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집권자의 야욕 채우려는 이용물로 맹종하는 양떼와도 같았다[맹동욱 러 공훈예술가의 체험수기-5부] 북한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당시 북한 실상김철우 정치부군단장을 찾아가 중대장을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뿌리는 소련에 있고, 김철우는 소련의 스파이로서 이 전쟁의 씨를 뿌린 대표자 중 한사람이라는 생각이 미쳤다. 전형적인 사회주의자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로 생각되었다. 전에 그렇게 명랑하고 활기에 차 있던 중대원들은 하나같이 풀이 죽고 우울해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누구 하나 드러내 불만을 표현하지 못했다. 비실거리며 남의 눈치만 보았다. 나 자신을 포함해 집권자의 야욕을 채우려는 이용물로, 우두머리에 맹종하는 양떼와도 같았다.
인민이란 개인 존재가치를 상실한 채 김일성이란 태양을 떠받드는 무지몽매한 대중이름에 다름 아니었다. 김일성은 전쟁에 계속 패배하면서도 그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후퇴하면서도 여전히 승리의 행진곡을 불렀다. 명령에는 오직 복종만이 있을 뿐 아무리 정당한 사유가 있어도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중대장도 부하들의 무의미한 죽음을 구하려한 것이 결국 반동이란 누명을 쓰게 된 것 아닌가.
“천길 물속에서 끄집어 낸 물고기가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 수 있어요? 지금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 심겨진 장미꽃과도 같아요”
저녁식사를 끝낸 나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호를 찾았다. 울적한 심사를 달랠 겸 중대장 일을 같이 의논하고 싶었다. 김종호는 전과는 달리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난 이제 무서운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난 자살을 결심했어요. 더 이상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없어요. 가장 저열한 것들까지도 나를 비웃고 멸시하는 걸요.” 그러면서 작은 나뭇가지를 쥐고 바직바직 꺾기 시작했다. 그의 목덜미와 손은 전과 다름없이 때가 덕지덕지 끼어 나무껍질 같았다. “죽는단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네. 죽음이야말로 가장 손쉬운 현실도피 방법이 아니오?” 그는 내 말을 꺾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천길 물속에서 끄집어 낸 물고기가 이 살벌한 사회에 적응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나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 심겨진 장미꽃과도 같아요.” 나는 말머리를 돌려 김철우 정치부 군단장에게 부탁해 중대장을 구할까 생각중이라고 했다. 그는 발작적으로 주먹으로 자기의 앙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구원? 말만으로 구원이 됩니까? 행동을 해야지요. 정치부군단장이란 훌륭한 빽이 있으면서 왜 가만히 있어요? 무슨 짓을 하던 군단장을 꼭 구해내야 합니다. 벌써 죽였을 지도 몰라요. 중대장 같은 사람까지 변절자로 몰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현실이 하도 암담해 나도 자살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젠 희망이 없기 때문이에요.” “김종호, 고맙네. 훗날 얘기해 주겠지만 나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불쌍한 놈이오. 나까지도 반동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망설인 것이 부끄럽네. 이젠 공포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겠네.” 우리는 굳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군단 사령부는 산골짜기에 많은 통나무 토굴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군단사령부를 찾아가며 내게 있어 조국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둘로 갈라진 조국, 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이 무의미한 전쟁에 참가케 한 조국이 진정 내 조국인가를 물었다. 조국이 과연 내게 무엇을 주었는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오늘의 현실 앞에서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내 존재의 끝은 어디일까를 끝없이 회의하며 걸었다. 군단 사령부 보초병에게 내 성명을 적어주며 정치부 군단장에게 알리라고 했다. 잠시 후 김철우 군단장 자신이 반갑게 소리치며 나오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오래만이야. 그러잖아도 널 찾으려고 했다. 전선신문에서 네가 쓴 시를 읽었다. 훌륭해!” “정치부 군단장 동지!”하고 나는 방문목적에 대해 보고하려 했다. “그런 짓은 그만두고 어서 들어와.” 그의 안내로 들어간 토굴 안은 사령부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서양식 베개와 이부자리가 질서 없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곧 간호군병 두세 명이 들락거리며 방안을 정리했다. 군단장은 그들을 향해 “이봐, 차를 가져와.”하고 소리쳤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동족이 동족을 서로 죽이고 짓밟는 이 잔인무도한 전쟁에서 우리 민족은 소련과 미국의 허수아비요, 꼭두각시처럼 여겨졌다
내겐 “아버진 어떻게 지내느냐?”하며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네, 좋습니다.”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 즉시 중대장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자기는 그런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며 군 정치보위부에 전화연락을 취해 문의했다. 상대방도 소련에서 파견된 사람인 듯 그들의 대화는 모두 러시아어로 이루어졌다. “그가 누구냐?” “저희중대 중대장입니다.” “더는 중대장이 아니다.” “그럼?” “군 비밀재판에서 처리됐다.” “처리되다니요?” “형을 받았다. 반동이야. 그런 인간은 우리 군에 필요 없다.” “아닙니다. 반동이 아닙니다.” “너, 제 정신이냐? 반동을 동정하는 거냐?” 군단장의 얼굴색이 금세 변해, 나를 보는 시선이 날카롭고 매서워졌다. “그 문제는 더 얘기말자. 네가 이왕 여기 왔으니 말인데, 군단에 연예 대를 조직해라. 전쟁에 지친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줄 연예대의 조직이 시급하다. 네 계급도 중대장으로 진급시켜 주마. 정치부군단 군중문화지도원으로 말이다.” “글쎄요...” “군대에선 글쎄 란 말이 없다. 빨리 내 명령을 접수하라.” 그는 또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다시 러시아어로 통화했다.