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11월 7일, 문재인 정권은 동해로 내려온 탈북어민 2명을 닷새 만에 판문점을 통해 북송하였다. 북한에서 함께 승선한 16명의 어민을 해상에서 잔인하게 죽인 흉악범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문제를 두고 그동안 보수진영은 “탈북어민 2명이 국내에 들어온 이상 국내법에 따라 처리했어야 했다”하였고, 진보진영은 “흉악범까지 우리 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추방한 것이 당연하다”고 팽팽히 맞섰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월 19일에 열린 이 사건에 대한 1심에서 김연철 전 통일부장관 등 당시 사건 관련자들에게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 유예했다. 선고유예는 범죄정황이 경미한 경우 유죄는 인정하지만 일정 기간형의 선고자체를 미루는 판단이다. 이 사건에 분노했던 탈북민들은 혼란스러워 했다. 서울 충무로에서 이북9도민(탈북민) 정착위원회 임영선 위원장을 만났다.
- 탈북어민 2명 강제추방 어떻게 보나. 탈북어민 2명의 강제추방은 국제 법에 따른 것이다. 법치국가인 한국이 UN회원국이면 당연히 국제 법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순리다. 2019년 11월 7일에 체포 닷새 만에 판문점으로 추방된 탈북어민 2명은 살인범이면서 국제범죄자이다. - 사건 개요를 말해 달라. 2019년 8월 중순, 북한 김책항 앞바다서 4명의 배사람(선장, 기관장, 갑판원, 선원)이 15명의 어민과 공해인근 지점에서 고기잡이를 하였다. 이들이 승선한 배의 크기는 길이 16m, 폭 3.7m, 무게 17t이다. 선창(갑판 밑 짐칸)이 5개인데 그 중 3개는 어획물 보관용이고 2개는 침실이었다. 한 번 출항하면 보통 4~7일간이 소요된다. 정원 초과의 어민을 태운 것은 그물작업을 전부 사람의 힘으로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기관장이 선장(성격이 괴팍함)과 말다툼 끝에 화를 참지 못하고 스패너(멍키스패너)로 그의 머리를 쳐서 죽였다. 이걸 우연히 본 어민 1명도 같은 방법으로 죽였고 시체는 바다에 던졌다. 선장과 어민 1명을 죽인 뱃사람들은 일본으로 도망을 약속했다. 기관장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모두 물귀신 될 판이다. - 제일 큰 애로는 무엇이었나. 함께 승선한 14명의 어민이다. 이들과 함께 일본으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고민 끝에 14명 모두 죽이기로 세 사람이(기관장, 갑판원, 선원) 공모했다. 선창(침실)의 14명 어민을 한 명씩 불러내 스패너로 머리를 처 죽여 바다에 버렸다. 또 문제가 발생했다. 배에 사용 중인 원유(디젤유)가 부족해 일본까지 가기 어려웠다. 다시 육지(김책항 부근)로 와서 배를 정박시키고 기관장이 자기 집에 있는 원유 2도람통(1도람통=100L)을 몰래 나눠 싣는 작업을 아내와 같이 했다. 선원은 배를 지켰고 갑판원은 제집에 가서 생필품을 챙겨오겠다며 하선했다. - 어디서 꼬리가 잡혔는가. 평소 있지 않던 수상한 배로 본 경비원이 기관에 통보했다. 관계자가 배를 확인하고 선장집에 갔으나 선장은 없고 기관장 집에 갔으나 아내가 대충 얼버무렸다. 이 사실이 남편(기관장) 귀에 들어갔고 ‘꼬리가 밟혔구나. 도망가자!’고 판단해 선원과 급히 출발했다. 새벽이 밝아왔고 승선 못한 갑판원은 ‘내가 늦었구나. 중국으로 달아나자’며 다른 동료와 탈북을 결심했다. 이후 겁먹고 안전부(경찰)에 찾아가 자수했다.
