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에게 남한 첫 거주지가 고향...봉사활동은 삶 풍요롭게 해”

탈북민단체 ‘내고향만들기공동체’ 위영금 대표

림일 기자 | 기사입력 2023/03/03 [12:52]

“탈북민에게 남한 첫 거주지가 고향...봉사활동은 삶 풍요롭게 해”

탈북민단체 ‘내고향만들기공동체’ 위영금 대표

림일 기자 | 입력 : 2023/03/03 [12:52]

북한 김일성의 남침도발로 발발한 한국전쟁 휴전 이후 시작된 탈북민 역사는 올해로 장장 70주년이 된다. 19537월 이후 지금까지 조선노동당 독재정권을 피해 다양한 방법으로 남한에 내려온 탈북민은 35천여 명이다. 그만큼 사회주의국가인 북한체제가 살기 어려운 사회임을 반증하는 결과이다.

분명 북한에 비하면 인민의 지상낙원이 여기 남한인 것은 틀림없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의 비밀투표로 선출하는 것이 가장 신비롭다. 자기가 살고픈 지역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도 놀랍다.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도 자유이고 무능한 정부를 비판해도 감옥에 수감되지 않는다. 굶주림이란 말조차 모른다.

그러나 치열한 생존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인 것만큼 생활상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시련도 적지 않게 있다. 많은 탈북민들의 힘든 남한사회 생활에서 공통점은 무엇인가에 격리된 듯 하는 외로움, 괴로움, 우울증, 불안감 등이다. 경기도 용인에서 탈북민단체인 내고향만들기공동체를 운영하는 위영금 대표를 만났다.

 

- ‘내고향만들기공동체를 소개해 달라.

지난 2020년에 설립했다. 취지는 통일이 될 때까지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우리 탈북민들이 낯설지만 여기 남한이 제2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정착 하는데 있다. 서로 위로하면서 정보와 소식을 나누고 또한 봉사활동도 하자는 의미에서 만들었다.

탈북민들은 남한에 입국하여 하나원서 정착교육 및 직업훈련을 받고 사회로 나온다. 첫 거주지서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는데 사실상 그곳이 고향이다. 처음 5명으로 시작한 단체 활동에 현재 3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비영리단체이다.

 

2020년에 설립...통일 될 때까지 고향으로

갈 수 없는 탈북민들 낯설지만 여기 남한이

2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정착 하는데 있어

 

지역 거주 탈북민과 마을주민이 함께하는

함경도순대 만들고 나누기행사를 진행

30명의 탈북민과 남한 사람들 정성껏 만든

북한순대, 명태순대 등은 독거노인에 전달

 

 - 회원들이 쉽게 모여지던가.

그렇지 않다. 폐쇄사회 북한에서 주민들은 10살 때부터 집단조직 생활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한다. 공산독재국가의 특성일 것이다. 한 우리 속에 집어넣고 정신이며 육체를 노동당이 강제로 통제하던 이런 조직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개인위주의 남한생활에서 쉽게 위험에 빠진다. 그것이 일명 우울증, 외로움 등이다.

탈북민들에게서 이런 상황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고향사람들과 만나고, 또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보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한다면 친목 및 봉사활동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 그동안 어떤 일을 하였는가.

20216월 지역 거주 탈북민과 마을주민이 함께하는 함경도순대 만들고 나누기행사를 진행했다. 10여 명의 탈북민과 남한 사람들이 정성껏 만든 북한순대, 명태순대 등은 독거노인 가정 등에 전달했다. 가을에는 명태김치를 만들어 지역주민 여러 가구에 전달했는데 이때 만든 명태김치가 탈북민단체로는 처음이다. 모두 신선하고 담백한 맛이라고 즐거워했다. 아마도 매년 가을이면 명태김치를 만들 것 같다.

- 또 다른 봉사활동은 어떤 것인가.

단체가 설립되어 지금까지 매주 한 차례씩 지역의 노인복지센터를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말동무가 되고 시설내부 곳곳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을 3~4시간씩 무료로 한다. 청소봉사활동에 10여 명의 회원들이 동참한다. 알게 모르게 감사한 일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받은 사랑을 봉사로 갚는 것이다. 또한 우리도 언제인가 노인이 되고 쇠약해질 것이다. 지금의 젊음에 감사하며 살아야 할 이유다.

