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화물차 운전...고향 청진으로 쌀 가득 싣고 갈 날 기다립니다”[인터뷰] (주)휴먼물류 장근혁 컨테이너차량 운전기사북한에는 대중교통 수단이 매우 낙후하다. 자가용은 평양과 대도시에 전체 차량의 0.5%가량 있을 정도다. 도시마다 시내버스(전차 포함)가 있으나 가동률은 크게 저조하다. 지방을 오가는 시외버스는 며칠에 한 번씩 다니고 있다. 현실이 이러하니 생계를 위한 장사 목적의 유동은 대부분 화물자동차를 이용하는 주민들이다. 정해진 운임(차를 이용하는 비용)은 따로 없으며 운전수 마음대로이고 탑승자(고객)가 원하면 이뤄지는 것이다. 보통 술·담배로도 대체한다. 북한제 화물자동차는 승리58형(2.5톤)이 기본이며 드물게는 중국제, 러시아제 화물차량도 있다. 고장이 많은 북한제보다는 외제가 성능이 더 좋다. 대부분 비포장도로인 실정으로 인해 교통사고도 많이 발생한다. 특히 겨울에 그렇다. 이런 후진국사회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에 온 탈북민들 중에는 각종 화물자동차 운전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인천시 논현동에서 (주)휴먼물류 소속 대형 컨테이너차량을 운전하는 탈북민 장근혁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트럭 운전은 언제부터 했나. 지난 2017년 추석 전 달부터 하고 있다. 그때도 25톤 대형화물차이었는데 서산 대죽KCC에서 나오는 석고보드를 전국으로 운송하는 일을 했다. 그 일을 1년간 하고 이후 지금까지 컨테이너차량을 운전하고 있다. 대형화물차량은 다양한 물동을 실을 수 있지만 컨테이너차량은 전문 컨테이너만 싣게 만든 특수차량이다. 참고로 전국의 컨테이너차량과 시멘트운반차량의 운임가격은 정부가 조정 및 감독한다. - 컨테이너차량의 운전 규정도 있나. 전국으로 질주하는 컨테이너차량은 대부분 고속도로 운행을 많이 한다. 고속도로 진입에 앞서 무게를 측정한다. 여기서 규정에 초과하며 톨게이트에 진입할 수 없다. 만약 진입하면 경찰에 고발이 되며 과태료(규정위반 벌금)가 나온다. 이유는 무거운 차량이 고속도로를 누비면 그 중량으로 인해 도로가 파손되기 때문이다. 차량의 운행속도는 시속90Km로 고정되어 있다. 치명적인 대형 교통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의 지침으로 자동차회사에서 그렇게 만들었다. - 또 어떤 특성이 있는가. 컨테이너차량의 짐은 오후6시 이후 싣지 못한다. 규정으로 되어있다. 이유는 야간운전을 막기 위해서이다. 운전시간은 보통 짧으면 1~2시간 길면 6시간 이상이다. 밤10시 이후 하차지에서 물건을 받을 회사(담당자)도 없다. 컨테이너 차량의 과속과 급정거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특히 급정거가 그렇다. 컨테이너가 운전석을 밀고 들어오면 그야말로 시체도 못 찾을 정도의 참혹한 죽음이 되는 것이다. - 특별한 운전습관 있으면 말해 달라. 무엇보다 수면을 충분히 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졸음운전을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항상 운전거리와 소요시간을 계산해서 1시간 전에 출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목적지에 미리 가서 조금 쉬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편하다. 야간 및 과속운전을 안하니 사고위험성은 크게 없다. 허나 운전은 본인만 잘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운행 중 갑자기 앞에서 끼워드는 차량이 문제다. 작은 승용차들은 잘 보이지 않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때 승용차에 탄 사람은 거의 죽는다고 보면 될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대형차 사고가 그렇게 무섭다.
