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작은 꿈들이 모여 눈덩이처럼 커지고 결국 이뤄질 것”

[인터뷰]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추상미 감독/이송 탈북배우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19/07/25 [15:29]

“통일은 작은 꿈들이 모여 눈덩이처럼 커지고 결국 이뤄질 것”

[인터뷰]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추상미 감독/이송 탈북배우

통일신문 | 입력 : 2019/07/25 [15:29]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6.25남침전쟁시기 폴란드에 보내진 1,500명의 전쟁고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이 영화의 감독 겸 주연을 맡은 추상미 감독(40대)과 탈북배우 이송 씨(20대)를 만나 영화촬영과정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들었다.

67년 전에 전쟁고아들을 맡아 키운 폴란드 교사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식처럼 사랑하였던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전쟁으로 부모들을 잃었던 그들에게 사랑으로 희망을 안겨 준 폴란드 교사들은 재북시절과 탈북과정에 쌓인 트라우마로 고통스러웠던 탈북배우 이송 씨에게도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안겨주었다.

지난 2018년 10월 31일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줄거리는 1951년에 폴란드에 보내진 한국전쟁고아 1,500명에 대한 이야기를 당시에 그들을 맡아 교육했던 폴란드교사들을 통해 보여준다.

추 감독은 폴란드로 간 전쟁고아들 중에 병으로 죽은 김귀덕 소녀에 대해 폴란드 작가가 쓴 소설 ‘천사의 날개’를 읽고 비극의 역사를 영화로 담아냈다. 우연 중에 산에서 야생풀을 뜯어먹고 사는 북한의 한 꽃제비소녀가 나오는 영상을 보고 부모 잃고 힘겹게 살아가는 북한 어린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영화에 출연할 배우선정을 위해 여러 차례의 오디션이 진행되었고 이를 통과된 탈북배우 이송 씨와 함께 폴란드 현장에 찾아간 추 감독은 당시 전쟁고아들을 가르쳤던 교사들이 90대가 넘는 고령의 나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교사들을 만나는 과정이 촬영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약 10만 여명의

전쟁고아들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고

한국에서는 해외입양 등 민간차원의

대책 추구…북한정부는 동유럽국가

중국에 입양 아닌 위탁보호형식

 

영화에는 추 감독과 이송 씨가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이 폴란드에 가서 공부하였던 건물과 2차세계대전시기 독일군이 폴란드에 설치했던 아이슈비츠 강제수용소, 김귀덕소녀의 무덤을 탐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요제프 브로비치 원장과 체육교사를 비롯하여 당시 전쟁고아들을 가르친 교사들을 만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1959년 북한당국이 전쟁고아들을 강제로 귀국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귀국하지 않으려고 머리와 온 몸에 찬물을 끼얹고 눈 위를 뒹굴기도 하지만 죽은 귀덕이를 제외한 전부 강제 귀국된다. 그들의 편지를 60여년이 되어오는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교사들은 전쟁고아들에게 아빠이고 엄마였다. 교사들이 흘리는 눈물은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의 눈물이었다.

추 감독의 부친은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에 한국 영화계와 연극계에서 유명배우로 잘 알려졌던 추송웅배우(1941~1985)이다. 어릴 때 사시 눈을 가지고 태어난 추송웅 배우는 중고등학교시절 왕따를 당하면서도 연극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사시교정수술 후 천성적인 예술적 소질과 열정으로 중앙대학 연극영화과 1기 졸업생이 될 수 있었고 1963년에 극단 민중극장(民衆劇場)을 창립하여 창립공연으로 마르소 작, 김정옥 연출의 ‘달걀’에 출연하면서 연극계에 데뷔하였다.

천성적인 기질의 부친의 DNA를 물려받아서인지 추 감독의 예술적인 감각은 배우에서 감독으로 발 돋음 하게 했다. 추상미 감독은 심한 산후우울증으로 시달리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던 와중에 북한 꽃제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접하게 되었고 폴란드에 보내진 북한 전쟁고아들에 대한 논문을 보게 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에 간 아이들’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음의 상처는 분노를 낳는다고 한다. 상처당한 사람들이 가해자가 되어 또 다시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이런 상처의 선순환이 이어지면서 비극적인 상처는 증폭된다. 그러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힘은 증오와 분노를 녹여내고 사랑의 연결고리로 정신적인 피해를 치유한다.

 

폴란드에 갔던 북한전쟁고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주제로 선택하고 오디션을

통해 영화에 출연할 배우로 이송 씨 선정

2014년 북한을 탈출 한국에 입국, 배우의

꿈을 안고 동국대 연극학부에서 공부 중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약 10만 여명의 전쟁고아들의 삶은 비극에 비극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는 해외입양 등 민간차원의 대책을 추구하였다면 북한정부는 중국과 동유럽 국가들에 입양이 아닌 위탁보호형식으로 맡겼다.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전쟁고아 수는 연구자들이나 조사 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나지만 남한에서만도 전쟁고아가 대략 5만여 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지역도 거의 비슷하다고 보았을 때 10만 여명의 전쟁고아 숫자는 거의 인접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이해성의 논문 (폴란드에 남겨진 북한 전쟁고아의 자취를 찾아, 중동유럽한국학회지, 2015년)에 따르면 동유럽국가들에 위탁보호로 넘겨진 전쟁고아 숫자는 1만 명을 넘는다.(1951년부터 1959년까지 폴란드에 6천여 명, 루마니아에 3천여 명, 헝가리에 950여 명, 동독에 600여 명, 체코슬로바키아에 400여 명, 불가리아에 500여 명) 그 중 절반이상이 폴란드에서 위탁·양육되었다.

