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기본합의서 채택...변화있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노태우 정부의 ‘평화공존’선언 ⑩ 중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6/03/20 [17:14]

남북기본합의서 채택...변화있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노태우 정부의 ‘평화공존’선언 ⑩ 중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6/03/20 [17:14]

88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

 북한은 처음 서울 올림픽 남북공동개최를

주장하며 참가 의사가 있는 듯한 태도 보여

그러나 이는 외형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1988917일부터 102일까지 16일 동안 서울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을 개최했다역대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160개국이 참가했다. 공산권 국가들은 북한과 쿠바, 이디오피아, 알바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수단을 보냈다. 두 번의 반쪽 올림픽을 치른 끝에 모처럼 동서진영 나라들이 서울에서 화합과 전진을 합창했다.

 

북한의 일방적인 선전에 한국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서울올림픽에 온 뒤로 인식이 확 바뀌었다. 북한은 독재국가에다 못 살고 비전이 없었지만, 대한민국은 엄청나게 부유하고 발전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제한된 일부만이 아니라 소련과 동유럽 나라 국민 전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됐다.

 

  노태우 대통령

 

 북한은 처음 서울 올림픽의 남북 공동개최를 주장하며 참가 의사가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는 외형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북한의 관심사는 참가가 아니라 서울 올림픽 자체를 저지하고, 흠집을 내는 데 있었으며, 실제 참가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귀순한 북한 외교관에 의하면, 김일성은 한국이 올림픽을 준비하는 동안 김영남 등 고위인사들을 아프리카의 친북 나라들과 불가리아, 소련에 보내 서울올림픽 불참을 설득하는 순방외교를 벌였다. 북한이 요구하는 남북 공동 개최가 안 되면 서울에 가지 않기를 바란다든지, 김일성의 부탁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이러한 서울올림픽 불참 외교는 성공할 수 없었다. 당시 아프리카 나라들은 여러 나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어 북한 편만 들 수 없었다. 서방 선진국들로부터 지원받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올림픽 불참 선언을 한다는 것은 그들 나라의 국익에 부합할 리가 없었다.

 

 아프리카 대다수 나라들이 김영남 등 북한 외교사절을 회피하자, 그들은 약소국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이미 문호를 열고 대한민국에 접근하는 시기라 어느 나라도 북한을 위해 올림픽에 불참할 리는 없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남북한은 통일을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에

따라 하고, 통일 미래상으로는 삶의 질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위해 자유, 인권, 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국가여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노 대통령은 7.7선언을 발표한지 일 년이 지난 1989911일 국회 특별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이 방안은 남북한이 서로 대화를 하면서 점점 더 서로를 신뢰하는 가운데 남북한의 최고 정상이 만나 민족공동체헌장을 채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남북정상이 마련한 상기 헌장에 통일로 가기 전의 잠정적 남북관계를 규정한 뒤 남북한 전 동포에게 발표한다.

 

잠정적 남북관계는 남북 양 정부를 연결시켜 느슨하지만 하나의 연합형태를 띄게 한다. 남북연합을 구성한다. 이 연합에는 연합 나름의 정부와 의회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과도적으로 남북정상회의와 남북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각료회의, 평의회, 공동사무처를 구성, 운영한다. 동시에 남북한 주민은 연합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접촉, 교류하다보면 동질성을 찾아나가고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만들어나갈 것을 기대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국회성격의 남북평의회에서 의원들이 민주적인 방법과 절차로 통일헌법을 만들고 이 헌법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해 남북한 각각의 정부와 국회를 대신한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은 여하한 경우에도 통일을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에 따라 하고, 비평화적 방법이나 비민주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며, 통일 미래상으로는 삶의 질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위해 자유, 인권, 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국가여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탄생

이 합의는 남북관계의 기준틀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냉전의 해체,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붕괴와 체제전환은 북한에게 위기였다. 북한은 이 위기로부터 돌파구를 찾으려고 대남관계에서 변화된 태도를 보였다. 그것이 북한의 고위급 대화 제의였다. 우리나라는 7.7선언 이후 문호를 열어놓은 상황이어서 회담에 바로 응했다.

 

 19892월부터 다음 해 7월까지 준비접촉을 가진 결과 양측은 서울과 평양에서 회담을 번갈아 열기로 합의했다. 회담 의제는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의 해소와 다각적인 교류협력 실시문제였다회담 대표단은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고 장차관급을 대표로 하는 7명씩으로 구성했다. 우리측은 모처럼 만들어진 기회에 전문가를 투입, 진지한 태도로 동서독의 기본조약 같은 남북간의 헌장이자 기본합의문을 도출하려고 했다.

 

199094일부터 19919월까지 1년 동안 4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 때까지는 별다른 합의를 하지 못했다. 이 기간에 우리나라는 소련과 수교, 한중간 무역대표부 설치가 있었고 유럽에서는 동서독이 통일됐다.

 

합의는 내용적으로 훌륭하고 당시 협상에

참여한 공직자들 모두 칭찬받을 만하지만

이후 남북 사이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북한이 이행하지 않았다

 

급변하는 정세가 김일성을 움직였다. 갑자기 북한 회담대표들이 순해지면서 합의에 진척이 있기 시작했다. 이후 남북 간에는 동서독의 기본조약과 비슷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등 변화 있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 시기 주목할 점은 평양에 간 강영훈 총리가 북한 대표들 앞에서 6.25전쟁 도발로 이어진 공산당의 규약, 남조선혁명 노선의 포기를 요구한 점이었다. 북측 대표들은 자기들 심장부에서 대남혁명노선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고 전부 일어나 항의하고 고함치는 등 소동을 부렸지만, 그것이 냉엄한 현실이었다.

 

그러다가 김일성이 중국을 다녀온 199110월초에 다시 만난 양측은 제4차 기본합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내용적으로 상당한 의견접근을 이루었다합의문 이름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로 세부 내용은 서문, 남북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수정 및 발효 조항 순으로 구성했다. 19911213일 제5차 회담에서 남북 회담 대표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서명했다.

 

1992219일 우리 정부와 북한은 서로 인준한 문본을 교환했고 최종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기본합의서’)가 발효됐다. 양측은 후속 분과위 운영에도 서명했다.

 

 이 합의는 내용적으로 훌륭하고 당시 협상에 참여한 공직자들 모두 칭찬받을 만하지만, 이후 남북사이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북한이 이행하지 않았다. 북한은 늘 그랬다. 합의나 약속을 자신들의 목적 달성에 필요하면 해주지만, 이러한 약속이나 신뢰에 구속되지는 않았다. 즉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는 남북관계의 기준틀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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