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김규식에 대해 “성공과 실패가 분명치 않은 길을 걸어간 사람인 데다 정치적 추종자를 거느리지 않은 외로운 존재였고, 납북되어 사망함으로써 정치적 유산을 남기지 못했다. 좌우합작, 남북협상이라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중도파의 노선은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국현대사에 주목해 독립운동기의 본문보다 광복 후의 후반부를 주로 소개하면 저자는 김규식을 제국의 틈새, 이념의 경계, 강대국 정치의 회색지대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은 국제적 인물로 조명한다.
김규식은 1881년생, 청풍 김씨로 선대는 중인 가문이었다. 아버지 김용원(김지성)은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귀국 후 한국 최초의 사진관인 촬영국을 열었으며 순화국 설립에도 관여했다. 1883년에는 러시아 밀사로 파견되어 제1차 조러밀약을 체결하지만, 청과 일본의 압력 속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유배됐다.
이 사건은 김규식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아버지의 몰락 이후 친족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살아남는다. 그는 김규식을 양자로 삼는다. 이 시기의 경험은 김규식을 조선 지식인 중 드물게 영어로 사고하는 인물로 만들었다.
의화군(훗날 의친왕)의 통역 겸 시종으로 일본에 갔다가,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1897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규식은 1903년까지 로녹대학에서 수학한다. 이 시기 그는 단순한 유학생이 아니라, 의화군을 동반해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미국식 세계관과 시민의식을 체득한다.
책은 이 시점을 김규식을 “미국화된 세계시민”으로 규정하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본다. 1913년, 그는 총독부에서 여권을 발급받아 ‘인삼 무역’한다는 핑계로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후 몽골, 장가계를 오가며 독립운동과 교육자 생활을 병행한다.
영어를 잘 구사하고 미국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것은 그의 생계 수단이자 자산이었다. 영어 교사로서의 안정된 지위는 김규식을 장기적 독립운동가로 존속하게 만든 현실적 기반이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은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와 비망록을 배포한다. 미국으로 돌아가 뇌종양 진단을 받고 당시로서는 어려운 수술을 받고 살아난 것은 다행이지만, 이후로 병약함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1920년대 김규식은 더욱 복합적인 인물로 변모한다.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는데, 이 시기 그는 임시정부 중심 노선에 비판적이었고, 국제 질서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음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 이후 김규식은 다시 임시정부 요직을 맡지만, 민족혁명당의 좌경화와 내부 분열 속에서 결국 거리를 둔다. 1935년부터 1942년까지 사천대학 영문과 교수로 지냈다.
가장 밀도 높은 부분은 역시 해방 이후 1946~1947년이다. 미군정은 이승만 중심 세력이 흔들리자, 대안적 우익 지도자로 김규식을 주목한다. 중도우파 김규식과 중도좌파 여운형의 좌우합작은 미군정의 중도파 육성 정책과 맞물려 추진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이상과 현실의 충돌로 가득했다.
버치 저택에서 역사적인 좌우합작 회담이 열리지만, 입법의원 선거는 반탁·반공 세력이 장악했고, 좌우합작은 점차 고립됐다. 여운형의 암살 이후 좌우합작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미소공동위 결렬과 한국문제 유엔 이관 이후, 미군정의 관심은 사라졌고 김규식은 고립된다. 연석회의 참석 이후 정치에서 물러나 있던 중 1950년 6·25전쟁 시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되어, 그해 12월 만포진에서 생을 마감했다.
돌베개 2025년 8월 15일 발간. 5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