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1998년 황해제철소 노동자 폭동사건을 말하다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인터뷰] 김화순 前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무역국장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4/08 [10:41]

탈북민, 1998년 황해제철소 노동자 폭동사건을 말하다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인터뷰] 김화순 前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무역국장

통일신문 | 입력 : 2021/04/08 [10:41]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예전의 연평균 10명 미만이던 탈북자 남한입국은 7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북한당국은 ‘인민의 영원한 수령’ 김일성 시신을 세계최고의 시신궁전에 미라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거액의 국고를 탕진했다. 

 

이듬해 5월, 평양시민 식량배급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지방에서는 그보다 1~2년 앞서 배급이 중단되었다는 여러 탈북민들의 증언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품팔이에 나섰고 시장에 나와 장사를 하며 연명 하였다.

 

북한당국은 독재체제의 특성상 사회의 사건, 사고, 통계 등을 공표하지 않는다. 탈북민들의 증언은 유일하게 통일 후 북한역사를 바로 정리할 귀중한 자료이다. 수년 간 탈북민들을 취재하면서 듣는 이야기 중에 다소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1998년 여름 황해북도 송림시에서 있었던 황철 노동자들의 폭동사건이다. 북한에서 일명 ‘송림사건’이라 불린다. 이에 대한 취재를 위해 과거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무역국장을 역임했던 김화순 탈북여성을 만났다.


 


- 황해북도 송림시는 어떤 도시인가.

 

일제시기부터 제철소 도시로 잘 알려진 북한 황해북도 북서쪽에 있는 인구 12만의 도시이다. 행정구역은 18개의 동(同)과 6개의 리(里)로 구성되어 있다. 황해제철소는 중국 등에서 가져온 철광석으로 제철·제강·강판·코크스 등을 생산하고 있다. 송림은 해방 후 김정숙(김일성의 본처)이 다녀갔고, 1970년대는 김성애(김일성의 후처)가 와서 황철합숙을 호텔 수준으로 꾸리라고 지시했다.

- ‘송림사건’에 대해서 알고 싶다.

송림사건은 내가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무역국장 직무를 맡기 전 업무관계상 자주 만나던 황해북도 검찰소 1처 홍OO 과장한데 비교적 자세하게 들은 내용이다. 그는 도(道) 검찰소에서 10년을 근무한 법무일군으로 신뢰하는 사람이다.

당시 내 직함은 34호 화학건설연합기업소 재정부장이었다. 북한에서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했고 이듬해부터 인민들에게 식량배급을 해주지 못했다. 당국인 인민들의 식량문제를 기관 단위별로 자체로 해결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황해북도 북서쪽에 있는 인구 12만의 도시

황해제철소는 중국에서 가져온 철광석으로

제철·제강·강판·코크스 생산하는 공장

 

사건의 본질은 ‘고난의 행군’(1990년대 중후반)이 한 창이던 1998년 여름, 황해제철소 간부들이 노동자들의 식량배급을 위해 중국에 압연철판을 팔고 밀가루, 옥수수 등을 들여왔다. 이것이 당국의 승인 없이 국가 소유인 압연철판을 중국에 내다판 간부들을 당을 배신하고 국가반역죄에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그에 반발하며 제철소에 모인 노동자들을 ‘똑같은 반동분자’라며 인민군 탱크로 학살한 것이 송림사건의 본질이다.

- 당국이 못주는 식량문제를 기관 단위로 자체 해결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랬지만은 나라의 재산을 불법으로 팔면서까지 하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송림시당 책임비서를 겸직하고 있는 황해제철소 당위원회 책임비서와 지배인, 부지배인 등 제철소 간부들이 앞장서서 ‘식량구매운동’을 하였다.

노동자들도 제철소의 전동기, 각종 부속품을 몰래 훔쳐 시장에 내다 팔아 식량을 구입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자재를 지키려는 창고장에 의해 이 사실이 도당, 중앙당으로 보고가 올라갔고 급기야 인민군 보위사령부 검열이 나왔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중앙당에 올라간 보고만큼은 100% 수령(김정일)에게 들어간다.

 

송림사건은 제철소 간부들이 노동자들의

식량배급을 위해 중국에 압연철판을 팔고

밀가루, 옥수수 등 들여와…당국 승인 없이

국가소유인 압연철판 중국에 내다판 간부들

국가반역죄에 누명을 씌워 처형…그에 반발

제철소에 모인 노동자 ‘똑같은 반동분자’로

인민군 탱크로 학살한 것이 사건의 본질

 

- 그러면 ‘송림사건’도 수령이 알고 있겠다.

