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공직의 중심에 섰던 시기는 평온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냉전 대결이 막을 내리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승리를 선언하던 대전환기였다.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이후의 격렬한 변화와 혼란이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이념과 지역, 세대와 진영이 충돌하던 시대 그는 정치권 밖 학자였지만, 얼마 안 되어 많은 여느 정치인보다 더 안정적이고 균형감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세 정부에서 모두 중용되었다. 정권의 색깔이 달라도 대통령마다 그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은 후대인에게 주는 의미가 작지 않다. 그는 합리적이고 온화했으며, 동시에 아이디어와 개혁성을 갖춘 정책가였다. 감정적 대립보다 현실적 해법을 고민했고, 정파적 유불리보다 국가 운영의 안정성을 먼저 생각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있으며 쉬지 않고 신문논설과 학술발표를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꾸준히 제시했었다.
그의 공직 인생은 1988년 노태우정부의 국토통일원 장관 임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내 중요한 업적 하나를 남겼다. 바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다. 이전의 통일방안 논의와 달리 처음으로 북한의 의견까지 고려해 실현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 결과 이 구상은 지금까지도 정부 공식 통일방안의 토대가 되고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위상이 높아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에 재차 임명되었고, 김영삼–김일성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와 회담준비라는 역사적 순간에도 깊이 관여했다. 비록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회담은 무산되었지만, 만약 성사되었다면 그는 남북관계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후 제28대 국무총리에 올라 신중하면서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보여주었다. 눈에 띄게 과장된 정치인이 아님에도 그는 국제사회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인물이었다.
야당으로의 정권교체 이후에도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어 IMF 외환위기 속에서 국제 신인도 회복과 한미관계 안정에 기여했다. 이처럼 그는 여야와 이념을 넘어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드문 원로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안타깝지만, 다시 극단적 대립과 진영 간 갈등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배척하고, 타협보다 대립과 대결을 앞세우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그렇기에 이홍구 전 총리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우리는 이제 이홍구 전 총리를 단지 한 명의 전직 총리가 아니라, 혼란의 어두운 시대 속에서 불을 밝혀준 큰 어른으로 기억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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