탈북어민 2명 강제추방 국제 법 따른 것 한국이 UN회원국이면 국제 법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순리...2019년 11월 7일에 체포 닷새 만에 판문점으로 추방된 탈북어민 2명은 살인범이면서 국제범죄자이다
- 북한 당국이 놀랐겠다. 당연하지 않았겠나. 바다에 떠있는 고기잡이배에서 3명이 공모하여 16명의 어민을 살해했으니 전대미문의 사건은 분명했다. 즉시 평양에 보고되었다. 노동당 총비서인 김정은에게 1호 보고되었으니 자동적으로 정치문제가 되었다. 이후 북한사회안전성(경찰)은 인터폴(ICPO : 국제형사경찰기구)에 “지금 16명의 어민을 죽인 우리(DPRK) 국민 2명이 조선(한국)동해와 공해를 거쳐 밀항을 위해 일본 홋카이도로 향하고 있으니 급히 단속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 일본도 무척 황당하지 않았나. 물론이다. 즉시 일본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초계기(해상공역을 비행하다가 적을 발견하면 공격도 수행하는 항공기)가 이륙했고 해양경찰의 순시선 3대가 출동했다. 어디까지나 조용히 밀항하려고 했던 북한어민 2명이 겁을 먹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 방향이 남조선영해 쪽이다. 남한에서도 은근히 호기심이 갔다. 그 광경을 보면서 한국해경은 “저 일본사람들 가난한 북한어선의 불법 고기잡이를 좀 모르는 척하고 봐주지. 꼭 저렇게까지 내쫒는가” 하였다. 한편 일본경찰은 인터폴에 상황보고를 하였고 인터폴은 한국에 협조요청을 했다. - 북한어민 2명은 난처하였겠다. 16명의 어민을 살해한 이들의 목적은 일본 밀입국이었다. 허나 하늘과 바다서 요란하게 자기들을 잡으려하니 겁먹고 달아난 것이 우연히도 남조선 쪽이고 그 곳에서도 한국해양경찰 함선이 자기들을 단속하려 했다. 하여 다시 달아난 곳이 남북해상민통선(남북양쪽 각각 4km 모든 배 출입금지 지역) 안에 들어갔다. - 그 곳은 유엔사 관할 지역 아닌가. 그렇다. 북한어선과 2명의 어민은 남북영해민통선 안에 들어가 2~3일 있었다. 북쪽에서는 인민군 해군함선이, 남쪽에서는 해양경찰 함선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때 인터폴로부터 “한국(KOREA)이 남북해상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서 살인범 2명을 체포하라”는 국제협조 공문이 왔다. 그래서 한국해군의 UDT(특수전전단) 요원들이 그 안에 들어가 북한어민 2명을 체포해 한국으로 이송했던 것이다. - 이후 어떤 과정을 밟았나. 대한민국이 허술한 나라가 아니다. 인터폴의 권고에 따라 살인범 2명을 체포한 순간부터 그들을 따로 갈라놓았고 진술을 받았다. 선장을 포함해 16명을 바다에서 스패너로 머리를 쳐서 죽이고 바다에 버린 사실 100% 일치하였다. 인터폴은 16명 살인범인 북한어민 2명을 본국(DPRK : 북한)으로 추방할 것을 한국정부(경찰청)와 유엔사 측에 요청했다. 인터폴의 명령이기에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서 경찰특공대가 그들을 호송, 북한으로 인계한 것이다. 그들의 타고 온 어선도 “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인터폴의 명령에 따라 처리했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터폴이 지휘한 국제문제로 한·미 전략자산을 동원 체포했고 북으로 보낸 사건...애초부터 한국정부가 직접 관여하지 못했고 해당 부처가 단순협조만 해 남북해상민통선을 넘어 남한영해로 들어오지 않았음으로 남한 정부와는 전혀 무관한 문제
