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세월 27/ 마지막 선택

장운영 | 기사입력 2004/11/02 [18:59]

은빛세월 27/ 마지막 선택

장운영 | 입력 : 2004/11/02 [18:59]
11월. 손수건만 하던 가을빛 자락이 이제 그 꼬리를 감추려 하고 있다. 보도에 뒹굴고 있는 낙엽,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싸늘한 바람결이 은빛세월의 마음을 회색무풍지대로 안내한다.
이맘때가 되면 왠지 삶의 윤기가 사라지고 떠도는 유랑객처럼 안정하기 힘들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실향의 은빛세월은 허옇게 들어난 삶의 뿌리를 바라보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낯선 시간을 저울질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살아온 날들...이제 그 정점에서 돌이켜 보면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았고, 기쁨보다는 절망감이 삶을 지탱하게 했다.
나라 잃은 민족으로 고통받았고, 고향과 부모잃은 아픔으로 그 상처 아물지 못한채 푸른 낙엽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정상의 언덕에서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은빛세월의 생애가 빛으로 영원하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던가 할 것이다.
오래전에 폴란드 국적을 가진 한 신부가 일본에 고아원을 설립했다. 그 운영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고국인 폴란드로 가 있을때 히틀러가 느닷없이 전쟁를 일으켜 폴란드를 점령했다.
독일군은 민간인, 군인을 묻지 않고 남자들은 모두 포로수용서에 잡아 넣고 노동을 강요했다.
용감한 폴란드의 젊은이들은 수용소에서 병들어 죽거나 굶어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살아 남는다 해도 독일을 도와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 뻔하자 탈출을 시도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아침, 운동장에 도열해 섰을 때 독일장교가 탈출하다 잡힌 폴란드인을 공개 처형하겠다고 말했다. 끌려나온 사람은 모든 희망을 잃고, 창백한 얼굴로 동료들과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신부와 시선이 부딪쳤다. 신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독일장교 앞으로 가 말했다. "이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세 어린이가 있다. 이제 이 사람이 죽으면 혼자의 죽음이 아니라 다섯 사람의 정신적 죽음을 강요하게 된다. 대신 누군가 죽으면 되니까 내가 남겠다. 이 사람은 살아야 한다." 고 말하면서 옆사람을 돌려 보냈다.
마침내 그 신부는 죽음을 택했고, 다른 사람들은 강제 노동장으로 끌려갔다. 저녁때 돌아온 수용소 방, 신부의 자리는 비어 있고 살아있는 사람은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이어야 한다면 가히 성인으로 남을 만도 하다.
북녘 동포들의 굶주림, 고향땅 어린이들의 퀭한 눈망울, 죽음과 마주한 무표정한 얼굴, 각 단체에서의 북녘 어린이돕기운동... 은빛세월의 생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인지, 차겁고 단단한 마음의 벽을 헐어내고 따뜻한 손길 내밀어 빛으로 남을 것인지, 선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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