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간 긴장완화와 공존체제 구축이 목표... ‘북방외교’ 추진 공약[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노태우 정부의 ‘평화공존’선언 ⑩ 상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태우는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내걸었다. 군사정권의 연장이냐, 민주화의 안착이냐를 가르는 갈림길에서 그는 민주화의 완성과 함께 남북관계의 전환을 약속했다.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은 단순한 통일구호가 아니라, 냉전질서 속에서 변화를 꾀하는, 즉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 ‘평화공존’을 먼저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소련 포함 동유럽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전면 참가 목표로 외교력 집중...대한민국이 안전한 개최국임을 사회주의권 국가에 신호 보내
노태우 대통령은 평화통일에 앞서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공존체제 구축을 목표로 삼았고, 대외적으로는 공산권을 포함한 전방위 외교, 이른바했다. 이는 한미일에 묶여 있던 기존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소련·동유럽·중국까지 시야에 넣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국제정세의 호기를 맞이한 노태우 정부는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전면 참가를 목표로 외교력을 집중했다. 대한민국이 안전한 개최국임을 강조하며 사회주의권 국가에게 우호적인 신호를 보냈다. 이는 기존의 반공일변도 외교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행보였다.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 위한 특별선언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즉 ‘7.7선언’을 발표했다. 북방정책으로 알려진 이 선언은 남북 간은 물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지를 표방하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개혁 개방 등 국제정세의 변화, 우리나라의 88 서울올림픽 개최에 따른 전 세계 모든 나라와의 우호친선 필요성 등이 배경이 됐다. 6개 항의 조치는 ▲남북한 각계각층 인사교류의 적극추진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를 위한 문호개방 ▲이산가족들의 생사, 주소확인, 서신거래, 상호방문을 적극 추진 ▲남북한 교역 문호개방, 남북한 교역을 민족내부 교역으로 간주 ▲우방국과 북한과의 비군사적 물자교역 반대 ▲대결외교 지양 및 국제사회에서의 남북한 자유접촉과 협력 ▲북한이 우방국과의 관계개선을 하는데 협조, 대한민국은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관계개선 추구이다.
후속조치로 외교부는 해외거주 동포들에게 모국방문을 완전히 개방하고, 국방부는 7월 19일 0시를 기해 전방지역에서 대북방송을 전면 중단했다.
7.7선언이 신호탄... 북한과의 교섭 시작 북한이 우리측 제의 받아들여...정부가 사회주의권 나라들을 공략하자 북한이 현실 깨닫는 데는 긴 시간 걸리지 않아
미국 정부는 이 선언 후인 1988년 10월 말부터 북한과 참사관급 비공개접촉을 시작해 1993년 5월까지 성과는 없었지만, 34차례나 회담했다. 1992년 1월에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북간 고위급대화가 열렸다. 북한에게는 기회였지만, 미국과의 관계에서 전환을 이뤄내지 못했다. 북한은 미국에 미북관계 정상화를 요구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미비난 중지, 테러지원 중지, 미군유해 송환, 남북대화, IAEA 핵안전조치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일본은 이 7.7선언을 신호탄으로 북한과의 교섭을 시작했다. 일본정부는 억류중인 자국 선원 석방 교섭을 시작하고 정치권에서는 자민당을 중심으로 북일수교 교섭을 시도했다. 북한은 처음 이 7.7선언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김일성은 7.7선언을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서로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하는데도 북한이 당당하게 하지 못 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잠시 그랬지만, 북한은 이내 우리측 제의를 받아들였다. 우리 정부가 북한이 안방이라고 생각해온 사회주의권 나라들을 공략하자 북한은 고립되기 시작했다. 북한이 이런 현실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한은 곧 남북대화에 응해 나왔고 서둘러 우리나라와 더불어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이 7.7선언은 명실상부 남북관계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다.
1989년 통일부는 7.7선언의 후속조치로 중요한 근거 3법인 남북교류협력에 관한법률, 남북협력기금법, 민족통일연구원법을 만들었다.
전향적 대북정책에 편승한 임수경 등 밀입북
노 대통령은 1988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서 북한에 정상간 회담을 제의했다. 이어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는 등 물밑으로 교섭을 계속했다.
1988년 12월에 북한측의 제의로 체육회담을 열어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에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출전하는데 의견을 모으고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때 정한 단일팀의 이름은 코리아(KOREA), 단기는 한반도를 그린 우리나라 지도, 단가는 1920년대 아리랑으로 했고 이것이 기준이 되어 이후부터 남북 공동행사시 유효하게 사용했다.
가톨릭 신부의 밀입북 사건도 생겨 1989년에는 정부의 남북한 인사교류 자유접촉과 협력방침에 따라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방북해 금강산 개발 합의
2년 후인 1990년 9월에 중국 베이징에서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렸으나, 남북 단일팀으로의 출전은 성사되지 못했다. 북측은 무조건 단일팀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합의가 안 되면 전부 출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배수진으로 나왔다. 우리측은 여하한 경우든 고생한 선수들이 대회에 못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했다. 단일팀이 안 된다고 해서 오랜 기간 기량을 갈고 닦은 선수들을 경기에 나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단일팀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북한 김일성은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하는 한편, 야권의 개별인사를 초청하면서 신변안전과 모든 편의 제공을 약속했다. 그러자 야권 인사들과 학생들 가운데 적잖이 밀입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89년 3월에 문익환이 평양을 방문했고, 6월 29일에는 대학생 임수경이 몰래 학생단체 대표 자격으로 방북하고 또 정부의 허락 없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재야에서 활동하는 가톨릭 신부의 밀입북 사건도 생겨났다. 1989년에는 정부의 남북한 인사교류 및 자유접촉과 협력방침에 따라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방북해 금강산 개발에 합의하고 왔다.
1990년 7월 20일 노 대통령은 북한에 민족대교류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을 민족대교류의 기간으로 선포하고 이 기간 동안 남북한 동포들이 판문점을 통해 제한 없이 자유왕래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우리측은 북한의 참여를 유도하고자 많은 편의 제공 의사를 피력했다.
북한 주민이 남쪽을 방문할 경우 일체의 신변안전과 무사귀환을 보장하며 체류기간 모든 편의를 제공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숙식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북한도 우리처럼 전 지역을 개방하는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도록 촉구했다. 북한이 불가피하게 상호교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우선 북한동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전면 개방을 일방적으로 실천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북한은 평소 전민족회의니 남북사회단체 연석회의니 당국을 배제한 군중집회를 열자고 해왔지만, 이때의 민족교류 제의는 거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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