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신분에 당당하자…남과 북 다 살아본 특별한 사람이다”

[인터뷰] 아모레퍼시픽 인천논현지점 박봉선 마스터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0/02/27 [11:57]

“탈북민 신분에 당당하자…남과 북 다 살아본 특별한 사람이다”

[인터뷰] 아모레퍼시픽 인천논현지점 박봉선 마스터

통일신문 | 입력 : 2020/02/27 [11:57]

정치사상 왕국인 북한에는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구호가 있다. 여기서 은 수령(대통령)을 의미하며 우리2천만 인민을 말한다. 다시 말해 수령의 지시는 그 누구라도 절대적으로 무조건 집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1990년 초에 생겨난 노동당의 정치선전 구호이며 지금도 북한사회 모든 분야에 쓰인다.

1990년대 북한은 최악의 경제난을 겪었다. 김일성 사망(1994)과 이듬해 홍수피해, 고난의 행군시기를 보내며 수백만이 아사하는 재앙을 맞았다. 그 이유를 당국은 미제와 남조선괴뢰 때문이라고 했다. 노동당은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엄청난 희대의 거짓말도 뻔뻔하게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부터 남한에 입국하는 탈북민이 크게 늘어났다. 거의 해마다 수백 명의 북한주민들이 너무나 배가 고파 죽음을 각오하고 남한으로 내려오고 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국가 남한에 정착하는 탈북민들의 어려움 또한 만만치 않다. 인천 논현동에서 아모레퍼시픽에 근무하는 박봉선 마스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고향이 어디인가.

19782월 함경북도 새별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13녀의 막내이다. 내 위의 언니와는 8년 차이로 어머니가 43세에 나를 늦둥이로 낳으셨다. 아버지는 탄광 광부였다. 부모님은 정말이지 법이 없어도 살만한 그 야말로 순진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1995년 모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기능공전문학교(2년제)를 거쳐 탄광 배수기(물을 뽑아내는 기계) 운전공으로 배치를 받았다.

탄광에 웬 배수기인가.

사람들이 탄광, 하면 석탄만 캐내는 곳인 줄 아는데 석탄만큼이나 많이 뽑아내는 것이 물이다. 석탄채취를 위해 굴을 뚫다보면 여기 저기 지하 수맥이 나타난다. 거기서 나오는 물과 지상에서 흘러 들어가는 물 등 지하에는 물이 많다.

이 물을 단 하루도 빼지 않는다면 정말 큰일이다. 착암기, 발전기 등 여러 장비는 물론이고 석탄까지 물에 잠겨버린다.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물에 잠긴 석탄은 열량도 많이 떨어지며 크게 쓸모없어 결국은 버려지기도 한다. 현장 상황을 말하면 작업장은 지상에서 전동차를 타고 10분간 내려가서 있는데 보통 걸어서 25분 정도 소요된다. 반대로 일 끝내고 올라올 때는 오르막길이니 시간이 더 걸린다. 전차 철로 옆의 통로를 이용해서 걷는데 비포장 통로이다. 어두운 갱내 통로에는 조명이 듬성듬성 있으나 밝지 못해서 발을 잘못 디뎌 상처도 입는다.

하루 석탄 채취량은 어느 정도인가.

한 개 소대(작업반) 인원은 대략 10명 정도이며 작업은 2교대로 진행되고 1교대가 보통 10시간 이상이다. 10개 광차(대략 0.5t의 석탄을 실은 차량)를 하루에 1, 잘하면 2회 정도 지하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린다. 작업을 하다가 시도 때도 없이 정전이 되는데 그때는 아무 것도 못하고 꼼짝없이 갱도 안에 갇혀 있다. 그럴 때면 간혹 초급간부들의 선창에 따라 수령충성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현장에서 사고 같은 것은 없었나.

있어도 번번하게 있다. 주로 갱도가 붕괴되어서 생기는 사고인데 갱도를 받치는 원목이 오래되어 무너지기도 한다. 가령 10여명의 정원인 한 개 소대가 작업 중에 갱도가 붕괴되면 대략 2~3명은 죽고 2~3명이 중상을 입는다.

또한 착암공들이 석탄층을 찾아서 굴을 뚫을 때 화약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오발되어 발생하는 사고도 자주 있다. 그럴 때는 소대원(작업반원)들 모두가 온몸이 석탄 돌에 맞는다. 이럴 때도 경상을 입는 사람이 2~3명이 생긴다.

