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주민들에게 보내는 자유의 소리 계속 들려 줄 것”[인터뷰] 탈북민들이 운영하는 ‘자유북한방송’ 이시영 대표올해 들어 김정은의 국정활동은 군사국방 분야에 더욱 도드라지고 있다. 13살 딸을 데리고 저격수총사격장, 권총사격장 등에 나타나 총을 쏘고 군부대훈련장 탱크에까지 올라탔다. 수많은 인민들이 80년째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며 인권과 자유가 말살되었다. 3대로 이어지는 김 씨 수령의 독재정치의 결과물이다. 고향의 인민들에게 세상의 정의와 진실을 꾸준히 알리는 탈북민들이 있다. 탈북민들이 운영하는 ‘자유북한방송’ 이시영 대표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 자유북한방송을 소개해 달라. 지난 2025년 9월 12일에 별세한 고(故)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이사장이 2004년 4월에 설립한 탈북민들이 주축이 된 최초의 민간대북방송이다. 올해로 창립 22주년을 맞는 자유북한방송의 사명은 첫째도 둘째도 북한의 수령 독재정권 아래 사는 2천만 인민에게 대한민국의 풍요로움과 자유민주주의 정의와 진실 등을 전파하는 것이다. 직원은 나를 포함하여 5명이고 4명은 탈북민이다.
- 설립 자본은 어떻게 준비했나. 통일애국의 마음으로 여러 탈북민들의 십시일반 후원금으로 시작했다. 현재는 미국의 디펜스포럼재단(대표 수잔 솔티) 후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매일 2시간 북한으로 보내는 방송을 하며 홈페이지에 5~10개 뉴스를 올린다. 2008년 ‘국경 없는 기자회 매체상’, 2009년 ‘대만민주화기금 아시아민주인권상’을 수상했다.
통일애국 마음으로 탈북민들 십시일반 후원금으로 시작...‘수잔 솔티’가 대표인 미국의 디펜스포럼재단 후원으로 운영
탈북민들이 제작해 내보내는 대북방송 남북 두 사회를 살아본 유일한 존재로 보고 느끼고 체험한 대로 전하고 있어
-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은. 탈북민들이 제작해 내보내는 대북방송이다. 우리는 남북의 두 사회를 살아본 유일한 존재들로 더도 덜도 말고 남북을 보고 느끼고 체험한 그대로 이야기한다. 방송은 매일 밤 10시부터 11시까지 단파 11510kHz와 새벽 5시부터 6시까지 단파 7610kHz로 들을 수 있다. 인터넷(네이버) 검색 창에 ‘자유북한방송’(www.fnkradio.com)을 치면 홈페이지에 들어 올수 있다. 중국 등 해외에서 많이 접속한다.
- 여러 북한인권 행사도 하였던데. 대표적으로 지난 2004년부터 미국의 디펜스포럼재단 대표인 수잔 솔티 여사와 함께 20여년 꾸준히 개최해온 ‘북한자유주간’이다. 이 행사는 20여회 째 해마다 서울과 워싱턴을 번갈아 오가며 진행하는 다수 탈북민 참여 국제인권행사이다. 북한의 각종 수용소 실태를 고발하고 탈북민들이 북에서 받은 인권유린을 폭로한다.
- 요즘 정부의 대북정책을 어떻게 보나. 대통령이 “요즘 세상 인터넷 뒤지면 다 나오는데 대북방송을 왜 하냐?” 하고 통일부장관이 “반북대결의 상징인 ‘북한인권센터’ 사업을 백지화 했다” 정말 기가 막히다. 북한에 무슨 인터넷이 되는가 말이다. 북한인권센터가 반북대결이라는데 대통령과 장관의 생각에는 북한은 김정은만 사는 세상인가? 북한의 주인은 독재자가 아닌 2천만 우리 동포이다. 그들을 애써 외면하는 한국정치인들이 문제다.
남동생은 군대 나가 2년 만에 상관의 구타로 사망...2006년 아버지가 별세 어머니와 2012년 혜산서 압록강 건너
국방부 안보 강사로 군부대 강연 다녀 동대문시장 의류회사서 한동안 영업일도
-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82년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양강도 세관 도강소장(보위부 소속, 과거 러시아건설사업소 보위지도원 했음), 모친은 혜산철도국 총무과에서 세포비서로 근무했다. 2004년 김일성종합대학 컴퓨터단과대학(옛 자동화학부)을 졸업했다. 이후 양강도인민위원회 당생활지도부에 배치 받아 4년간 근무하였다.
- 간부들의 부정비리가 많은가. 식량과 생활용품 등 물질이 너무 부족한 북한 사회서는 부정비리가 없거나 적을 수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정상적인 국가의 배급이 실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간부들이 사실 ‘비사회주의’의 표본이다. ‘지도일군’이라는 이름하에 자기들에게 차려진 공적인 특권을 이용하여 인민들로부터 뇌물을 노골적으로 받는다. 간부들에게 밉보이면 없는 죄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는 황당한 사회가 바로 북한이다.
- 북한을 떠난 이유는 뭔가. 하나뿐인 남동생은 군대 나가 2년 만에 상관의 구타로 사망했고 2006년 12월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모친은 여러 문제로 보안성에서 감시대상이 되었다. 북한주민들은 상호감시 속에 살며 나중에는 보안성 수배영장까지 발부되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 탈북을 하자고 어머니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어머니와 나는 2012년 11월 혜산 부근의 압록강을 건넜다. 우연히 사촌여동생도 동행했다. 중국의 백산이라는 지역에서 은신했고 공안의 삼엄한 단속을 피했다. 그러던 중 한국으로 먼저 간 탈북민과 연계가 되어 어머니와 사촌동생이 2개월 후, 나는 3개월 후에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서울로 왔다. 2013년 4월이었고 7월 사회로 나왔다. 정말이지 북한에서의 생활을 생각도 하기 싫은 악몽 같은 것이었다.
- 남한에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시작했나. 국방부 안보전문 강사로 군부대 및 기관으로 강연을 다녔다. 한편 서울동대문시장 부근 모 의류회사에서 한동안 영업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과거 고향삼촌(최정훈 자유북한방송 사무국장)의 소개로 자유북한방송국을 알고 방문했다. 그때 처음으로 김성민 이사장을 만났고 지금에 이르렀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지난 22년 수령 독재자의 사나운 구둣발에 짓눌린 2천만 북한주민을 보고 묵묵히 걸어온 자유북한방송이다. 3만 4천 탈북민은 이 땅에 와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정든 고향에 두고 온 부모가족형제와 인민들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그들도 목숨만큼 소중한 자유와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 자유북한방송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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