- ‘행복여정문학단체는 뭔가.

지난 2021년에 만든 탈북민 문학단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매일 두 페이지 이상의 글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 그 덕에 시집과 단행본을 낸 경험도 있다. 현재 4년 째 경기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 글쓰기만큼 좋은 취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장점을 살려 단체 회원들에게 매일 카톡에서 반 페이지 글을 쓰는 활동을 하자고 제안을 했었다. 사실 탈북민 개개인은 모두 스토리가 굉장한 소재를 갖고 있다. 그것을 기록에 남긴다는 의미가 있고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인민의 어버이수령 머리스타일, 옷차림 등

흉내 내면 오히려 충성분자로 보여 지기도

사회에서 권세와 돈 좀 있다하는 사람들은

함흥에 가서 중앙당 잠바를 만들어 입어

 

 


-고향이 어디인가.

1968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났다. 4남매의 막내였고 아버지는 OO병원 의사, 교원(교사) 출신인 어머니는 부양이었다. 1983년 고등학교졸업 후 함흥에 있는 함경남도지방공업총국 기능공학교에서 옷재단기술 공부를 1년간 했다.

당시 사회에서 인기 있는 직업학교였고 입학은 아버지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고원군 OO종합편의봉사소 양복 반에 배치 받았다. 고객들의 옷 수선 및 주문 양복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나름 대중이 부러워하는 직업이다.

 

- 이색적인 추억이 있다면.

내가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때인 1985년 중국에서 친척이 나왔다. 예쁜 색깔의 옷이며, 고운 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초콜릿 등을 갖고 왔는데 너무나 고급스러워 눈이 둥그레졌다. 아버지는 이때 친척이 가져다 준 중국제 라디오로 가끔 남조선방송을 몰래 들었는데 어느 날 가족 식구들이 무서워해서 과감히 버렸다.

- 작업 풍경을 말해 달라.

북한주민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만도 기성복(공장에서 만들어진 옷, 일명 단체복)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고쳐 입는 버릇이 있었다. 기성복은 단순하고 촌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사회주의국가 공장제품이 대부분 그렇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옷차림이 다양해지면서 주문해서 만들어 입는 풍경이 생겼다. 1989년 여름 평양서 있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인민들 옷차림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1990년 전후로 사회에 중앙당 잠바’(김정일 점퍼)가 대유행 되었다. 북한은 남한처럼 연예인의 패션(옷차림)을 따라하는 사회가 아니다. 오직 한 사람, 수령만을 우상화하고 수령의 사상과 도덕품성을 따라 배우는 인민들이다.

인민의 어버이수령의 머리스타일, 옷차림 등은 흉내를 내면 오히려 충성분자로 보여 지기도 한다. 사회에서 권세와 돈 좀 있다하는 사람들은 고원읍이나 함흥에 가서 저마다 중앙당 잠바를 만들어 입고 으쓱해서 다녔다.

- 나쁜 추억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김일성이 사망한 이듬해인 1995년 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했다. 국가서 식량배급을 주지 않아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누구도 그 상황이 당과 수령의 잘못이라고 속으로 생각할지는 몰라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당에서 인민들이 겪는 경제난은 전부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 때문이라는데 거기에 뭐라 하겠는가.

내가 일하던 종합편의봉사소에서 출납원 아주머니와 경비원 아바이가 굶어 죽었다. 보다 못해 책임자가 재봉기(국가재산)를 갖고 나가서 시장에다 팔아서라도 굶어 죽지 말고 살아남으라고 했다. 그때 정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 그게 어떤 생각이었나.

나는 13살 때 우연히도 남조선에서 올라온 삐라를 본적이 있다. 내용은 서울에 자동차가 많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무심결에 봤는데 성인이 되어 다시 생각해보니 자동차가 많으면 곧 나라경제가 발전되었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올림픽까지 치른 잘 사는 남조선이 왜 우리 공화국(북한)을 못살게 구는지 이해가 안 갔다.

