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진본사진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역사의 현장] 명성황후 초상화 발견 ‘재조명’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 편집인협회 前 대표 | 기사입력 2022/11/03 [21:30]

명성황후 진본사진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역사의 현장] 명성황후 초상화 발견 ‘재조명’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 편집인협회 前 대표 | 입력 : 2022/11/03 [21:30]

2006년 여름 캐나다 토론토에서

일본 발행 명성황후 초상화 입수

 

오랫동안 명성황후 사진부재로 논란이 되던 초상화 건을 재조명한다. 최근 한 중앙언론(KBS) 방송사는 ‘명성황후 최후의 날 (긴급입수)’이라는 이름아래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관련한 역사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명성황후 시해(1895년10월8일)사건당시 조선주변 환경과 일본의 조선국모(명성황후) 살해음모 배경 등을 종합한 1시간짜리 심층취재 내용이다. 방송사는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역사도서관 자료와 문서수장고에 묻혀있는 300페이지에 달하는 비밀보고서를 발굴, 분석해 소개했다.

 

이들 중 내 관심사는 방송사가 방영한 러시아 비밀문서 내용물 가운데 등장한 명성황후를 비롯한 조선 황실의 3인 사진에 있었다. 사진 들이 러시아 서류 설명 중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예전 내가 토론토에서 발굴한 초상화와 동일했으며, 이로 인해 명성황후 초상화 얘기를 다시 꺼내게 된 계기가 됐다.

 

지난 2006년 여름 나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일본 발행처의 명성황후 사진(조선황실 3인 초상화를 입수했다. 한 중국인으로부터다. 곧장 이를 모 언론에 게재했다. 명성황후 초상화 작가는 일본 황실전속화가 겸 사장(신양당)인 오카무라 마사코1858-1936) 여류화가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최고의 석판화가 (유일한 일본 황실화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한 장 종이에 석판화로 조선황실3인(고종, 명성황후, 대원군) 초상을 찍어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직전 해 생전시기 1894년이다.

 

하지만 공교롭게 같은 시기인 2006년 7월 LA 한 중앙언론지 특파원이 명성황후 진짜 얼굴을 찾아냈다고 사진을 대서특필 공개했다. 국내외 모든 한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며칠 후 그 사진은 미 도서관에도 진작 소장돼 있는 궁녀사진 임이 밝혀져 일종의 해프닝으로 싱겁게 끝나 버렸다.

 

그때 토론토에서 입수한 명성황후 초상화 또한 세인의 이목을 거의 끌지 못한 채 유야무야 묻혀버렸다. 사람들은 강원도신문에서 발굴한 명성황후 사진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나로선 다소 섭섭한 측면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언론 환경과 능력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일본 천황부처 초상화 발굴로

명성황후 사진 원본 가능성 입증

 

일본에서 명성황후 관련 건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오래지 않아 도쿄 한 도서관에서 명성황후 사진이 원본일 개연성을 입증할 수 있는 일본 황실 초상화(명치천황과 소헌황태후를 발견했다. 그 초상화는 명성황후와 같이 1894년에 제작된 화가 오카무라 마사코의 신양당 인쇄소 석판화였다.

 

초상화 크기는 가로 54cm, 세로 36.7cm)로 일본초상화 역시 석판화 인쇄다. 오카무라 마사코 황실화가가 명성황후 초상보다 약 6개월 먼저 (1894년3월9일)제작한 것이다. 신양당에서 시사신보부록으로 펴낸 것으로 알려졌다.

속보로 다시 강원도민일보 (2006.8.26)에 실었다. “생전(1894년)의 조선-일본 두 황실”사진을 근거로 했다. 일본 메이지천황부처 사진제작 시기는 동년 3월이니 명성황후 초상화(1894.9.10)보다 약6개월 앞섰다. 생전 동일한 화가와 발행/인쇄소의 일본 황실자료로 인해 명성황후 초상화 또한 진품일 개연성이 한층 높아졌다.

