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 땅]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아닌 추방” 주장?

잘못 알려져 있는 사건하나를 밝힌다

송광호 북미특파원 | 기사입력 2022/04/23 [11:52]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 땅]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아닌 추방” 주장?

잘못 알려져 있는 사건하나를 밝힌다

송광호 북미특파원 | 입력 : 2022/04/23 [11:52]

 


과거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망명보도

결코 진실이 아닌 ‘언론이 정설처럼

만들어낸 허구였다’는 사실이 팩트 

 

세상에는 사실 아닌 허구가 정설처럼 알려져 있는 사건이 있다. 악의 없이 왜곡돼 인구에게 회자되는 경우다. 이러한 일은 세상사에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일반인은 그런 오해와 거짓이 사실처럼 둔갑돼 있는 내용을 알던 모르던 그냥 흘려보낸다. 대개는 사안을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이유가 클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경우는 다르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진실이 드러나면 바로 잡고, 규명해야 옳다. 나는 해외현장에서 근 40년을 뛰어다니다 우연찮게 여러 사건을 알게 됐다. 지난1981년에 비롯된 해외기자생활이, 1992년 지방지 모스크바특파원을 거쳐, 나중 북미특파원(강원도)이름으로 미국, 캐나다를 넘나들며 접했던 내용이다.  

 

이번엔 여태껏 항간에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있는 사건하나를 밝히려 한다. ‘1960년 5월29일 발생한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설’이 그것이다. 과거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망명보도는 결코 진실이 아닌 ‘언론이 정설처럼 만들어낸 허구’였다는 사실이 팩트 이다. 

 

그러한 오판역사를 세상에 정설로 부각시킨 사람이 다름 아닌 신문기자였다. 당시 취재보도를 한 20대 후반 Y라는 사회부기자는 한밤중에 회사로 걸려온 익명의 전화제보로 일약 대단한 특종을 한다. 그는 그 제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밤새 이화장(이승만 사저)을 지켜보며 아예 ‘망명’으로 단정 지은 것이다. 그의 판단이 그렇게 기울게 된 것은 이승만 하야 후 당시 사회 분위기하며, 언론에도 자주 이승만 망명설이 대두됐었기 때문이다. 

 

그런 참에 일요일 새벽녘 김포공항까지 이승만 부처 차를 미행하면서, 남몰래 전세기편으로 하와이로 떠나는 이승만 부처와 한두 마디 단독 대화를 신문에 터뜨렸던 것이다. 그것이 일약 세기의 특종으로 둔갑돼 오늘까지 ‘망명’이라는 가짜 대한민국 역사화가 이루어 진 것이다. 무한한 언론책임의 두려움을 새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Y기자는 그때 공항에 배웅 나온 허정 수석국무위원(외무부장관 겸임)으로부터 “휴양 차 떠났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신문사 호외까지 발행하며 전격 ‘망명’으로 보도했다. 아무도 몰래 일요일 새벽 출국하는 모양새이니 틀림없는 망명으로 오인한 것이다. 그 이승만 망명보도가 곧 우리나라 역사가 됐고, 언론은 세기의 특종이라고 선전했다. 결국 이승만의 한 달 남짓일시 해외임시체류 휴양목적 출국 또는 추방형식이 ‘망명’으로 둔갑된 이래 오늘까지 그대로 굳어져 있는 셈이다. 

 

어쨌든 추방이든, 또는 망명이든 분명한 팩트는 늦더라도 밝혀져야 한다. 이 진실폭로는 이승만대통령 하야 후에도 끝까지 이승만 곁을 지켰던 한 경찰관부부의 실지 입을 통해 처음 흘러나왔다. 이박사부처의 하와이출국 직전까지 종로구 이화동 사저에서 집안일(집사)을 돌본 우석근(29년생)경찰간부의 당시 경험담을 통해서다. 

 

진실폭로는 이승만대통령 하야 후에도

끝까지 이승만 곁을 지켰던 한 경찰관

부부의 실지 입을 통해 처음 흘러나와

 

한참 세월 후 지난2016년 ‘이승만의 망명은 허구’라고 강연한 L기자의 이승만 포럼내용에서도 “이승만 망명은 오해와 거짓의 역사”로 설명하고 있다. 진실이 아닌 역사는 마냥 숨겨져 있을 수만은 없다. 이승만 망명관련 내용을 당시 우석근 경무대(현 청와대)경호실 간부를 통해 전한다.  

 

우석근씨는 지난2000년대 초반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거주하는 사업가였다. 당시 그는 사우디 수도 리야드 한인회장이며, 강원도청 국제자문관(강릉출신)이기도 했다. 사실 강원도청 자문관회의에서 처음 그를 알게 됐다. 두세 번 강원도행사에서 나와 마주치자, 그는 내가 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자꾸 이승만대통령 얘기를 꺼냈다. 

 

“이승만대통령은 망명이 결코 아니고 추방당했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지난2005년 강원도민일보에 그의 주장을 첫 기사화했다. 그러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주민들 관심도 없었다. 당시 나는 ‘지구촌 강원인’이란 기획기사로 미주지역 강원인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때 우석근 씨를 함께 포함시켰다. 이제 그의 스토리로 통해 이승만 망명에 대해 ‘추방이냐, 망명이냐’는 그의 견해를 들여다보자.

 

리야드에 30여년 이상 거주하는 ‘한국동포’

 

- 우석근은 누구인가

 

1929년생인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30여년 이상 거주하는 한국동포이다. 처음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곳 중동지역의 터줏대감으로 많은 사회적 직함을 갖고 있었다. 리야드 한인회장 뿐 아니라 중부지역 한인회장도 겸직했다. 그뿐이 아니다. 중동-아프리카지역 한인회 연합회장, 민주평통 구주 남부, 아프리카, 중동지구 협의회 지회장,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 재단 중동주재위원 등 열거하기에도 바빴다. 

