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서평 ] 전 세계가 인정하는 작곡가·음악가의 삶

나는 윤이상이다// 박선욱 지음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4/04/02 [15:26]

[신간 서평 ] 전 세계가 인정하는 작곡가·음악가의 삶

나는 윤이상이다// 박선욱 지음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4/04/02 [15:26]

이 책은 윤이상의 삶을 관통한다. 윤이상은 1917년생이니 일제강점기 장성했고 광복할 무렵에는 이미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는 음악적 재능과 더불어 결코 비중이 적다고 할 수 없는 저항활동으로 조국을 찾아오지 못했다.

그 저항의식은 어릴 적부터 나타났다. 장래 희망과 관련하여 아버지와 충돌했다. 어떤 인생을 살고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 하는 점에서 아버지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

 

윤이상은 일본의 식민 지배와 민족말살교육에도 저항했다. 일본에 유학중일 때 같은 동포 학생들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고향 통영에 와서도 비밀결사를 만들어 해방에 대비했다. 일제가 조선어로 악보를 썼다는 이유로 탄압하고 강제로 일을 하면서 고초를 겪었다그는 광복후에도 특정 정치단체에 가입해서 저항 활동을 했다. 대상은 미군정이었다. 물론 고아들을 돌보는 일도 했지만, 저항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이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한동안 저항 활동은 드러나지 않았다. 통영여고 음악교사, 1949년에 부산사범학교 출강, 배우자가 되는 교사 이수자와 19501월 결혼, 6.25전쟁 기간 부산대 출강, 작곡발표회, 가곡집 출간을 했다. 동요 70여 편을 쓰기도 했다음악적인 재능으로 첼로 소나타 1번을 작곡하여 초연했고, 1955년에는 1년간의 준비 끝에 현악 4중주 1, 피아노 3중주를 작곡, 이 두 곡으로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그때 받은 상금 10만원과 집을 판돈으로 1956년 서른아홉 살의 적지 않은 나이로 혼자 프랑스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유학 갔다. 이어 1957년에는 더 많이 배우기 위해 독일의 저명한 교수 보리스 블라허가 있는 베를린음악대학에 들어갔다.

 

독일에서 여러 가지 작곡을 하면서 그의 곡은 동양적인 색이 들어가 독일 전문가로부터 높은 평가와 청중의 환호를 받아 음악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부자가 된 건 아니지만, 독일에 정착하고 일거리가 많아져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 작품 뤄양은 큰 호평을 받은 곡이었다그에게 저항적인 기질이 다시 부각된 것은 1963년부터 독일에 한국 유학생들이 몰려오고 광부와 간호사들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윤이상은 친목모임을 만들었는데 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뿐 아니라 윤이상은 재독한인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 무렵 윤이상은 6.25때 월북한 친구 최상한의 소식이 궁금하다며 북한대사관을 통해 소식을 듣고자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모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동서베를린 사이 자연스런 왕래, 유럽적 분위기에 익숙해진 탓에 무리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1963년 북한으로부터 초청받은 윤이상 부부는 평양을 방문했다. 거기서 실제로 친구 최상한을 만났다. 평양 등지를 시찰하면서 약 23일 정도 있다가 서독으로 돌아왔다. 윤이상에게는 평범한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이 사건은 결국 문제가 된다.

 

윤이상이 쉰 살이 되는 1967년에 동백림사건을 겪었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나간 뒤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법위반 혐의로 심문받고 재판을 거쳐 감옥소에 갇혀 있다가 약 18개월 만에 서독으로 돌아왔다. 윤이상은 박 대통령의 특사로 풀려났지만, 그는 그가 풀려난 것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와 음악가, 서독정부가 그의 석방을 위해 도움을 준 덕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윤이상은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작으로 초연된 오페라 심청전을 작곡해서 큰 명성을 얻고 극찬 받았다. 이 무렵 그는 대한민국 국적에 따른 제약과 부담을 의식, 국적을 독일로 바꿨다. 1973년에 조국에 금의환향하여 음악회를 추진하려던 중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위험을 고려하여 귀국을 그만두었다윤이상은 저항운동에 또다시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반정부운동이었다. 그는 명성 있는 인물이라 그가 하는 발언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 음악 활동을 넘어서면서 그는 비판받았다.

 

윤이상은 저항했다. 그가 반발한 방식은 한국의 이웃나라 일본과 북한에는 갔지만, 가까운 대한민국에는 오지 않는 식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가 만든 곡이 1982년 서울에서 연주되긴 했지만, 북한에서는 더 많이 연주되었다.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적잖았다.

 

민주화투쟁을 한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1994년이 귀국할 기회였으나, 역시 저항심 때문에 정부와 대립하다가 오지 못했다. 윤이상은 일본에 와서 배를 타고 남해 통영 쪽을 바라보고는 돌아갔다. 그는 죽을 때까지 우리 정부와 대립했다.

광복 후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기울어진 예술가들이 적잖이 월북했다가 대다수 일인우상숭배와 공산주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는 것에 괴로워하다가 사라졌던 사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송북 펴냄, 정가 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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