폴란드가 한국전쟁고아들을 가장 많이 받았던 이유는 2차세계대전시기에 폴란드의 전쟁고아들이 다른 나라들에 많이 입양되었고 그 과정에 전쟁피해와 고아들에 대해 관심이 컸던 탓이라고 본다. 한국전쟁고아들을 맡아 키웠던 폴란드의 젊은 교사들도 어린 나이에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분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시기 시체를 밟고 학교에 가야 했었고 부모님들이 전쟁으로 희생되는 것을 보면서 자란 그들이었기에 북한 전쟁고아들의 부모가 되어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었던 것이다. 선한 의지를 사랑으로 깊은 시골에서 북한 전쟁고아들을 만나 사랑을 준다.

추 감독은 폴란드에 갔던 북한전쟁고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주제로 선택하고 오디션을 통해 영화에 출연할 배우를 선정했다. 2014년에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입국하여 배우로서의 꿈을 안고 동국대학교 연극학부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있는 이송 씨가 당선되었다.

휴전협정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한국전쟁의 지속상태에 놓여있다. 고향을 떠나 온 탈북청소년들의 삶은 어찌 보면 전쟁고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고난의 행군시기 부모님들과 친인척들이 기아로 사망하는 것들을 목격하고 생사를 건 탈북과정에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던 탈북청소년들의 시선으로 65년 전의 전쟁고아들의 삶을 그려보게 하였던 것이다.

친부모의 사랑으로 전쟁고아들을 키워왔던 폴란드 교사들은 이젠 90대의 고령의 나이임에도 북한으로 돌아간 애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불렀던 북한노래 2절까지 부르던 모습에서 60여 년 전에 생이별한 친자식을 향한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2019년 5월에 제16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진행되었다. 영화제에서는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과 함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팔라우’와 일본의 복음전파역사를 파헤친 ‘베데스다 인 재팬’, 애니메이션 ‘천로역정 : 천국을 찾아서’, 난민문제를 다른 ‘와일드 로지즈’와 ‘슐레이만 마운틴’ 등 기독교 세계관과 여성, 난민의 삶을 조명한 다양한 국적의 30편의 영화들이 선정되었다.

이 영화들 중에서 영화 <미소>, <시티 홀>, <내 여자>, <8월에 내리는 눈>, <열세 살, 수아> 등 많은 영화에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하고 <분장실>, <영향 아래의 여자>를 연출한 추상미 감독이 직접 출연하고 연출을 맡은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한국전쟁의 아픔과 분단의 비극으로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더 깊이 깨닫게 한다.

추 감독은 상처는 상처로 푼다고 말한다. 이를 상처의 연대로 표현한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선한 의지를 품고 상처를 입은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과 사랑을 주면 상처에서 나오게 되고 회복의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금은 추 감독을 언니라고 부르는 이송 씨는 영화촬영 초기에는 추상미 감독을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인터뷰 과정에 “추 감독님은 저의 진짜 언니예요”라고 말하며 웃음을 지었던 이송 씨의 얼굴에서 자매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다정히 속삭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통일을 앞당겨온 미래의 한반도를 그려보게 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남과 북, 웃고 떠들고 함께 할 그날이 눈앞에 그려졌다.

“영화촬영하면서 두 분이 처음에는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이 질문에 추상미 감독은 이송 씨가 마음을 열지 않아 힘들었다며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북한에서 살아온 유년 시절을 들으면 영화제작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폴란드로 데려왔건만 좀처럼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송 씨, 탈북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워하는 폴란드 교사들에게는 안겨 펑펑 울면서도 추 감독에게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자꾸 북한에서 살아온 나의 과거를 물어보는 것이 부담스러웠어요” 처음에 이송 씨는 힘들었던 북한에서의 고된 삶과 혈육에 대한 그리움, 그들에 대한 걱정 등 여러 가지 번뇌로 물어보는 말들에 대해 잘 대답하지 않았다. 폴란드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쟁 고아들의 삶에 함께 울며 가슴아파하는 추 감독을 보면서 점차 마음이 열려졌다고 한다.

북한에서 황금만능의 세상이라고만 배웠던 자본주의 사회인 남한사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였고 추 감독의 북한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아 얼마동안은 어색하였던 이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송 씨의 북한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었고 그때부터 언니, 동생이 되었다. 이송 씨는 추 감독을 자기의 진짜언니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는 사랑과 믿음, 행복이 피어난다.

남과 북은 70여 년간 분단되어 살아오면서 많은 이질감이 생겨났다. 가장 큰 이질감은 문화적인 이질감이다. 같은 현상을 보고도 서로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정도가 차이난다.

언어 차이도 만나서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북한사람들은 남한사람들이 진정성보다 외교적이라고 하며 한국 사람들은 북한사람들이 직선적으로 말을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한사람들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앞서고 북한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은 시원히 말하는게 습관화 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추 감독과 이송 씨는 이미 작은 통일을 이루었다. 그들은 말한다. “우선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싫고 좋음을 판단하려 들지 말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면 스스로 마음은 함께 하게 된다. 한번 상처를 받았다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추 감독은 남과 북이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하면서 국민들이 북한과 통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이송 씨는 앞으로 배우활동을 통해 연기감독 되는 것이 자기의 꿈이라고 말한다. 통일은 이런 작은 꿈들이 모이고 많아지면서 눈덩이처럼 커지고 결국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형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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