 

최근 중앙언론방송사가 러시아 비밀문서 등 설명과 함께 공개한 명성황후 등 조선황실의 인물초상은 윤곽이 뚜렷했다. 1905년11월2일자 프랑스 주간지 일루스트라숑(L’illustration)에 실렸던 희미한 명성황후 사진과 비교해 같은 사진으로 보이나, 그림상태가 달랐다.

이는 2006년 토론토에서 입수했던 조선황실 3인 초상화(첨부)와 선명도가 거의 동일했다. 그러한 점 등이 이번 새삼 명성황후 사진 건을 재조명하는 이유에서다.

 

일본발행 명성황후 초상화는 1895년

시해당하기 직전 해인 1894년 9월 일본

도쿄 신양당에서 찍어낸 생전의 석판화

 

참고로 조선(개화기)에 첫 사진관(촬영국)이 등장한 것은 1883년이었다. 당시는 사진이 일반화하지 않은 까닭에 황실에는 초상화, 삽화 작가들이 그린 작품이 많았다. 1894년은 갑오경장과 청일전쟁이 시작됐고, 다음해 1895년은 민비시해사건, 태양력(양력) 사용과 단발령이 내려진 해다. 명성황후란 시호는 민비 사후 1897년(대한제국)에 고종이 높여 칭해 놓은 명칭이다. 그전 대한제국 전까지는 ‘왕비민씨’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토론토에서 발견된 초상화를 음미한다. 재삼 언급하지만 일본발행 명성황후 초상화는 1895년 시해당하기 직전 해인 1894년 9월 일본 도쿄 신양당에서 찍어낸 생전의 오리지널 석판화라는 점이 의미가 있다.

초상화 입수당시 캐나다의 한 고화전문가에게 감정을 구한 적이 있다. 오랜 골동품 감정가인 그는 “이 (조선황실)초상화는 사진이 아닌 오리지널 리토그라프(Origin. Lithograph)의 희귀한 석판화”라고 분석하고 “연대와 작가, 발행처 등 세세한 내용을 밝힌 높은 기술수준으로 찍어낸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감정가는 “초상화 아래 부분에 적혀 있는 <판권소유 명치27년9월10일 인쇄 동년월일10일 발행>에서 ‘판권소유’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판권소유’라는 말은 이 초상화 원본이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것이라며 “이 석판화가 진짜 원본임을 밝혀 주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6년 7월15일 언론에 게재됐던 명성황후 초상화 관련 일부 내용을 소개한 글이다.

명성황후 초상화에 적힌 내용을 보면 명성황후 화가는 일본메이지 황실작가 오카무라 마사코.

그림 우편 상단 (사진 테두리 띠) 바깥에 세로글씨 한자로 <조선국 귀현초상>이라는 제목아래 3인의 황실가족 반신상이 그려져 있다. ‘귀현’은 지위가 높고 귀하며 이름이 유명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진 가운데에는 조선국왕(고종)을 중심으로, 왼편에 왕비 민씨 (명성황후), 오른편에는 대원군(흥선 대원군) 이름이 붙은 반신상이 배치돼 있다.

 

익명의 역사학자 “일본발행의 생전 초상화

발견 명성황후 진영이라고 판단된다” 확신

“진짜 명성황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초상화 크기는 가로 55cm, 세로40.4cm.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3인 황실인물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림 아래쪽에 옛 필법의 작은 한자로 3등분 구분돼 발행, 인쇄시기, 주소, 작가, 출판사 명 등이 밝혀져 있다. 띠 장식으로 꾸며진 초상화 밖 아래 글씨내용에 따르면 오른쪽 맨 앞에는 판권소유메이지27년 9월10일 인쇄 동년동월 10일 발행이라고 표기돼 있다.

 

설명 중간부분은 인쇄화가 겸 발행자와 동경경교구 북정12번지 태도천길차랑타지카와 요시지로 라고 적혀있고, 맨 왼편 명성황후 초상 아래쪽에 인쇄소는 동경 국정구 유락정 삼정목 신양당으로 나타나 있다.

