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통치자의 통일정책 방안// 미군정기 두 지도자 김구와 이승만 ⓵

신탁통치 반대...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통일한국정부 수립에 뜻 같이하다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5/05/12 [14:43]

[기획] 통치자의 통일정책 방안// 미군정기 두 지도자 김구와 이승만 ⓵

신탁통치 반대...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통일한국정부 수립에 뜻 같이하다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5/05/12 [14:43]

한민족의 통일은 숙명이다. 그런데 현재 통일은 요원해 졌다. 남북 국민들 통일염원의 진심은 어느 정도인지 조사가 필요하다. 정치인들 그중에서도 통일정책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지도자의 내심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궁금하다. 미군정부터 현재까지 대통령의 통일정책 방안을 들여다본다.

 

 김구 : 통일방안은 민족의 자주적인 역량 바탕으로 남과 북 하나 된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 건설

 

이승만 : 분단은 피할 수 없는 현실남한이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 지키는 것이 책임 있는 지도자의 길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통일한국정부를 수립하는데 뜻을 같이했으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는 이견 보이다

 

김구의 통일방안은 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남과 북이 하나 된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소 강대국의 영향 아래에 있으면서도 외국을 배제하고 민족 내부의 협의로 통일한국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은 전례 없는 이상주의로 실현 불가능했으나, 진정성과 도덕성만은 높이 평가받았다.

 

반면, 이승만은 현실주의적으로 접근해서 분단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만큼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것이 책임 있는 지도자의 길로 봤다. 통일한국정부 수립방안은 북한도 남한처럼 유엔감시 하 자유평등비밀보통 선거를 하여 대표를 뽑으면 남북의 대표가 합쳐 통일국회,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현실은 북한이 소련과 공산주의자의 방해로 선거가 불가능했던 만큼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공산주의자의 적화로부터 보호하려 했고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김구와 이승만의 협력과 대립의 과정을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통일문제를 탄생시킨 것은 한반도의 허리가 잘린 38도선이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분단선은 아니었다. 일본의 항복 후에도 일본군이 점령지 한반도에서 철수하지 않았으므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미군에게 38도선 이남을, 소련군에게는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실시하도록 했다.

 

이후의 일정과 관련하여 미··소 연합국 외상들은 모스크바 회의(1945.12)에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미소공동위원회 구성, 미소공동위의 남북 정당, 사회단체로부터 의견 수렴 미소 공동위 첫 회의를 19463월 개최, 5년간 미영중소의 한국 신탁통치 실시 등 이에 김구·이승만을 지도자로 한 대다수 한국민은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그러자, 소련은 김구·이승만과 한국민주당 등 반탁 인사를 배제하려 했고, 미국은 합의서대로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참여를 주장하면서 미소공동위는 결렬되었다.

 

소련이 공산주의 통일정부를 주장하면서 김구·이승만 등을 반동 세력으로 규정하자, 남한 내에 김규식, 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운동을 벌여 한때 미군정이 지지했으나, 김구, 이승만, 박헌영 등 주요 인물이 불참하면서 실패했다.

 

미국은 통일한국정부가 언론·종교의 자유가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도록 방향을 잡았으나, 소련이 전한반도 공산화를 꾀하며 대립하자,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미국은 1947년 유엔에 한국 문제를 상정했고. 그 결과 유엔감시 하에 총선거를 거쳐 한국정부 수립, ·소군 철수를 결의했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은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거부했다. 그러자 미군정은 유엔의 결의에 의해 남한만이라도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하기로 했다.

 

이승만은 유엔 결의와 5.10 총선거를 적극 지지했으나,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주장했다. 남한 단독정부를 만들지 말고, 남북 간에 협상을 통해 통일한국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분단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구·김규식은 5.10 총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대신 두 사람은 즉각 남북협상을 시도했다. 미군정의 냉담한 시선을 뒤로 하고 남북연석회의 참여 차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실권이 없던 김일성과 남북협상은 이뤄지지 않았고 총선 반대 합의만 하고 귀환했다.

 

김구, 김규식은 서울에 온 뒤 김일성으로부터 북한도 단독정권을 수립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약을 받아냈다며 5.10 총선거 반대를 분명히 했다. 다만, 그들의 말과 달리 1948년 북한에 김일성정권이 세워졌다.

 

김규식은 김구와 달리 총선거를 반대하지도 참가하지도 않는 입장으로 정계를 은퇴했고, 조소앙은 남북협상 실패를 인정하고 노선을 바꾸어 남한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김구는 단정을 반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김구는 계속 불참하고 자주통일을 주장했다.

 

이미 북한 공산주의자와의 통일 논의가 소련군의 방해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구는 이승만 정부와 뜻을 같이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현실과 유리되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불행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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