당연하지 않겠나. 북한이 어떤 나라인가. 당국의 준칙(규정)을 주면서 개인의 시시콜콜한 행동까지도 통제하는 독재집단이다. 자칫 반정부 시위로 바뀔 수도 있는 그런 엄청난 사건을 수령이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국가통치자들은 국가의 안위에 가장 큰 신경을 쓰는데 독재자는 더욱 그렇다고 보면 된다.

- 검열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다.

우선 중국에서 제철소 전용선에 식량을 싣고 들어오는 간부들을 정박부두 현장에서 체포하여 어디론가 조용히 끌어갔다. 거기에 항의하는 형식으로 노동자들이 제철소에 모여 농성을 벌였다. 그들은 “간부동지들은 우리 노동자들의 식량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제철소를 정상가동하여 수령님의 교시를 관철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항의하였으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독기 어린 눈으로 광분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동자들은 공장 구내 길에서 몇 천 명이 모여 앉아 버티기 투쟁을 했고 이 소식에 온 송림시 안의 인민들이 너무나도 통쾌해 격려하였다. 시위자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당국을 대표하는 간부가 나서서 들어줄 때까지 앉아 버티기로 하였다.

새벽 무렵 탱크무한궤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순간 어떤 군인의 구령소리와 함께 굉음을 내는 탱크가 시위대열 속으로 들어왔다. 뜻밖의 기습에 앞에 앉아 버티던 노동자들 수십 명이 순식간에 탱크 무한궤도에 깔려 들어갔다.

- 또 다른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어떤 것인가?

마치 전쟁 속의 포화가 멎은 것처럼 고요한 다음날, 송림시 거리에는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성) 명의로 된 포고문이 결렸다. 그 내용은 무모하게도 사회주의체제를 위협하고 좀먹는 불온 선동으로 시위를 주도해온 주모자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즉결 심판한다는 것이었다. 소름이 끼치는 포고문이 나붙은 거리로는 자동보총을 멘 인민군 군인들이 골목을 누비며 다니는 것이 마치도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나 같았다.

-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을 것 같다.

밖에서는 모든 가정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지 말라는 내용의 확성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들은 “이거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꼼짝 달싹 못하고 죽는 것 아니야?” 하며 숨소리마저 죽였다고 한다. 매일처럼 살벌한 분위기가 고조 될수록 가장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여성들과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공장 구내 길에서 몇 천 명이

모여 앉아 버티기 투쟁을 했고 이 소식에

온 송림시 안의 인민들이 통쾌해하며 격려

시위자들은 자기들 요구를 당국을 대표하는

간부가 나서서 들어줄 때까지 앉아버티기로

순간 탱크가 시위대열 속으로 들어오면서

뜻밖의 기습에 앞에 앉아 버티던 노동자들

수십 명이 순식간에 탱크 무한궤도에 깔려

 

- 관련자들은 어떻게 처벌했는가?

며칠 뒤 OO학교 운동장에 모여 주동분자, 공모자 등 42명을 공개 총살하였다. 책임비서, 지배인, 부지배인은 이미 따로 총살했다. (참고로 북한역사상 ‘책임비서’를 공개 총살한 것은 ‘송림사건’ 때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들의 시신을 송림시 어느 외곽지역에 평토(봉분을 만들지 않는 묘지) 했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다음날 평토 자리에는 거대한 봉분이 생겨났고 그 위에 수백 개의 헌화가 놓여있었다. 당국의 무능함으로 굶주리는 노동자들의 식량해결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제철소 간부들에 대한 애도표시로 보인다.

다음날로 보위사령부 2차 검열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송림시를 지역을 봉쇄하고 인민군 탱크부대가 들어갔다. 확성기로 밤마다 “제철소 부품을 훔친 사람들은 모두 자수하라!”며 시민들을 위협하였다. 대략 6개월 뒤 36명을 2차로 집단 총살하였다. ‘송림사건’으로 전국의 관련자는 대략 100명 정도(추정), 모두 총살된 것으로 안다. 그 외에도 ‘송림사건’으로 정신분열증 등의 고초를 겪다가 죽은 사람도 많다.

- 망자들은 너무도 억울할 것 같다.

당연하다. 송림사건의 직간접적 관련자들은 모두 당을 반대하고 조국을 배신한 행위를 저지른 용납이 안 되는 ‘극악범죄자’로 몰아 붙였으니 말이다. 너무 정신적 충격이 커서 검열을 받는 도중에 ‘정신병자’가 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것 때문에 ‘총살’은 면했으나 결국은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죽기는 똑같다.