 

재력 있는 해외동포로 구성된 

‘한반도통일연구회’에도 가입

 

강원도 고향에서도 도청 국제자문관과 강릉시 명예협력관으로 임명돼 있었고, 재력 있는 해외동포로 구성된 ‘한반도통일연구회(본부 독일)’에도 가입돼 있었다. 해외교포사회의 크고 작은 감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는 내게 해외교포생활, 통일문제 등으로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건국대통령 이승만 얘기로 화제가 바뀌면서 금세 편치 않는 얼굴이 됐다. 

 

“아, 세상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망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절대로 그게 아니에요. 당시 민주당에서 추방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씀하세요? 무슨 증거자료가 있나요?” 

 

그는 자유당정부 출범 후 이승만 부처와 함께 얽힌 자신의 얘길 풀어나갔다. 그는 강릉 기업가의 한 유복한 집안환경에서 태어나, 해방 다음해 46년부터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고한다. 경비대에 편입하면서 간부후보생으로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경무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나는 대한민국 건국 초창기부터 정보전문가로 이승만 정부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어요. 1951년부터 경무대에 들어가 24세 때 2살 아래인 부인 방재옥 씨와 중매로 맺어 졌지요 아내는 경무대 내부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었어요” 

 

부인 방씨는 오래전부터 대통령 사가인 이화장 뒷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때의 인연으로 경무대와 이화장 양쪽에서 이승만 정권의 마감순간까지 10여년 세월을 같은 배에서 보내게 됐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부 실각 후에도 아내(방재옥)와 같이 이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당시 한 달 후엔 미대통령(아이젠하워)의 한국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민주당 정부가 이 대통령을 속이고, 급히 마련해준 전세비행기를 마련해 결국 추방시킨 결과가 됐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늦어도 한 달 내에 귀국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요. 그래서 대통령부처 짐도 간편히 트렁크 2개와 약품가방 1개, 타자기 1대 등 4개가 전부였어요. 이화장 집안에 있는 금붙이 등 귀중품은 전부 두고 떠났습니다” 

 

그는 ‘망명’이 결코 아니라고 열을 올렸다. “제가 산 증인이에요. 우리 부부가 끝까지 대통령부처를 모셨으니까요”라며 “만약 진정 망명자 입장이라면 누가 그렇게 귀중품을 전부 집에 두고 그냥 떠나겠습니까?”하고 반문했다.

 

5.16군사정부시기인 1966년까지  

중앙공무원(정보요원)으로 근무

 

그러다 4.19가 터지고 곧 5.16군사정부시기인 1966년까지 그는 15년간을 중앙공무원(정보요원)으로 근무했다고 밝혔다. 그는 중앙정보부 초창기 멤버(요원)였다. 박정희 군사정부 때는 중앙정보부 창설을 위해 제1기 중앙정보부요원으로 뛰어다녔다.  

 

우석근 요원은 66년 베트남으로 갔다. 월남전이 한창인 시절이다.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7년간을 베트남에서 활동했다. 그가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고개를 저으니 알 수 없다. 정보전문가라고 하니 아마 그 계통에 종사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73년에는 라오스로 갔다. 

 

“그때 나이가 이미 44살이 됐지요. 라오스에 한국대사관이 처음 세워져 창설요원으로 선발됐기 때문이오. 그러나 라오스에서 일하던 중 75년 4월30일 월남이 패망하면서 그해 7월 라오스대사관도 곧 철수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동남아 지역이 공산화로 급변 화에 따른 조치였다.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베트남과 더불어 공산화되고 있었다. 그때를 마지막으로 그는 9년여 기간 해외공관생활을 청산하게 됐다고 한다. 이승만대통령 사저(이화장)를 지키며, 측근자였던 우씨 부부와 이 대통령 관련해선 더 이상 얘기꺼리가 없다. 

 

해외공관 청산 후 우석근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약 5년간 이란, 튀지니, 리비아 등지를 전전하며 해외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다 50이 넘는 나이에 정착한 땅이 회교국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에 사우디에 닿아 30여 년간 상주하며 그 땅에 굳건한 사업뿌리를 내렸다. 동원개발주식회사라는 현지법인체를 설립하고 대표직함으로 비즈니스를 일궜다. 가족도 사우디로 데려왔다. 그러나 사우디는 영주권을 허용 않는 나라다. 이 때문에 2년마다 체류비자를 연장해 가며 계속 살았다.

 

사우디는 개인사업은 못하지만, 그는 노동허가가 있어 회사성장이 빨랐다. 주로 토목공사와 발전소, 변전소, 고압송전선로 등 전기공사 등을 맡았다. 사우디는 ‘라마단’이라는 10월부터 한 달간은 금식기간이 있다. 이때는 다른 나라에 머물면서 그도 안식을 취한다. 사우디의 까다로운 환경 때문에 미국 필라델피아에도 거주지를 마련해 놓았다. 미국 영주권도 갖고 있어, 세계가 좁다고 누빈다. 

 

반세기 훨씬 전 일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살아생전 하와이에서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거부 때문이었다. 결국 1965년 7월19일 90세로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고국으로 운구 돼 국민장으로 서울 현충원에 묻혔다. 그리고 2년 뒤 부인 프란체스카 역시 그의 곁에 묻혔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권이 수차례 바뀌면서 어느 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진정한 우리나라 건국대통령인가”에 부정적인 견해가 등장했다. 그것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 역사관이 달리 해석돼 지는 오늘 대한민국 현주소로 보인다. 새 시대의 주인공인 후배님들, 과연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송광호 북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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