 

북한을 잘 알면서도 또 잘 모르는

존재가 바로 탈북민... 이유는 당국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정보, 외부세계

소식이 차단된 폐쇄적인 사회이기 때문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북한학과 입학

북한도시 함흥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 수여 받아

 

 - 탈북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먼저 아버지가 1997년 중국 접경지역인 함북 남양으로 이동하여 몰래 두만강을 건너 친척집으로 갔다. 이후 다시 고원으로 와서 19984, 막내딸인 나를 데리고 탈북 길에 올랐다. 언니 오빠는 모두 출가하여 자기 살림을 살았다.

고원서 남양까지 열흘 만에 도착했고 이후 두만강을 아버지와 함께 건넜다. 중국말과 글을 단 시일 내에 열심히 배웠고 이후 밥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나 불안한 마음은 늘 있었다. 언제든 공안의 단속 표적이 되는 탈북자여서.

-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중국 친척들의 도움으로 적지 않은 돈을 장만했고 어느 날 나를 보고 너는 여기서 살아라. 나는 조선으로 가겠다며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가셨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자식들은 모두 출가해서 살고 어머니도 없는 북한 땅으로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어떤 자괴감, 허망함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자신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고원 땅과 동료들이 그리워서인지...

- 언제 한국으로 왔는가.

탈북자 신분으로 넓고 넓은 땅, 중국에서 사는 것은 언제나 바늘방석에 앉은 것과 같다.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2004년 조선족 신분의 여권을 갖고 말레이시아로 갔다. 거기서 2년간 가정집도우미, 미용사 등으로 일을 하였다. 20062월 남한에 입국했고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그해 7월 사회로 나와 여기 용인에 왔다.

- 사회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나.

용인에 소재한 OO전자회사 사무 경리직에 취업해 일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한국방송통신대학(4년제) 중어중문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했다. 졸업 후 2012년부터 경기남부지역 통일교육센터 상근직 간사 및 안보강사로 근무하였다.

2018년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북한학과에 입학했다. 북한을 잘 알면서도 또 잘 모르는 존재가 바로 탈북민이다. 이유는 당국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정보, 특히 외부세계에 대한 작은 소식도 완전 차단된 폐쇄적인 북한사회이기 때문이다. ‘북한도시 함흥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북민들에게 통일이 되기 전까지

거주지가 고향...사람이 제 고향을

잘 알고 사랑하는 것도 애국일 것

 

올해 시와 그림 작품 전시회열고

처음으로 행복여정문학지발간 예정

 

 - 학업 이후 어려운 점은.

분명히 내가 하고 싶어서 꿈을 갖고 시작한 대학공부이고 애써 취득한 박사학위이다. 이후 중앙과 지방, 관계기관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려보았다. 좋은 결과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는 치열한 경쟁사회임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내가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사람은 평생토록 배운다고 말하는가 보다. 그렇다고 희망을 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웃음).

-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가.

봉사단체와 문학단체를 동시에 이끌자니 다소 힘이 들 때가 많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활동을 해나가려고 한다. 경험으로 보아 봉사는 감사로 하는 일이고 문학은 감성으로 남기는 기록이다. 이 두 가지의 사회활동이 결합되어 낳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본다. 사람은 살면서 아름다움을 남기는 유일한 존재이다.

탈북민들에게는 사실 통일이 되기 전까지 거주지가 고향이다. 사람이 제 고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랑하는 것도 애국일 것이다.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문학탐방을 통해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활동도 꾸준하게 벌릴 예정이다. 올해 시화전(시와 그림 작품 전시회)을 열 것이며 처음으로 행복여정문학지를 발간하려고 한다.

-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올해로 남한 살이 18년째다.최근 몇 년간 코로나로 인해 주춤했지만 앞으로도 후배들의 남한 입국은 계속될 것이다. 북한 체제가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자본주의 국가인 여기 남한에는 무엇이든 절대 공짜가 없다. 자신의 피타는 노력을 바쳐야 만이 응분의 대가가 있다. 분명 사람 살 맛 나는 곳이다. 북한에서 어렵게 살던 그 정신을 부디 오래 간직하고 열심히 살면 부자가 되고, 행복해 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늘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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