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일제가 무덤 내부 침입 유물 강탈…日 만행 고발하는 장소도

공민왕릉(쌍릉)

2013-09-30     통일신문

공민왕릉은 개성시 해선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릉은 고려 31대 공민왕과 왕비의 릉이다. 나란히 있는 쌍릉가운데 서쪽의 것은 공민왕의 현릉이고 동쪽의 것은 왕비인 노국공주의 정릉이다.

공민왕은 1365년 왕비가 죽자 자기가 직접 주관하여 묘자리를 고르고 왕비의 능을 만들게 했으며, 그 곁에 자기의 무덤도 미리 준비해 놓도록 했다.

1956년에 쌍릉 가운데서 공민왕의 현릉이 발굴됐다.

무덤칸 벽체와 천정에는 회를 바르고 동서북벽에는 각각 4상씩 12지신상을 그렸으며 천정에는 별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미술에 조예가 깊어 여러 작품들까지 남긴 공민왕 자신이 직접 그린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무덤구역은 4개의 단으로 되었는데 맨 윗단에는 무덤무지가 있다.

두 무덤무지 둘레에는 병풍돌을 돌리고 12지신 조각을 새겼으며 그 밖으로 난간을 둘렀다. 난간밖으로는 능을 지켜준다는 의미에서 매 릉마다 돌양과 돌범을 엇바꾸어 4개씩 배치했으며 매 릉앞에는 상돌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그 다음단에는 좌우에 무인상이 둘씩 서로 대칭하여 있고 윗단으로 오르기 위한 계단이 가운데와 양쪽끝에 설치돼 있다.

맨 아래 경사단에는 4개의 축대를 쌓고 가운데에 계단을 냈으며 그 아래 오른쪽에 제당이 있다.

제당과 마주한 서쪽에는 공민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던 광통보제선사 터가 있고 제당의 동쪽에 광통보제선사비가 있다.

다른 고려왕릉들에서는 흔히 왕과 왕비를 하나의 무덤칸에 합장하거나 서로 다른 곳에 따로따로 무덤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쌍릉 형식의 릉은 공민왕릉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것은 그후 조선왕조 시기 왕릉들의 한 형식으로 이어졌다.

공민왕릉의 앞에 있는 산봉우리를 ‘아차봉’이라고 한다. 산봉우리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데는 그럴만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왕비가 죽은 후 공민왕은 신하들에게 좋은 묘자리를 잡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하들로부터 명당자리를 잡았다는 말을 듣고 한 봉우리에 오르게 됐다.

그 봉우리에 오른 왕은 앞을 내려다 보며 내심 감탄했다. 지금의 무덤자리가 왕의 마음에 꼭 들었던 것이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대기하던 신하들은 그것을 풍수쟁이를 죽여 버리라는 신호로 잘못 받아들였다.

뒤미처 이 사실을 알게 된 공민왕은 자기의 실책을 깨닫고 ‘아차’하고 후회했다. 그때부터 이 봉우리를 ‘아차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공민왕릉은 풍수에 비추어볼 때 위치가 뛰어나고 건축술과 조형 예술성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할 뿐아니라 릉 시설물들도 원상대로 잘 보존돼 있다.

당시 고려사람들이 도달했던 수학 및 천문지리, 석조 건축술, 조각과 회화수준이 종합적으로 집대성된 공민왕릉은 고려시기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역사 건축물로 되고 있다.

1905년에 일제는 공민왕릉 뒤쪽 면돌을 폭파하고 무덤 내부에 침입하여 그안에 있던 수많은 유물들을 전부 강탈해 갔다.

이처럼 공민왕릉은 슬기롭고 재능있는 우리 인민들의 훌륭한 건축술을 보여주는 반면에 간악무도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