 

작업반은 10명 정도 작업은 2교대 진행

1교대가 보통 10시간 이상10개 광차

하루에 1, 잘하면 2회 정도 지하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작업 하다가 시도

때도 없이 정전이 되면 그때는 아무것도

못하고 꼼짝없이 갱도 안에 갇혀 있어

 

노동안전 규정이나 보호 장비가 있지 않는가.

노동보호법에는 안전규정이 있으나 현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유는 전조등이 달린 안전모, 마스크와 안경, 장화와 장갑 등 물품이 없기 때문이다. 고난의 행군시기가 시작된 1995년 이후로는 물자공급소에 상품이 전혀 없었다. 모두 간부들이 빼돌려 팔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각자 시장에서 구입하여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노동보호를 국가가 해주는 것이 아니고 개인이 하였다.

노동자들에 대한 물자공급은 잘 되었나.

내가 입직하기 전인 1990년대 초반까지는 광부생활이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들었다. 굴진공이나 채탄공은 900그램의 식량을 공급받고 탄광물자공급소에서 특별부식물로 한 달에 한 번씩 돼지고기, 과일, 생선 등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1995년 이후로는 기본적인 식량배급 마저 완전히 끊긴 사태였다. 노동자들의 출근율은 절반, 어떤 때는 그 이하로 떨어졌다. 광부 10명 중, 3~5명 정도만 일하려 나왔다. 죽어도 당을 따르는 골수분자들이다.

골수분자들? 정말일까.

분명 그렇게 봐야 한다. 사람이 그렇지 않나. 어떤 직책을 주면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열성을 피우는 습관이 있다. 그러니 초급일군들(소대장, 중대장, 세포비서, 선동원 등)은 물론이고 대중 속에는 정말 고지식한 사람도 적지 않다. 당에서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그런 속물인간들이 북한에는 너무 많다.

고난의 행군시기 기억에 남는 일은.

국가에서 식량을 주지 않으니 노동자들은 갱도에 들어가서 석탄을 갖고 나와 시장에 판다. 엄밀히 말하면 도둑질이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다. 간부들도 빤히 알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 시장에서는 석탄 한 배낭(20kg)과 옥수수 1kg을 바꾼다. 대략 10명 중에 4~5명이 석탄을 훔친다. 그러다보니 탄광에서 자체로 규찰대(질서유지대)를 조직하여 엄격한 단속에 나섰다.

탈북경위를 말해 달라.

고등학교 동창생 친구는 중국의 친인척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아 풍족한 생활을 했다. 어느 날 친구가 날보고 중국에 가서 한두 달 일해 돈 벌어오자는 제안을 했다. 중국에서 두 달 번 돈으로는 조선(북한)에서 1년을 산다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내가 탄광에서 일한지 2년 만에 연로보장자(정년퇴직자)인 아버지는 식량이 없어 굶어죽으셨다. 내 위에 있는 오빠 언니들은 모두 출가하여 집에는 나와 어머니만 살았다. 내가 가장이고 어떻게든지 살아야 했다.

언제 두만강을 건넜는가.

199810월 말 어느 날, 새벽 3시에 친구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다행히도 친구는 그동안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던 노련한 방법과 경력도 있었으니 안전한 통로가 어디라는 것쯤은 환히 꿰뚫고 있었다. 처음으로 찾아간 지역은 광동성 광주였다. 여기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완구공장에 취업하여 26개월간 일을 하였다. 이후 라오스, 곤명, 태국 등을 거쳐 20027월에 대한민국으로 왔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광부생활이 괜찮아

굴진공이나 채탄공은 900그램의 식량을

공급받고 탄광물자공급소에서 특별부식물

한 달 한 번씩 돼지고기, 과일, 생선 받아

1995년 이후로 기본적인 식량배급 마저

완전히 끊겨 노동자들 출근율은 절반으로

떨어져 10명 중 3~5명 정도 일하려 나와

 

사회에 나와서 처음 한 일은.

미용학원을 다녔다. 꼭 미용사가 되어 중국에 가서 일하고 싶었다. 이유는 중국에 있을 때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살면서 미용실을 자주 갔는데 미용 일을 하겠다는 욕심이 가득 생겼다. 허나 결혼을 하면서 그 마음은 접었다.

이후 2004년부터 사이버이야기평생대학원을 다니며 사회복지사자격증, 보육교육사자격증을 취득하였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근무하였다. 비록 3년간 일을 하였지만 어린이집 일이 가장 아름답게 추억된다.

 

9810월 새벽 3시에 친구와 두만강 건너

친구는 수차례 중국 드나들어 안전한 통로가

어디라는 것쯤 환히 알아처음으로 찾아간

광동성 광주에서 한국인 경영하는 완구공장

취업하여 26개월간 일 하다 이후 라오스

곤명, 태국 등 거쳐 20027월 한국 입국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되나.