- 북한판 ‘5.18항쟁’인 것 같다.

국가라는 거대집단에 대중이 용감하게 대항한 면에서는 그렇다고도 볼 수 있다. 남한의 5.18항쟁은 자유 민주주의를 요구하여 국민들이 벌인 투쟁이다. 북한의 송림사건은 단지 식량문제 때문에 발생한 초유의 인민항쟁이다.

북한은 식량배급으로 주민을 통치하는 잔인한 독재집단이다. 사람은 반드시 먹어야 사는 동물이기에 죽지 않으려면 당국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하는 것이 북한주민들의 숙명이다. 세상에 그렇게 불쌍한 국민은 없을 것이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북한에 남겨진 친인척들 때문에 자세한 소개는 어렵다. 1963년 9월 원산경제대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그 대학에는 재일본입국자 출신이 많았다. 68년 8월에 졸업 후 함경북도 소재 ‘조선34화학건설연합기업소’ 재정부장에 임명되었다.

북한굴지의 화학, 비날론, 섬유공장 등을 건설하는 전문대형건설회사인데 예산 대부분은 외화다. 재정부장은 미화 수백만 달러를 주무르는 직책이어서 중앙당비서처 대상(김일성의 사인으로 임명받는 직책)이다. 나는 매해 평균 외화예산 15~20%를 절약하여 국가에 바쳤으니 그 공로로 많은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무역국장은 평양에 올라가서 중앙인민위원회로부터 ‘장군님 신임장’(임명장)을 받아 2001년 1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무역국장 직무를 수행하였다. 도(道) 인민위원회를 대표하여 중국무역을 하는데 품목은 약초, 잣, 누에고치, 철광 등 다양하다. 중국출장 허가는 국장 월 3회, 과장 2회, 지도원 1회만 승인한다. 중국을 제집 드나들 듯 하며 열심히 일한 이유는 인민들의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다.

 

국민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잘 알았으면 해

간혹 주변에서 탈북자들 이렇고 저렇고 하는

편향적인 소리 들으면 화가 나…탈북민들은

자유가 없는 북한사회 온 몸으로 체험했기에

자유의 가치, 소중함 등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전쟁나면 탈북민들 대한민국 앞장서 지킬 것

 

- 북한 무역부분의 특이한 현상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평양에는 해마다 수십 명의 중국인 사업자들이 무역에서 진 빚을 받으려고 온다. 숙소는 광복거리에 있는 청년호텔이다. 여기서 숙식을 하며 북한 전역에 있는 해당 공장으로 빚 받으려 다녀서 받아내는 사람은 10에 1명 정도이다.

우리가 무역업무로 중국 측의 초청으로 북경 혹은 지방에 가면 여비부담은 모두 주최 측에서 한다. 그것이 보통 국제적인 관례이다. 허나 북한은 다르다. 중국 관계자를 초청할 때 거기에 드는 비용을 모두 수락인 한데 부담시킨다.

거기에 모두 속는다. 외교와 비슷한 무역이 그렇다. 국제교류를 하는 특정 기업인들이 상대에게 빤히 속는 줄 알면서도 미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은 국제사회가 강력히 반대하는 핵개발, 미사일 발사 등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파렴치한 정권이다. 이런 불량국가 북한에서 하는 무역은 정상적인 국제교류 업무로 절대로 될 수 없다.

- 탈북 할 때의 일을 들려줄 수 있나.

2009년 9월 초 업무출장 차 중국으로 나왔다. 마지막 출장이니 탈북이나 마찬가지다. 출국하기 전 두 딸과 사위, 손자에게 두만강 접경지역으로 오라고 비밀리에 부탁을 하였다. 거기에 드는 비용도 충분히 주었고 다행히 자식들은 그렇게 하였고 브로커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북했다. 11월 17일 온 가족이 재회하여 심양, 곤명, 라오스, 태국을 거쳐 12월 30일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국민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잘 알았으면 좋겠다. 간혹 주변에서 탈북자들이 이렇고 저렇고 하는 편향적인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난다. 그때는 당당히 말해준다. “그래도 전쟁이 나면 대한민국을 앞장서 지킬 사람은 탈북민들” 이라고. 탈북민들은 자유가 없는 북한사회를 온 몸으로 체험하였기에 대한민국 국민들보다는 자유의 가치, 소중함 등은 너무나 잘 안다. 목숨 같은 자유를 지키지 못하면 북한 2천만 인민처럼 김정은의 노예로 짐승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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