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와 대북 패러다임의 대전환[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김대중 정부 전반기 대북정책의 명과 암 ⑭1997년 12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단순한 집권세력의 교체를 넘어, 대북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과거 야당의 지도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이전 정부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선택했다.
남북관계가 닫혀 있으면 안 된다는 소신 북한이 도발 등 어떤 일을 저지르더라도 서로 대화 채널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
노태우 정부가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화해를 모색하면서도 북핵 문제를 병행 관리했다. 김영삼 정부가 '북핵(北核) 불용(不容)'의 안보 우선주의를 펼쳤다면,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의한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다’는 선언 위에서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사항은 김대중 정부 집권 인사가 북핵과 미사일 실험 등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문제는 미국의 관심사이고 미북간 해결할 사항임을 내비친 점이다. 이후의 민주당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일관하게 북핵문제는 북한의 이해에 관한 사항, 더 크게는 미국의 문제라는 시각을 견지했다. 북핵문제가 미국에 원인이 있고 미국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먼저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했고 한반도 긴장을 가져온 위기의 책임은 북한보다 미국에게 있다는 미국책임론이 도사리고 있었다.
김 대통령은 남북관계가 닫혀 있으면 안 된다는 소신대로 북한이 도발 등 어떠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서로 대화 채널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북핵문제 미결(未決) 상태에서도 대북 관계 개선을 선행하겠다는 선언은 한반도 정세의 거대한 전환점을 예고한 서막이었다.
▉ 전략적 연합과 '햇볕정책'의 제도적 설계
이 과감한 노선의 이면에는 철저한 정치적 현실 감각과 치밀한 제도적 설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호남 기반의 소수 대표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충청과 온건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손을 잡는 'DJP 연합'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대북정책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보수적 안보관을 지녔으나 남북대화의 통찰력을 갖춘 군 출신의 임동원 전 차관을 영입한 것이다. 두 사람의 결합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즉 '햇볕정책'의 골격으로 완성되었다.
임동원은 1990년대 중반 남북기본합의서가 제시한 '화해·협력·평화 공존'의 기조를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남북연합 → 남북연방 → 완전통일)과 결합해 햇볕정책의 이론적 기반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취임사에서 선언된 대북 3원칙은 북한의 붕괴를 전제하지 않고 체제 존속을 인정하며 평화공존을 도모하겠다는 역대 정부 최초의 전향적 선언이었다.
▉'정경분리(政經分離)'의 성과와 군사적 충돌이라는 혹독한 시험대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고, 햇볕정책은 내외에서 시련을 마주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핵 문제를 미·북 관계의 틀로 넘기고 '정경분리 원칙'을 확립했다.
북한과의 신뢰구축을 위해 인도적 지원은 계속하되, 북한이 당국간 대화를 거부하는 만큼 우선 민간에서라도 북한과 교류 협력할 수 있도록 정경분리(政經分離)를 표방한 것이다. 그러면서 일방주의가 아닌 상호주의를 내세웠다.
이 중에서 정경분리는 당국간 경색 상황 속에서도 민간 기업들이 북한과 경제적 협력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합의가 잘 안되고 서로 부담이 되는 만큼 민간이 알아서 하도록 일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정부 원칙대로 비료 20만 톤 주는 대신 이산가족 상봉 추석 때까지 하자고 제안
‘인도주의 문제에 상호주의 원칙 적용하는 자체가 비인도적‘...북 회담장 박차고 나가
1998년 3월 베이징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에서 북한은 비료 20만톤 지원을 요청했다. 당국간에 협의할 사항이어서 1998년 4월 11일에 남북차관급회담이 열렸다, 김영삼 정부 정상회담 실무접촉 이후 3년 9개월 만의 당국자간 만남이었다.
우리 정부는 원칙대로 비료 20만 톤을 주는 대신 인도주의 문제인 이산가족 상봉을 추석 때까지 하자고 제안했다. 일종의 상호주의였다. 협상 관점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고 서로에게 실리를 줄 텐데도 북한은 경직되게 “인도주의 문제에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하는 자체가 비인도적”이라며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다.
당국간 대화는 교착되었고, 북한은 새 정부의 진의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있었지만, 자존심이 세어서 그런지 조금만 수틀려도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래서 이 무렵 청와대로부터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북한을 상대할 때의 자세로 적절해 보였다.
