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쌍방 민간경제계 대표 참여하는 경제협력추진협의기구 구성 ‘제의’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박정희 정부의 70년대 정책‘후기’⑧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5/12/22 [20:25]

남북쌍방 민간경제계 대표 참여하는 경제협력추진협의기구 구성 ‘제의’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박정희 정부의 70년대 정책‘후기’⑧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5/12/22 [20:25]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 단행 배경을 살펴보면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주한미군을 일부 철수시키면서, 한국을 수호해야 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안보위기, 체제위기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것이 유신의 배경이었다.

 

닉슨 정부, 해외주둔 미군 병력의 축소 공표

박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닉슨 독트린에 따른

국군현대화·국군재배치 계획 일환으로155마일

휴전선 국군이 전담...미군 판문점 주변만 담당

 

그 경위를 보면, 19702월 닉슨 행정부는 해외 주둔 미군 병력의 축소를 공표했다. 이어 6월에 한국 주둔 미군의 감축계획을 발표했다. 한 달이 안 되어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에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1971년 상반기에 철수한다고 알려왔다. 물론 사전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관계가 아주 좋지 않았다.

197078일 박 대통령은 긴급 관계 장관회의를 열어 미국정부가 주한미군 일부 병력을 철수하는 것은 자유우방국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규정했다. 국회도 미군감축을 반대하면서 한국군 장비현대화와 군수산업 육성지원을 선행시켜달라는 대미 메시지를 선택했다.

주한미군 64천 명 중 2만 명이 감축 대상이었다. 197126일에 한국과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 18천 명 감축과 한국군 현대화 계획에 공식적으로 합의했다.

박 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닉슨 독트린에 따른 국군현대화 및 국군 재배치 계획의 일환으로 155마일 휴전선은 국군이 전담키로 하고 미군은 판문점 주변만 담당한다

비장한 결정이어서 남북 간 충돌 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19713월에 주한미군 제7사단 2만 명이 철수했다. 전체 주한미군 7만여명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더욱이 19711025일에 공산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가입하고 자유중국(타이완) 대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됐다. 유엔에서 중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됨으로써 유엔 내 공산권 국가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공산국가에 넘어간 것은 엄청난 변화였으므로 박 대통령은 위기를 느끼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때의 박 대통령이 발표한 특별담화문은 심각했다.

우리의 안보상에는 중대한 시련을 예측해야 할 것이다.” “미국도 우리가 언제까지나 안보를 종전과 같이 의지하거나 부탁하기에는 어려운 실정이라고 하면서 한국사회의 상황을 “6.25사변의 전야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다른 목적도 있었겠지만, 197210월 유신을 단행하고 제4공화국으로 넘어갔다.

 

남북대화가 북한의 비핵심적인 주장으로

정체 상태에 빠지자, 1973623

7개 항의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발표

 

유신체제가 출발하는 해인 1973,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대화가 북한의 비핵심적인 주장으로 정체 상태에 빠지자, 19736237개 항으로 된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발표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 과업으로 이를 성취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며, 남북한은 서로 내정 간섭하지 않고 침략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7.4성명에 입각한 남북대화의 성과를 위하여 성실과 인내로써 계속 노력한다 긴장완화와 국제협조에 도움된다면, 남북한이 같이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함께 유엔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유엔가입전이라도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남북한 대표가 같이 초청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며 한국과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도 한국에 문호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 한국의 대외정책은 평화선린에 그 기본을 두고 있으며 우방국들과의 기존 유대관계는 이를 더욱 공고히 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박대통령의 6.23선언이 두 개의 한국을 획책하며 민족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같은 날 조국통일 5대강령을 발표했고, 828일 남북대화를 중단한다는 김영주의 성명을 발표했다.

북측 강령의 요지는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와 긴장상태의 완화,②남북 간의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의 실현, 남북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 소집, 고려연방공화국을 국호로 하는 남북연방제(고려연방제)의 실시,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 등이었다.

북한의 대화 중단 선언과 10월부터 북한 경비정들의 서해 NLL 다수 침범 사건으로 새로운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1974년 박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남북한 불가침협정을 제의했다. 북한이 19733월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에서 제기한 5개항의 군사 제안의 하나인 평화협정 체결 주장에 대한 대안으로서 내놓은 것이었다.

남북한이 서로 절대로 무력침범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만천하에 약속한다,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현행 휴전협정은 그 효력이 존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1974325일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함으로써, 우리측의 불가침협정 체결 제의를 거부했다.

북한이 우리측에 제의했던 평화협정을 미국과 체결하자고 주장함으로써, 이후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교섭을 기도하고 우리측에게는 당국 간의 접촉, 대화보다도 대민족회의 소집 등의 정치협상회의를 주장해 실질 논의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오로지 한국사회의 국론분열에 주력하였다.

그럼에도 박대통령은 1974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그간 박정희 정부의 대북정책을 집대성, 평화통일 3대원칙을 밝혔다.

 

1977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재차 휴전협정이

계속 유효할 것을 전제로 남북 불가침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의 철수도 반대 않겠다는

의견 천명하면서 이를 위한 회담 개최 제의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남북은 상호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여야 한다 남북간에 상호 문호를 개방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남북대화를 성실히 진행하며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 이 바탕 위에서 공정한 선거관리와 감시하에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 총선거를 하여 통일을 이룩한다.

이것은 선평화, 후통일, 종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대신 공정한 선거관리와 감시하의 총선거로 바뀌었다.

1975년 박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북한에 대해 남북한 불가침협정 체결을 재차 촉구하고 휴전협정의 효력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면 유엔군사령부 해체 역시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977년 박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재차 휴전협정이 계속 유효할 것을 전제로 남북 불가침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의 철수도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천명하면서 이를 위한 회담 개최를 제의했다. 동시에 순수한 인도적인 입장에서 언제든지 북한에 식량 원조를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978년에 박대통령은 6.23선언 발표 5주년 기념 특별담화에서 남북 쌍방의 민간 경제계 대표들이 참여하는 남북간 경제협력추진협의기구를 구성하며, 필요시 관계 각료회의도 개최하여 남북한 간 교역, 기술, 자본협력 등 광범한 경제협력을 추진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의 호응이 없자, 19791월 박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한 당국 사이 무조건적인 대화를 재차 제의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123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명의의 성명을 통해 남북한 제정당, 사회단체 및 해외교포들이 참가하는 전민족대회를 소집할 것을 제의하고, 우리측 인사들에게 226통의 편지를 발송했다.

남북간 협의가 되어 1979217일 판문점에서 우리측의 남북조절위원회 대표와 북측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대표 사이 회담 했다.

한편, 71일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발표된 공동성명을 통해 한미 양국은 남북한과 미국이 참가하는 고위당국대표회담을 북에 제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710일 한미 두 나라의 제의를 거부하면서 미국과의 직접 회담을 되풀이 주장했다. 남북간 현안이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박대통령은 김재규에게 시해되면서 박정희 정부의 통일정책도 종언을 고했다.  

  • 도배방지 이미지

북한 신의주온실종합농장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