명성황후 사진 권위자로 알려진 李태진 서울대 국사학교수는 초상화 발견당시 “이 초상화는 연대가 가장 앞서고 일본에서 나온 자료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평하고, “초상화에 작가이름까지 밝혀진 경우는 처음”이라고 전했다. 李교수는 “1894년에는 일본 삽화가들이 조선궁궐을 내왕하던 시기로 일본 출판사가 황실3인 인물을 한 장에 담아 띠 장식으로 보급판을 낸 것도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왕비 머리에만 비녀를 두 개 꽂을 수 있어, 이 초상화가 명성황후임을 확인해 주는 자료가 하나 더 나왔다고 본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서강대 이종욱 사학과 교수(총장)역시 “명성황후 생전에 발행, 인쇄된 황실 초상화에서 다른 두 사람 얼굴은 같고 명성황후만 다른 얼굴로 조작한 경우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어렵다”며, 진본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의식연구 전문가인 한영우 한림대 교수는 “복장과 가발 등으로 볼 때 옷과 가발은 왕비복장이 아니며, 얼굴도 당시43세 나이치고는 너무 젊다.”며 “진짜 명성황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최문형 한양대 교수 역시 “발행연대는 중요하지만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상황설명이 없어 명성황후라고 확신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부정적 견해였다.

반면 익명을 요구한 한 역사학자는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를 계획한 것은 1895년 을미사변 수개월 전이었고, 그 전해 1894년에는 오히려 명성황후와 일본이 가까운 관계였다”고 주장,“일본발행의 생전 초상화 발견은 명성황후 진영이라고 판단된다.”고 자신했다.

 

일본에서 석판화 기법은 19세기 후반 일본전국에서 한창 유행돼 일반의 인기를 끌었던 미술화법이다. (석판화는 목판화, 동판화시대를 거쳐 18세기 후반 독일, 프랑스 등 유럽국가에서 첫 시작된 미술작법).

명성황후 초상화가인 오카무라 마사코는 명성황후 오카무라 마사코(1858-1936)는 일본 유일의 황실화가 제1인자였다. 그녀는 도쿄에서 신양당이란 석판인쇄업을 발행인으로서 창업했다. 이때 일본 내 러시아정교 세례교인이 됐다.

신양당의 석판인쇄업은 1882년3월부터 일본에서 크게 번창했다. 일본 판화 변천사에 따르면 그녀는 당대의 명장) 판화가로서 일본 석판화가 제1인자로 평가돼 있다. 이 책자는 “오카무라 마사코는 서양화가로서 필치가 섬세하고 따뜻한 작풍”이라고 평했다.

 

당시 마사코 만이 일본 황실로부터 천황 초상화를 일반인에게 보급 할 수 있는 정부허가를 받았다고 기술돼 있다.

석판인쇄업은 20세기 들어와 사업이 사양길로 들어서자 마사코는 화업에서 물러나 신양당 에서 동양인쇄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회사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전소해 폐업했다 이때 도꼬 한 복판에 있던 그녀 자택과 인쇄소 내의 모든 작품들이 완전 붙 타 버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밝혀져 있다.

 

이 때문에 일본 미술사(석판화)에 이름을 남길 마사코 작품들이 자택과 함께 화재로 없어져 무척 유감으로 기록돼 있다. 명성황후 초상화(석판화)이 발견이 힘든 것도 그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다. 사후 도쿄에서 마사코 전기 책이 발행됐다.

명성황후 진본사진 논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이제부터 논쟁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 다만 전문가가 아닌 기자 시각으론 명성황후 초상화를 부정하는 사학자 분들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나이가 젊어 보인다.” “의복이 다르다” “머리모양이 아니다” “연대표기가 무슨 이유로든 잘못됐을 것이다.” 등의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는, 억지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 편집인협회 前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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