2017년 9월부터 25톤 대형화물차 운전 서산 대죽KCC에서 석고보드 전국운송 1년 간 한 후 현재 컨테이너차량 운전
컨테이너차량 짐 오후6시 이후 싣지 못해 야간운전 막기 위해...1~2시간 길면 6시 졸음운전 해본 적 없어, 항상 운전거리와 소요시간 계산해 1시간 전에 출발이 원칙
운전대를 잡아서 1년 정도는 초보다. 이때는 경미한 사고가 많이 난다. 예를 들면 좁은 도로를 분명 나올 수 있을 거라 판단해 들어갔다가 길이 막혀 후진해서 나와야 하는데 이게 보통 고난도가 아니었다. 이제는 고수가 되었으니 좁은 길은 내려서 도보로 걸어가 확인하고 진입한다. 초보자들에게 절대 과속하지 말라고 훈시한다. 그래보았자 10분차이라고. 그 10분에 생명을 바칠 일은 없어야 한다고. - 일하면서 즐거울 때는 언제인가. 생각하기 탓이다. 전국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다닌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대형차는 높은 자리(운전석)에서 운전을 하니 오히려 더 쉬운 것도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다양한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형차이니 운전석 뒤에 침대자리까지 있다. 운행 길에 차를 잠시 세우고 침대에서 편하게 눈을 붙일 수 있다. - 운전할 때 드는 고향생각은. 내가 사는 인천에서 고향 함경도 청진까지 가는 자동차도로가 한국의 고속도로처럼 멋있게 건설되었으면 좋겠다. 인천에서 출발한 컨테이너차량이 하루면 청진까지 가서 나진항을 통해 러시아로 수출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사는 인천에서 고향 함경도 청진까지 가는 자동차도로가 한국의 고속도로처럼 멋있게 건설되었으면 좋겠다. 인천에서 출발한 컨테이너차량이 하루면 청진까지 가서 나진항을 통해 러시아로 수출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퍽 들뜬다. 그러면 남한은 국제물류 운송비용을 절감하고 북한은 고속도로 사용료를 받아도 적은 돈이 아니겠는데 말이다. 남과 북이 가급적이면 정치와 상관없이 경제교류 협력은 꾸준히 지속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통일을 위해 투자하는 것인데 말이다. 문제는 변덕이 심한 북한정권이 대남사업 분야에서 변화된 모습도 보여야 한다.
내가 사는 인천에서 함경도 청진까지 자동차도로가 한국의 고속도로처럼 멋있게 건설되길 기대...인천서 출발한 컨테이너차량이 하루면 청진까지 가서 나진항을 통해 러시아로 수출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들뜨고 뿌듯해져
- 고향이 어디인가. 1982년 3월 함북 청진서 태어났다. 부모는 OO식료공장 노동자였다. 아버지는 1990년에 어머니는 1997년에 각각 질병과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15살에 부모 없이 큰 누나가 세대주(가장)가 되어 우리 집은 어렵게 살았다. 고난의 행군시절 학교로 등교하는 학생이 절반도 겨우 되었다. 대부분 가정일(장사)에 동원되었다. 나도 30~40리를 걸어가서 땔감(나무)을 해오기도 하였다. 안 그러면 추운 집에서 살아야 한다. - 당시 사회 환경을 말해 달라. 김일성 사망(1994년) 이듬해부터 사회는 완전히 아비규환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가 식량배급을 안주니 어른들이 직장에 출근 못하는 상황이 더 많았다. 장마당, 시장, 버스정류장 등 공공장소에는 배곯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신기했다. 그래도 누구하나 대중이 모인 공개장소에서 “노동당은 어째서 인민들에게 식량배급을 안주는가?”고 따지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의 팔자구나!’ 하고 체념한 듯이 보이는 모습과 자세뿐이었다. 얼굴은 새까맣고 옷차림도 대부분 남루하기 그지없는데 영화에 나오는 거지나 다름없어 보였다. - 또 다른 풍경이 있었다면. 공공장소에는 알게 모르게 중국으로 도망(팔려가거나 시집가는 것)가려는 여자들이 많았다. 나 같은 소년들이 ‘중계활동’을 하기도 했다. 여자들에게 성인브로커보다 조금 더 안심이 가는 ‘소년브로커’로 보였던 것 같다. 가령 어떤 소년이 “누나! 중국에 안 가보겠어요?” 하면 “몰래 가는 방법이 있니?” 하고 답하기도 한다.