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동족이 동족을 서로 죽이고 짓밟는 이 잔인무도한 전쟁에서 우리 민족은 소련과 미국의 허수아비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의 주도권은, 최고명령계통은 철저히 이방인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나는 새삼스럽게 조선인의 가면을 뒤집어 쓴 철저한 소련인 김철우에 대해 맹렬한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한 마리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였다. “난 너를 전선의 대포 밥에서 구해 후방사업으로 돌리려고 하는데 딴 생각은 말아라. 전임 중대장 말을 더 이상 꺼냈다간 네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 옛 정을 생각해서 또 네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니 꼭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바란다.” 그때 명랑한 표정의 중년 소좌 한명이 나타났다. “군단장 동지! 명령대로 인민군 협주단 부단장 박한무 대령했습니다.” “됐다. 바로 이 애에게 군중문화사업을 맡기도록!” “옛!” 나는 박한무 소좌를 따라 나섰다. 그는 나를 종군작가들이 파견돼 있는 토굴로 데리고 갔다. 그곳엔 유명한 작가 윤세중선생이 머물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윤세중 선생과 한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원고지에만 파묻혀 지냈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윤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님! 무슨 작품을 쓰십니까?” “응… 역사소설인데 홍경래 난을 다룬…” 그는 간단히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종군작가로서 오늘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쓰는 게 아니라 과거 역사인 홍경래 난에 대해 쓰는 것이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됐다. 나는 곧 군악대를 박한무에게서 접수했다. 그리고 거기에 바이올린에 있는 것을 보고 즉시 김종호에게 알려 그를 오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각 연대와 사단에서 배우를 모집하여 연극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원은 우선 10명 정도로 구성했다. 공연을 하기 위해선 대본이 있어야했다. 내가 직접 희곡을 쓰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희곡 제목을 1121고지를 소재로 쓰려 했으나 적당한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고민했다. 그러다 새로운 주제를 찾던 중 문득 전쟁에 남편과 아들 셋을 빼앗긴 어머니의 비극적인 모습이 영감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한번 영감이 떠오르자 나는 신들린 듯 원고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내가 보아왔던 희곡과는 전혀 다른 구성으로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대담한 시도를 하기로 했다. 잿더미로 변해버린 집터에 주저앉아 넋을 잃은 어머니에게 이미 전쟁터에서 죽은 남편과 3명 아들이 차례로 나타나 자기가 죽은 까닭은 어머니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전쟁과 죽음, 폭격과 총소리, 비명소리에 익숙해져 있던 내 귀에 전혀 새로운 음의 소리…새가 지저귀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음악이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고양시키는지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집필에 몰두하고 있을 때 김종호가 군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의 앞에 바이올린을 내놓았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물끄러미 바이올린을 바라보더니 거칠어진 자기의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 설마 이것과 다시 만날 때까지 내가 살아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그리곤 지그시 눈을 감고 음을 고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소 흐트러진듯하던 음색이 차츰 신비스럽고 황홀한 음색으로 이어졌다. 전쟁과 죽음, 폭격과 총소리, 굉음, 비명소리에 익숙해져 있던 내 귀에 전혀 새로운 음의 소리가 열리고 있었다. 새가 지저귀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음악이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고양시키는지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와락 김종호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자넨 정말 위대한 음악가네. 난 오늘에야 비로소 음악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의 황폐한 정신을 위로해 주는 예술이란 걸 발견했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넌 훌륭한 음악가다. 이제부터는 군 연예대에서 일해라.” “난 중대로 돌아가겠습니다.” “거긴 왜? 거기서 넌 미친 사람, 바보 취급만 받지 않았느냐?”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난 이해하기가 힘들군.”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생사의 고비를 숱하게 넘었습니다. 노래를 모르고 살아온 그들에게 진정한 음악이 무엇인지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날 밤, 내 사회로 음악회가 열렸다. 김종호는 이제껏 중대원들이 보아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위대한 예술가로 그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신중하고도 열정적으로, 때로는 신들린 듯이 바이올린 활대를 움직이며 아름다운 운율을 만들어냈다. 그날 밤의 그는 영락없는 음의 마술사였다. 한없이 신비롭고 환상적인 멜로디로 기나긴 전투에 지칠 대로 지친 전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고 다시 폭발할 듯 커졌다가는 흐느끼는 듯 떨리던 바이올린 소리가 장내에 퍼졌다. 그날 음악회가 끝나면서 전선의 밤공기는 전사들의 우렁찬 박수와 환호소리로 뒤덮였다. 대단한 반응이었다. 김종호는 이날 이곳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 <저작권자 ⓒ 통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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