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진영 간 연결고리...좌우와 세대 아우른 ‘통일 설계사’[기획] 57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⑬
|
![]() 이홍구 통일원 장관 |
탑 다운에 의한 위로부터의 결단과 민심, 아래로부터의 의견 수렴을 조화시킨 그의 행보는 오늘날까지도 통일부 안팎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관의 귀감으로 남아 있다.
▉ ‘7·7 선언’과 대북정책의 패러다임 전환
휴전선확성기중단, KBS사회교육방송
대북 비난 중단을 선제적으로 결정
남북유엔 동시가입이 결실로 이어져
취임 첫해인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7·7 선언’을 발표했다. 이 장관이 실질적으로 뒷받침한 이 선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분단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정부 시절부터 축적된 대북 전향적인 제의와 노력들을 집대성한 결과물이었다. 여기에 소련의 개혁·개방과 88 서울올림픽이라는 국제적 훈풍에 의한 북방정책의 토양이 되었다.
이 장관은 행동으로 먼저 진정성을 보였다. 이는 이미 취임초기부터 대북 비난 중단 의사를 밝혀온 이 장관의 소신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어 외교부의 등 파격적인 조치가 잇따랐다. 북한은 초기엔 냉담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수교하며 포위망을 넓혀가자, 결국 남북대화의 장으로 나왔다. 이는 훗날 남북유엔 동시가입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국민의견 경청
보수적 가치에 함몰되지 않았으며
여야와 좌우를 막론하고 호평 받아
현재까지 정부공식통일방안으로 자리
1989년 9월 11일 발표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이 장관 리더십의 결정체였다.
이는 북한의 ‘고려민주연방제’에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민족의 미래를 내다본 창의적 대안이었다. 무엇보다 돋보였던 점은 ‘개방적 수렴’이었다.
이 장관은 기존 정권들이 국민의견을 도외시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언론인, 학자, 재야인사들과 끝장 토론을 벌이며 통일문제를 공론화했다.
그는 보수적 가치에 함몰되지 않았다. 진보적 의견이라도 현실성이 있다면 적극 수용했다. 대표적으로, 기존의 ‘인구비례에 의한 대표 선출’ 원칙 대신 북측이 주장해온 ‘1대1 동등대표성’ 원칙을 과도기적 단계(남북연합)에서 수용하겠다는 파격적인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유연함 덕분에 이 방안은 여야와 좌우를 막론하고 호평을 받았다. 정권이 바뀐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통일방안으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 영원한 통일의 스승으로 기억
남북교류협력법, 남북협력기금법,
민족통일연구원법 등 ‘통일 3법’
제정... 남북교류 법적토대 마련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통일수요를 뒷받침하고자 이 장관이 지휘하는 통일원은 가장 바쁜 부처가 되었다. 정부 입법을 하는 과정에서 통일부가 다른 부처를 조정, 통합하고 실무적인 조치와 법조문 축조심의 등 후속조치에 소홀하지 않았다.
남북교류협력법, 남북협력기금법, 민족통일연구원법 등 이른바 ‘통일 3법’을 제정하여 남북 교류의 법적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광화문에 ‘북한자료센터’를 개관해 금기시되던 북한 정보를 대중에게 공개하며 통일 논의의 대중화, 민주화를 이끌었다.
이홍구 장관은 과거의 통일논의를 계승하면서도 국민 모두가 동의하는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낸 전략가였다. 7·7선언의 물꼬를 터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징검다리를 놓은 그의 공로는 진영을 넘어 인정받고 있다.
정책적 혜안과 소통의 미덕을 겸비했던 그는, 오늘도 통일부 후배들에게 ‘가장 닮고 싶은 장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인물 약력]
경기고, 서울대 법과대학 행정학과 중퇴
영국대사, 국무총리, 신한국당 대표, 주미대사 역임
저서로‘정치학개론’, ‘마르크시즘 1백년’ 등
부드럽고 원만한 성격에 설득력 있는 화술을 갖췄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무2장관 시절 수석대표를 맡기로 예정했던 1982년 남북한 고위대표회담 제안 당시 정부, 각 정당, 학계 인물의 대표로 선정된 것이 인연이 되어 통일부장관으로 발탁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