북한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 아픈 마음이 든다. 한참 먹고 자라야 할 아이들은 밥이나 우유, 육류 등이 없거나 부족하여 늘 허기진 배를 그러안고 산다. 부모들은 당국의 선전대로 자기 아이들의 어려운 처지는 모두 미제와 남조선 때문인 줄 안다.

내가 남한에 와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보니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심정을 조금 알겠더라. 정말이지 애들만큼은 잘 키우려는 것이 남과 북의 어머니들이다.

지금 무슨 일을 하는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아모래퍼시픽 인천논현지점에서 마스터로 근무하고 있다. 화장품을 방문판매하는 직업이다. 영업장으로 찾아오는 고객도 있지만 그들을 찾아다니며 판매하기도 한다. 사람이 있는 곳은 전부 찾아간다. 미소는 기본이다. 한 번 찾아가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을 찾아가서 나의 진정성을 보인다.

고객도 천차만별 아닌가.

당연하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처음부터 거칠게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고, 사겠다하고 안사는 사람도 있고, 이리 저리 핑계를 대는 사람도 있다. 그럴지라도 전혀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철저한 영업방식이다. 10년 전 내가 이 회사에 취업 할 때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네 성격에는 그 일을 한 달도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한 달이 아닌 10년째 근무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정말 네가 맞느냐?” 하면서 의아해하고 있다.

어려웠던 문제들은 어떤 것이었나.

입사했을 때 회사에서 탈북민은 내가 유일했다. 일부 직원들이 내가 왜 탈북민과 함께 일해?” 혹은 왜 그 밑에서 일해야 돼?” 하는 편견이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말로 하지 않고 실천적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들보다 월등한 영업실적이었다. “봐라! 탈북민인 내가 너희들보다 못하는 게 뭐냐?”고 했다.

10년째 근무라? 쉽지 않았을 텐데.

회사입사 당시 일부 동료들이 두고 봐라. 너는 안 된다!”고 할 때 뭐야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오기가 생겼다. 나는 북한의 2천만주민도 하지 못한, 목숨까지 각오한 탈북에 성공한 사람이다. 내 운명 주인은 나 자신이다.

이를 악물고 시작했다. 자체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오늘 하루 무조건 고객 5명을 찾아간다. 그들에게 30만원 어치의 상품을 팔지 못하면 퇴근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품고 이를 악물고 일을 하였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인가.

입사 1년 만에 신입왕, 개척왕, 판매왕 수상을 했다. 직원 100여 명 중, 1년에 1명씩 뽑는 치열한 경쟁에서 우승하였다. 내가 일하는 직업의 직급은 카운슬러, 팀장, 부장, 마스터로 되어있다. 직원 7~8명을 데리고 있는 마스터가 최고 높은 직급이다. 남들이 10년에도 오르기 힘든 마스터자리에 나는 5년 내에 올랐다. 주변의 동료, 지인들로부터 많은 축하와 격려를 받았는데 정말로 감사하다. 

화장품 방문판매하는 직업인데 영업장으로

찾아오는 고객도 있지만 그들을 찾아다니며

판매하기도 해 사람이 있는 곳 전부 찾아가

미소는 기본한 번 찾아가 안 되면 두 번

세 번을 찾아가서 나의 진정성을 보여 줘

 

고객에게 탈북민이라는 신분을 숨기나.

내가 먼저 말하지는 않지만 누가 물으면 전혀 숨기지 않는다. 애써 숨기려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지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 거기에 드는 시간이나 신경이면 고객 한 명이라도 더 찾아간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그리고 나는 탈북민이라는 신분을 당당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남과 북을 다 살아본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자유통일이 되면 북한으로 당당하게 돌아가 고향 재건에 앞장설 사람들이 바로 우리 탈북민들이라고 본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기적으로 이것 해보고 저것 해보고 또 적성에 안 맞는다하면 정말 정착하기가 쉽지 않다. 무슨 일이든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해라. 내 경우를 보면 내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는 신념으로 죽기 살기로 한 직업에 몰두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주지 동주민센터에서 주는 기초생활수급자 수당에 절대로 연연하지 말라. 거기에 의지하면 인생은 고만큼에서 산다. 나이 드신 분들은 어쩔 수 없으나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그들에게 미래는 정말 어둡다. 대한민국은 자기가 노력하면 충분히 살 맛 나는 세상임을 확신하라. 선배인 내가 체험했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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