그제야 싱끗 웃으며 “뭘 산 게 있느냐”며 얼버무리며 놓아줬다. 판문각에서 미 병사들에게 사진 한번 찍혔을 뿐인데, 내 여행 행적(경로)을 추적해 나를 찾아낸 미 CIA 정보능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송광호 북미특파원· 본지 상임고문
<저작권자 ⓒ 통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