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다시 솟고 대동강 다시 흐르던 그날!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02/08/22 [10:37]

백두산 다시 솟고 대동강 다시 흐르던 그날!

통일신문 | 입력 : 2002/08/22 [10:37]
서영훈...


백두산 다시 솟고 대동강 다시 흐르던 그날!
-8·15 해방을 되새기며-


1945년 8월 15일은 우리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사슬에서 풀려난 날이다.
이날 우리는 일본의 속박과 압제에서 해방되었으며 어둡고 괴로운 식민통치하의 나라없는 백성에서 다시 대한의 자유민으로 태어났다. 이날 우리는 빼앗겼던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되찾았으며, 우리말과 우리글을 마음대로 다시 쓸수 있는 자유를 되찾았다.
이날 백두산과 금강산, 묘향산과 지리산이 우리 겨레의 정기와 기상을 드높이는 거룩한 산으로 다시 솟았고, 이날 한강과 낙동강, 압록강과 대동강도 유구한 우리 역사의 맥을 이어 용솟음치며 다시 흘렀다.
을사보호조약에 뒤이은 경술국치 이후로 이날이 있기까지 수천 수만의 의열 선인들과 수백만의 충의 남녀가 겨레와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피를 흘려 싸웠으며, 수천만 동포 온 겨레가 굴욕과 울분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은혜의 날이요, 그가 역사 속에 살아계시며 섭리하고 역사하심을 드러내 보여주신 날이었다.
나는 이 감격스럽고 역사적인 날을 스물세살 때 북한의 어느 산골에서 맞았다. 해방된 것을 안 것은 8월 15일 오후 두세 시쯤이었다. 라디오를 들은 사람들이 소식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3일 동안은 감격의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었다. 나보다도 아버지께서 더 큰 감격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그 때 마흔두 살이셨는데, 창씨개명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말을 한 번도 쓰지 않고 양복을 안입으신 것은 물론 일체의 시류 행세를 거부해 온 분이셨다.
일생동안 꾸며서 하는 말이나 없는 말을 하시지 않았고, 관청 사람들이나 행세하는 이들의 온당치 못한 언행을 보면 그 자리에서 서슴없이 직설적인 비판을 가하곤 하셨다. 덕분에 주목도 받고 소외도 당하면서 앙앙불락(昻昻不諾)한 나날을 보내 오셨던 만큼, 해방의 감격은 더욱 크실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그러한 생활태도를 물려주신 분은 바로 나의 조부이셨다. 조부께서는 일찌기 1920년대 초에 우리나라 최초의 협동조합운동을 산읍 덕천에서 일으키는 데(조합장으로 추대되어) 앞장서신 분으로 손문과 장개석을 매우 숭배하셨으며,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중일전쟁을 확대시켜 나가자 머지 않아 일본이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단언적으로 예언하신 분이었다.
자수성가한 분이라 글공부는 그렇게 넉넉히 못하셨으나, 신문을 모두(동아·조선) 받아 보시며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세계정세를 비교적 정확하게 꿰뚫어 보곤하셨다. 해방 6년전에 돌아가셨으므로 당신이 예언하신 대로 일본이 패망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보지 못하셨다. 그러나 일본이 앞으로 조선 청년들도 병역에 복무하도록 끌어 낼 것이라는 예언을 하시며, 외아들과 맏손자인 나도 그 대상이 될 것을 걱정하다 돌아가셨다.
그 뒤 전쟁은 더욱 확대되어 나갔고, 조부의 예언대로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을 내세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도를 실시하다가 마침내 징병제도를 강행, 한국 청년도 침략전쟁의 도구가 되도록 강요하였던 것이다.
나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 알고 보니 몇달 차이로 징병에는 해당이 안 되었는데, 일본 병정으로 끌려가 억울하게 죽느니 중국으로 도망치자는 생각으로 서울 YMCA에서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병을 얻어 별 수 없이 고향에 내려 갔다가, 결국은 경찰에 잡혀 열 달 동안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처음에는 판금된 불온서적들을 나누어 본 혐의로 잡혀갔는데, 조사과정에서 적국의 원수인 장개석을 숭배·찬양하고 중국으로 도망하려 했다는 것이 탄로나, 혐의가 확대되어 ?치안유지법?과 ?국가보안법?을 다 적용받는 중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내 뒤에 배후가 있을 것으로 본 듯, 사실보다 혐의를 크게 뒤집어 씌우고는 내내 독방에 가두어 놓고 말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며 똑같은 취조를 거듭했다. 평양 검사국에서 가장 유명한 ?모리(森)?라는 사상검사가 3백여리나 되는 영원경찰서로 직접 출장까지 나와 심문을 벌인 정도였으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다가 9개월이 지나서야 평양형무소 미결감방으로 넘어갔다. 그러부터 한 주일 후 (1943년 6월 어느날로 기억된다) 대낮에 감방에 앉아 있는데, 공중에 큰 북이 보이고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네가 큰 고생을 하였다. 오늘 밤 8시에 석방될 것이다?고 하는 크고도 분명한 소리가 들려오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바로 그 날 저녁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 나왔다.
그 뒤로는 요시찰대상이 되어 약 1년 반 가량을 탄광으로 절로 떠돌아 다녔다. 결국에는 징용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농사 지도요원이 되기 위한 강습을 받고 집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감격의 해방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창씨개명을 그토록 집요하게 종용받으면서도 아버지의 고집으로 끝까지 버틴 일이었다.
그날로부터 어느새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스물세 살 청춘으로 푸르던 나도 지금은 일흔다섯 살의 노구가 되었다. 무었보다 가슴 아픈 것은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감격스러웠던 해방이 민족분열과 조국의 분단으로 이어질 줄을 누가 꿈엔들 짐작이나 했던가?
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부모형제와의 이별,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치는 동안, 나 역시 고향에서 일어난 망극한 소식을 접하고 통한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희망을 버린다면 그 민족은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뻗쳐 나가고 있는 만큼, 머지 않은 장래에 백두산 다시 한번 장엄하게 솟아오르고 대동강 다시 용솟음쳐 흐르는 그 날이 올 것을 굳게 믿는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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