1982년 함북청진 출생...90년대 부모님 사망 큰 누나가 세대주가 되어 집은 어렵게 살아 고난의 행군시절 등교하는 학생들이 절반 대부분 장사에 동원,,.30~40리를 걸어가서 땔감 해오기도 안 하면 추운 집에서 살아야
- 좀 더 상세히 말해줄 수 없는가. 희망자에 한에서 북한여자를 몰래 중국으로 넘기면 중국돈(위안)으로 적게는 100위안에서 많기는 500위안까지 받는다. 평균 200~300위안으로 보면 되는데 그 돈이면 북한에서는 쌀을 수백kg을 사고도 남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국경지역에서 북한여자를 넘겨받은 중국브로커는 다시 내륙지방에 파는데 북한브로커에게 준 값의 5~10배나 높은 가격으로 거래한다. 정말이지 북한여자들은 나라를 잘못 만난 탓에 21세기 성노예로 팔려가는 인간수모를 겪는다. - 그 시절 무슨 생각이 들던가. 당시는 10대 중반 시절이라 왜 인민들이 그렇게 굶주려야 하는지 몰랐다. 북한에는 외국 방송이나 신문, 인터넷 등을 일반주민들이 접속할 수 없다. 그런 것을 무단으로 접촉했다가는 국가보위부에 연행이 될 정도로 ‘국가반역’에 가까운 엄중한 범죄로 취급한다. 그러니 어른들은 물론 나 같은 소년들은 더욱 모르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 그것도 한국에 와서야 북한을 알게 되었다. 북한주민들이 굶는 것은 당국이 수령 동상, 박물관, 기념관 등 우상화에 거액을 쓰기 때문이다. 또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가 이유이기도 하다. 정말 나쁜 노동당정권이다. - 가족생활은 어떠했나. 가만있으면 4남매가 굶어죽을 판이니 1998년 3월 큰누나가 중국으로 탈북했다. 가서 돈을 벌어와 가족을 살릴 일념으로 도강을 하였다. 몇 달 후 누나한데서 편지가 왔고 너무나 신기했다. 중국으로 탈북한 누나한데서 편지가 왔으니 말이다. 편지주소를 갖고 나와 형이 탈북, 누나를 찾아 연길로 갔다. 풀숲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일이었고 우리는 고지식해서 누나를 못 찾고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왔다. - 어떤 시련과 고생이 있었는가. 이후 혼자 큰누나를 찾으려 몇 차례 중국을 드나들었다. 그러던 중 국경경비대에 걸렸다. 단속이 된 도강(탈북)자들은 대부분 회령전거리 교화소로 보낸다. 3년, 5년, 7년 이상의 형벌을 받고 하루 12시간 이상 강제노동을 한다. 작은 체구인 나는 14살이라고 속여 간신히 노동단련대(3개월, 6개월, 9개월)로 가게 되었다. 다행히 노동단련대에서 좋은 반장(죄인 중 우두머리)을 만나 밥도 배불리 먹고 다음날 꽃제비구호소(가출소년 보호소)에 보내졌다. 석탄을 운반하는 일이다. 거기서 다시 도망을 쳐서 30km를 걸어서 회령의 큰어머니 집으로 갔다.
2000년 태국에서 한국국적 항공기에 올라 어렵게 캄보디아로 이동...러시아를 출발해 캄보디아를 경유 한국으로 가는 외국국적 비행기를 타고 2000년 3월 인천공항으로 입국... “정말 ‘고난의 행군’으로 왔다”
- 언제 한국으로 왔는가. 다시 형과 함께 탈북하여 누나가 있는 연길로 갔다. 어렵게 누나를 만나 몇 개월을 보냈다. 누나도 시집에 눈치가 보여 나를 한국으로 가라며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2000년 태국에서 한국국적 항공기에 올랐다. 허나 신분증이 이상하다고 내리라 해서 “나는 탈북자다. 내리면 위험하다”고 했는데도 “안 된다!”고 해서 내렸다. 이후 캄보디아로 이동했다. 거기에 마침 러시아를 출발해서 캄보디아를 경유하여 한국으로 가는 외국국적의 항공기가 있었다. 그 비행기를 타고 2000년 3월 인천공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정말 ‘고난의 행군’으로 왔다. - 현정은 현대회장 방북신청 북한이 거절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옹졸해 보인다. 자기 아버지(김정일)가 공들여 시작한 남조선(한국) 현대그룹과의 경제협력 사업도 결국 파탄내고 그걸 회복시키기는 고사하고 끝까지 파괴하려고 하니 답답하다. 인민들의 고통을 모르는 지도자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통치할 수 있는데 ‘인민의 수령’인 김정은에게는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어떻게 하나 남한의 자본을 끌어들여 경제를 발전시켜 배고픈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독재자가 그렇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요즘 고향서 들려오는 소리는 지난 1990년대 중후반 300만이 아사한 ‘고난의 행군시기’보다 더 힘들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계속 나온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내 컨테이너차량에 한국서 남아도는 쌀을 가득 싣고 고향으로 가서 인민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통일의 날이 하루 빨리 와서 북한의 우리 부모형제들도 최소한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일을 모르고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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