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출범... 북한과 경수로 공급협정 체결[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 김영삼 정부, 남북정상회담 무산 ⑬ (下)
카터는 김일성과 합의한 것을 들고 와서 우리나라와 미국정부에 전달했다. 카터로 인해 위기가 해소되고 대화가 재개됐다.
▉ 북핵, 미국 전 대통령 카터로 인해 위기해소
미국과 북한은 1994년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제네바에서 2단계 고위급회담을 열었다. 북한은 짧은 시일 안으로 IAEA와 영변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 협의를 하고,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형 원자로 건설을 지원해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미·북간에 제네바회담이 열리던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다. 그렇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조전을 보내면서까지 북한과의 핵 회담에서 결말을 보려고 했다.
미·북 양측은 1994년 8월 5일부터 3단계 고위급회담을 재개해 10월 21일에 미국과 북한 간 제네바 합의, 즉 북한의 핵활동 동결, 핵시설의 단계적 폐기, IAEA의 감시와 사찰 수용 및 미국의 북한 안전보장, 대북제재 해제, 관계정상화를 타결 지었다.
합의 직후 북한은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고 미국인을 포함한 국제사찰단원의 영변 복귀를 허용했다. 이어 미국 전문가 팀과 협력해 5메가와트 원자로에서 사용한 핵 연료봉 8천개를 빼내 냉각조에 넣었고 시설을 봉인한 뒤 국제모니터링을 허용했다.
또 북한 내의 다른 두 개의 원자로 건설을 중단함과 동시에 북한의 모든 핵시설을 IAEA 감시 하에 두었다.
▉ 북핵 동결의 대가... 한국의 경수로 비용 부담
미·북 간 제네바 합의는 북한 핵 동결이라는 성과를 냈지만, 협상 구조에는 한계가 컸다. 협상은 로버트 갈루치와 강석주 중심으로 진행됐고, 우리 정부는 결과를 전달받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 결과 당사자인 한국의 이해관계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특히 우리 정부가 경수로 건설비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도 협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점은 문제로 지적됐다. 이전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처럼 남북이 주도했던 방식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컸다.
합의에 따라 북한은 핵을 동결하고, 한미는 매년 중유 50만 톤 제공과 경수로 건설을 약속했다. 경수로는 한국형 모델로 추진됐으며, 비용은 한국이 약 70%, 일본이 약 20%를 부담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은 ‘동결’만 하는 반면 우리는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여서 형평성 논란이 제기됐다. 또한 동결만으로는 핵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북한에 시간만 벌어준 것 아니냐는 비판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정부는 합의 이행에 나섰다. 1995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출범했고, 북한과 경수로 공급협정이 체결됐다. 경수로 건설지는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지구로 정해지면서 사업이 본격 추진됐다.
▉ 한반도 운명 가를 ‘4자회담’... 3년의 대장정
1990년대 중반, 한반도는 휴전협정 무력화를 시도하는 북한의 공세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였었다. 북한이 정전협정 준수 임무 포기를 선언하고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기존 휴전체제를 무력화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목적은 명확했다.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평화협정을 맺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4월 제주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전격 제의하며 국면 전환을 꾀했다. 김 대통령의 제안이 통해서 남북미중 대표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총 6차례 회담을 했다.
1997년 12월 제네바에서 본회담이 시작된 이후, 4개국은 ‘평화체제 구축’과 ‘긴장 완화’라는 두 갈래 의제를 두고 치열한 기 싸움을 벌였다. 한미의 실질적 신뢰구축과 북한의 미군 철수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중국은 남북관계와 미·북 관계의 동시 개선을 주장하며, 전쟁상태 종식과 불가침 등을 담은 평화협정 초안을 제시하는 등 중재자 역할을 했다.
4자회담은 어쨌든 대화의 물꼬를 텄으나 성과가 없었다. 3차 회담에 가서는 ‘평화체제’와 ‘긴장완화’ 2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북한의 계속되는 비협조로 회담은 공전을 거듭했다. 결국 1999년 8월 제6차 회담을 끝으로 북한이 불참을 선언하면서 4자회담은 실질적인 합의 없이 중단되었다.
회담은 정전협정 당사국들이 한자리에 모여 평화체제 전환을 깊이 있게 논의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그렇지만, 북한의 미성숙한 태도가 걸림돌이었다. 진지했던 한미중과 달리, 북한은 책임 전가용 ‘선전술’과 상투적인 주장을 거듭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의 실질적 진전이라는 과제는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 남북정상회담,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산
남북 간에 유례없는 갈등과 감정적 대립이 있는 가운데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 합의는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관계 대북정책에서 즉각적인 반전효과를 만들어냈다.
남북정상회담은 그 자체로 국내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초대형 이벤트였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김영삼 정부의 외교적 위상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일성과의 회담 준비에 활기찼고, 정부 내부에서도 기대감이 크게 고조됐다.
그러나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82세의 김일성이 무리한 듯했다. 그는 분단 이후 처음 이뤄지게 될 남북정상회담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결국 이 만남을 감내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로써 남북관계 최고의 반전 카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공이었다. 그가 김일성의 뜻을 전했다. 김일성은 카터 전 대통령에게 김영삼 대통령과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으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흔쾌한 반응을 보였다.
김 대통령은 이 역사적인 만남과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했고, 이어 남북 간 실무접촉을 시작했다. 우리측 이홍구 통일부장관과 북측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이 만났다. 남북 정상이 조건 없이 만나서 얘기하는 걸로 합의했다. 그랬기 때문에 실무선에서 별달리 의제를 정하거나 쌍방 간 조정할 필요가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은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연다고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김일성과 논의할 때 우리측 요구 사항으로 ▲이산가족문제의 해결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 간에 신뢰 구축 ▲세 번째로 북한의 핵 개발 및 전쟁 포기 촉구 ▲남북정상 간에 핫라인 설치 등을 의제로 준비했다. 북한에 줄 카드로 대북식량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는 점, 북한의 불안을 감안해 독일식 흡수통일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 김영삼 정부의 노고와 4자회담 성과
김 대통령은 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직전에 무산된 일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이홍구 장관도 매우 아쉽게 생각했다. 이 장관은 두 정상이 회담하고 싶어 했다. 성격도 세세한 사항에 크게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어서 큰 틀에서 여러 합의를 이룰 가능성이 매우 컸다고 말했다.
김일성 사후 우리나라가 비상경계령, 김일성 조문 불가로 시끄러워지자,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아쉬운 결말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외교안보, 정치적·경제적 악재가 연이어 겹치며 남북관계에서 유의미한 업적을 이룩하지 못했다. 또 북핵문제 등 유난히 비상한 상황, 사건이 자주 발생해 대응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제안한 4자회담에서 휴전 당사국간 진지한 논의를 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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