1998년 4월말 정경분리에 의한 민간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를 발표한데 이어 5월말에는 닫혀 있던 판문점이 열렸다.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1998년 6월 16일 시가 8억 원이 넘는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건너갔다. 10월 27일에도 소떼를 싣고 가 두 번에 걸쳐 소 1,001마리를 북한에 무상 제공했다.
정 회장은 김정일을 만나 금강산관광 및 개발사업에 합의하고 1998년 10월 31일에 돌아왔다. 합의에 따라 11월 18일부터 동해항에서 금강산관광선이 출항했다. 관광객 한 명당 금강산 투어 값이 300달러였다. 동남아 국가에 관광 가는 비용과 큰 차이가 없을 만큼 비쌌지만, 정부의 지원과 홍보 및 북한을 고향으로 둔 사람 등에 힘입어 많은 이가 금강산을 다녀왔다.
획기적인 성과였으나, 문제는 '정경분리'가 지닌 잠정성과 태생적 취약성이었다.
남북간에 교류협력을 한다고 할 때 당국끼리 큰 틀의 합의와 각종 보장조치, 준수의무 등 세부사항을 정한 뒤 국민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당국끼리는 막혀 있고 민간차원으로 하다 보니 관광 인프라 측면에서 안 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돼 있는 것도 어설픈 게 많았다.
안 보였을 뿐이지 사실은 뒤에 발생하는 우리 국민의 피살 사건도 이때의 부실함에서 연원하는 점이 없지 않다. 남북간 첫 갈등은 금강산관광을 갔던 우리 국민이 1999년 6월 21일 북한에 억류된 사건이었다. 북한은 우리 민간인 관광객을 4일간이나 억류했다. 정부까지 나선 끝에 억류 국민이 4일 만에 풀려났다. 우리 정부는 대책을 세울 때까지 45일간 우리 국민의 금강산관광을 중단시켰다.
그럼에도 정부의 대북 관계개선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민간차원의 교류와 협력, 접촉, 방문이 정부의 허락을 받아 활발하게 진행됐다.
1999년 12월 문화방송이 평양을 방문 통일음악회를 가졌고 12월 23일에는 현대 초청, 북 남녀농구팀 서울서 경기
1999년 12월에 북한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아우 조지 클린턴을 초청해 공연하면서 우리 연예인을 함께 초청했다. 12월 21일에는 문화방송(MBC)이 평양을 방문해 통일음악회를 가졌고 12월 23일에는 현대의 초청으로 북한 남녀 농구팀이 서울에 와서 경기했다.
민간교류협력 활성화 등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는 북한의 군사도발로 찬물이 끼얹어졌다.
금강산으로 관광선이 다니던 1998년 11월 20일 강화도 앞바다에 간첩선이 나타났다. 우리 군은 즉시 출동했으나 잡을 수 없었고, 이 정체불명의 선박이 북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김대중 정부를 곤란하게 만든 사건은 제1차 연평해전이었다.
1999년 6월 15일 서해 북방한계선이 있는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남북 함정 간 군사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들은 포용정책의 당위성을 통째로 흔들었다. 우리 해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국내 보수 진영은 북한의 무력도발 속에서도 대북 지원을 고집하는 정부를 향해 "퍼주기 정책"이라며 맹렬한 비판을 쏟아냈다.
안보와 화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유연성이 국내 정치관점에서는 모순으로 비친 순간이었다.
▉ 시련을 견뎌낸 2년의 축적, 2000년 남북정상회담 토대 되다
결과적으로 1998년부터 1999년까지의 김대중 정부 전반기 대북 포용정책은 한반도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전진과 후퇴의 조정기 같은 시간이었다. 대내외적 환경은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와 중·러의 지지, 일본의 북·일 수교 타진 등 주변국의 협조적 기류가 있었음에도 정작 호의적으로 나와야 할 북한의 무력도발과 불신, 더욱이 국내 남남(南南)갈등의 격화는 정부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그럼에도 서해 해상에서 남북간 무력 충돌이 있었던 직후 김 대통령은 "NLL은 반드시 확보하되, 선제 사격을 하지 말고, 교전이 발생하더라도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던 강온 양면의 평화관리 지침처럼, 정부는 일관되게 대화와 협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시행착오와 비판 속에서도 굳건히 유지된 이 전반기의 2년은, 북한으로 하여금 김대중 정부의 포용 의지가 일시적 전술이 아닌 전략적 진심임을 깨닫게 하는 설득의 시간이었다.
이 견고한 정착과정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듬해 2000년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대반전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련 속에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 외교안보정책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되는지를 잘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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