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거나 놀랄 때 “와!”감탄사가 “와우!”로 바뀌었다이재봉의 시선 /외래어 남용과 오용 ②나는 웬만하면 운전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한적한 시골길에 세워진 ‘BUS STOP’이란 간판을 보면 씁쓸해진다. 기차 중에선 정겨운 통일호가 사라져 버렸고, 무궁화호는 많이 줄었다. 새마을호는 앞에 무슨 뜻인지 모를 ‘ITX’를 달고, 고속열차인 ‘KTX’와 ‘SRT’가 대세다. 강연. 토론장에 도착하면 ‘컨벤션 센터’나 ‘컨퍼런스홀’ 또는 ‘오디토리움’에서 ‘세미나’나 ‘포럼’이라는 ‘타이틀’로 몇 개 ‘세션’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소위 학자. 교수들이 ‘세션(session)’을 ‘섹션(section)’으로 표기하는 무식한 경우도 드물지 않다. ‘분과’라고 쓰면 될 걸 유식한 체하다 무식을 드러내는 꼴이다. 토론자를 ‘패널’로 부르고, 토론을 ‘디스커션’으로, 질의, 응답을 ‘큐앤에이’라 말하는 걸 들으면 역겹다. 대담은 ‘토크쇼’가 되었다. 나도 책 몇 권내면서 책장사 좀 해보려고 출판기념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요즘은 거의 모두 ‘북콘서트’를 여는 모양이다.
TV를 많이 보지 않지만, 하루 20-30분씩 ‘KBS’나 ‘SBS’ 또는 ‘YTN’이나 ‘MBN’ 등의 ‘뉴스센터’나 ‘뉴스쇼’ 보다 ‘MBC 뉴스데스크’나 ‘JTBC 뉴스룸’에서 ‘앵커’와 ‘어나운서’ 그리고 ‘리포터’와 ‘프리랜서 기상캐스터’가 전하는 소식은 챙겨보는 편이다. 탁구나 테니스 등 내가 직접 운동경기를 즐기는 대신 축구나 야구 등 ‘스포츠게임’ 중계방송은 거의 보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가사도 이해하지 못하며 ‘팝송’을 많이 듣고 따라 불렀는데, 대학부터는 ‘폼’잡고 ‘클래식’을 즐기기도 했다. 1980년대 말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끔 김세레나의 민요를 듣느라 ‘저질’이란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유학생들은 항상 고상하게 ‘클래식’이나 ‘세미 클래식’만 들었는지 모르지만, 난 예나 지금이나 상황에 따라 서양 고전음악에도 취하고 우리의 전통 판소리에도 빠져보는데 말이다. 지난날엔 이미자, 문주란, 심수봉, 남진, 나훈아, 조용필 등 가수 이름을 외우기 쉬웠다. 요즘엔 젊은 ‘뮤지션’이나 ‘아티스트’들이 ‘싱글’이든 ‘그룹’이든 외래어 이름을 갖고 있어 외우기조차 어렵다. ‘싱어송라이터’가 자주 나오기에 뭔가 찾아보니 가수(싱어) 겸 작사. 작곡가(송라이터)를 가리키는 말이란다. 미국에서 10여년 공부하며 살다 온 나도 따라가기 벅차다.
외래어의 범람과 함께 우리 말투도 변한다. 앞에서 말했듯, “잘 잤느냐?”나 “잘 먹었느냐?” 등의 아침 인사말은 “좋은 아침!”으로 바뀌고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말투도 영어식이다. 외래어 특히 영어의 영향이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무슨 행사에서 사회자가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좋을 텐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거나 자기를 “김00입니다” 대신 “김00이라고 합니다”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이상하다. 심지어 기쁘거나 놀랄 때 나오는 “와!”라는 감탄사조차 “와우(wow)!”로 바뀌었다.
아플 때 나오는 소리 “아야!”도 머지않아 “아우취(ouch)!”로 바뀔지 모르겠다. 1970년대 초 고등학생 때 읽었던 신문 기사가 떠오른다. 경찰이 남자들 긴 머리(장발)와 여자들 짧은 치마(미니 스커트)를 단속하며 공공장소에서 포옹이나 ‘키스’ 등 애정행위를 ‘풍기문란 죄’로 처벌하던 때 얘기다.
젊은 남녀가 어스름한 저녁 공원에서 ‘키스’하다 경찰에게 걸렸단다.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하며 파출소로 데려가려고 하자 남녀가 영어로 말하며 응하지 않더란다. 이들이 처벌을 피하려고 한국인이면서 외국인 흉내를 내는 거라고 생각한 경찰이 꾀를 썼단다. 갑자기 남자를 세게 쳤더니 “아우취!” 대신 “아야!”라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처벌했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우리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감탄사조차 영어단어로 바뀌고 있으니 외래어의 범람에 우리말이 얼마나 변질될 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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