- 결론은 어떻게 보는가.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터폴이 지휘한 국제문제다. 살인자들(북한어민 2명)이 남북해상민통선 안에 들어와 3일간 저항했고 유엔사와 인터폴이 협력, 한·미 전략자산을 동원하여 체포했고 북한으로 보낸 사건이다. 애초부터 한국정부가 직접 관여하지 못했고 해당 부처(국방부, 국정원, 경찰청 등)가 간단히 단순협조만 하였다. 문제의 살인자들이 남북해상민통선을 넘어 남한영해로 들어오지도 않았음으로 남한 정부와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왜 들먹이나. 뭐든 상대에게 지지 않고 이기려는 정쟁(정차싸움)이다. 특히 확인불가의 영역인 남북문제만큼 정치권에서 오래전부터 단골 정쟁소재가 되고 있다. 어쩌면 탈북1호 조명철 의원시절부터 14년 째 국회를 출입하며 통일, 북한인권, 탈북민 관련문제 등의 취재를 많이 하는 림일 작가가 더 잘 알지 않겠는가. 법원에서 선고유예로 내려진 이상, 국익은 물론 국민에게 아무런 도움 안 되는 탈북어민 2명 강제추방사건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 말아야 한다. 법원(정부)의 결정도 못 믿는다면 어쩌자는 것인가. 이 사건은 애초 우리정부와 상관이 없는 국제문제였다. 한국에서 탈북민 관련 문제가 터질 때마다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탈북민 사회다. 이 사건으로 탈북민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사례가 적지 않게 있었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64년 7월 평양서 태어났고 형제는 3남 2녀 이었다. 부친은 ‘평양체육관’ 시공설계를 맡은 건축가, 공사마감총화서 수훈에 탈락되었다. 그에 대한 반발이 정치문제가 되어 12살 때 온 가족이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추방되었다. 부친은 그곳서 분을 삼키지 못하고 끝내 사망했고 모친은 주부였다. 북한건설의 전성기인 1980년 청진시 군사동원부서 입대했다.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산하 군사건설국에 발령받았다. 본부가 평양에 있고 주요임무는 유사시에 이용할 전략기지들을 비밀리에 건설하는 것이다. 병사생활을 거쳐 7년 뒤 강건군관학교 강습반(12개월)을 나왔으며 1988년 본부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 탈북동기가 뭔가. 강건군관학교 동료 몇 명과 몰래 특정지역서 반체제전단을 뿌렸다. 그것이 상부에 보고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총살형에 처할 위기에 빠졌다.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1993년 7월 중순 압록강 일대의 여러 지역을 탐문했다. 보위부가 나의 행불을 확인하고 국경봉쇄 특별경비 명령을 하달했다. 2주간 시도하던 끝에 압록강 도하로 탈출에 성공, 조선족 동포를 만나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을 경유하여 1993년 8월 10일 서울로 왔다. - 탈북 후 경력을 말해 준다면. 1994년 현대건설 건축부에 입사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경제학를 졸업하고 다시 현대건설 재무팀에 복직했다. 2001년 회사에 사표를 냈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일을 하고픈 마음에서 탈북민구출, 국제무역, 제조업 등 다양한 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데려온 탈북민은 대략 1,900여명에 이른다. 탈북민단체인 ‘이북9도민정착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통일방송 유튜브도 하고 있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남북문제, 통일, 탈북민 문제 등 관련 행사를 가만히 보면 남한단체가 주동이고 들러리서는 탈북민들이다. 이제는 탈북단체들이 하나로 잘 뭉쳐서 우리만의 힘도 키워야 하다. 현재 탈북민 단체는 대략 80~90개가 넘는다. 무슨 협회요, 전국연대요, 총연합이요 하지만 내실은 너무나 빈약하다. 행사 때마다 소액교통비를 받고 모이는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풍경도 어느덧 20년째이다. 이래 가지고 언제 우리의 발언권과 권리를 주장하겠는가. 제발이지 못난 탈북민끼리 싸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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