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들 언제든 즐거운 수다 떨며 고향음식 나누는 사랑방 될 것”

권나현 북한음식전문점 ‘함경도아지미’ 대표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7/01 [23:55]

“탈북민들 언제든 즐거운 수다 떨며 고향음식 나누는 사랑방 될 것”

권나현 북한음식전문점 ‘함경도아지미’ 대표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1/07/01 [23:55]

 

 

(통일신문 = 림일 객원기자)


평양출신인 기자가 25년 전 쿠웨이트 건설현장을 거쳐 서울에 와서 식탁을 마주하며 놀랐다. 무더운 한 여름에도 삼시세끼 배추김치를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평양시민들이 추운 겨울에만 먹어보는 귀한 배추김치이다.

그 비밀은 ‘냉장고’에 있었다. 평양시 가정용 냉장고 보급률은 20% 안팎, 그것도 정전이 반복되니 제 기능을 잘 못한다. 서울의 냉장고 보급률은 100%이다. 거기에 정전 되는 날이 전혀 없으니 1년 내내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남북이 분단되어 76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의 경제수준은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남한의 1/50에도 못 미치는 지경에 있다. 이러한 경제적 차이가 음식문화의 변화까지 가져오고 있다.

오랫동안 이어 오는 민족전통 음식은 잘 보존되어야 한다. 남한에 온 3만 탈북민은 어쩌면 북한음식 보존자, ‘명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에서 북한음식전문점 ‘함경도아지미’를 운영하는 권나현 대표를 만났다.

 

-‘함경도아지미’를 소개해 달라.

‘아지미’는 ‘아줌마’의 함경도 표현이다. 남한에 온지도 벌써 20년이 다가온다. 솔직히 통일이전까지 북한에서 후배들은 계속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네 일상에서 음식은 사람의 건강 및 삶과 관련해서 매우 귀중한 부분이다. 2020년 12월, 서울시 강서구 마곡동 신도시에 북한음식전문점 ‘함경도아지미’를 개업했다. 지하철 5호선 마곡역 5번 출구에서 5분 거리에 있다.

 

- 먼저 소개하고 싶은 메뉴는 뭔가.

김치다. 김치는 모든 음식상에 다 오르는 대표적인 민족음식이다. 남한의 김치는 양념이 너무 강해서 무·배추 맛이 다소 퇴색된 것이 단점이다. 함경도식 김치는 싱싱한 배추를 잘 절여서 적당한 각종 양념으로 맞추기에 맛이 다르다. 

내가 직접 담그는 우리 가게 김치는 향기가 깊은 독특한 맛을 가졌다. 고춧가루를 잘 풀어서 양념을 만들었기에 눈 맛부터 다르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에도 좋다”는 말이 있듯이 음식은 무엇보다 눈 맛이 우선이다. 남한 깍두기는 진한 소금물과 사이다로 절여 다소 사각사각은 하지만 무의 고유한 맛은 없다.

 

‘아지미’는 ‘아줌마’의 함경도 표현…남한에 온지 20년

메뉴는 ‘아바이순대’…북한식으로 돼지 창자, 피, 찹쌀,

야채, 고기 등 16가지 재료로 만들어 맛이 최고로 좋아

남한순대는 찹쌀대신 당면 등 재료는 북한순대의 절반

 

- 음식 몇 가지를 소개해준다면.

일명 ‘아바이순대’로 불리는 북한순대이다. 돼지 창자와 피, 멥(찹)쌀, 야채, 고기 등 16가지의 재료로 만들어 향기는 물론 맛까지 최고의 일품이다. 남한순대는 찹쌀대신 당면을 넣고 하는데 재료는 북한순대의 절반 정도 든다.

다음 ‘가자미식혜’와 ‘명태식혜’다. 북한‘식혜’는 물고기와 무를 5:5비율로 초장양념에 삭힌 것을 말한다. 신선한 생선은 기본이고 양념비율이 핵심이다. 남한에서는 엿기름물에 삭은 밥알이 동동 뜬 음료수를 ‘식혜’라고 한다.

 

- 함경도 돼지국밥은 어떤 음식인가.

손님들이 많이 찾는 음식이다. 진하게 우려낸 돼지 뼈 국물에 살코기와 두부, 빨간 양념장을 고명처럼 넣은 탕이다. 두부도 가게에서 직접 만든 것을 사용하며 모든 재료는 하루만 지나도 사용하지 않는다. 남한의 돼지국밥은 돼지 머리고기, 내포 등을 넣은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돼지내포국’이다.

 

- 음식 제조의 특별한 비법이 있는가?

무엇보다 재료를 신선한 것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야채나 다른 재료도 마찬가지이지만 식혜의 주 재료인 생선에 한에서는 더욱 그렇다. 얼마나 신선한 것으로 사용하는가 안하는가에 따라 만들어진 음식 맛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홀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탁 트인 주방을 갖춘 것도 특별하다.

 

- 영업(판매) 현황이 궁금한데 밝힐 수 있는가?

위에 소개된 메뉴 말고도 현재 우리 가게에서 꾸준히 만드는 음식은 평양온반, 인조고기밥, 함경도찐만두, 짝태볶음, 강냉이(옥수수)국수, 회령감자전 등 18가지이다. 하루 매출 음식 중 절반 이상은 인터넷으로 주문 판매되고 있다.

가게로 찾아오는 손님은 적으면 20명 안팎, 많을 때는 100여명도 된다. 손님들 중 절반 정도가 탈북민들이다. 인터넷과 SNS 그리고 입소문을 듣고 멀리 지방에서도 찾아오는 고객들이 있다. 그분들에게는 그냥 감사할 따름이다.

 

진하게 우려낸 돼지 뼈 국물에 살코기와 두부

빨간 양념장을 고명처럼 넣은 탕이 돼지국밥

두부도 가게에서 직접 만든 것을 사용하며

재료는 하루만 지나도 사용하지 않는 것 비법

 

가게에서 꾸준한 음식은 평양온반, 인조고기

함경도 찐만두, 짝태볶음, 강냉이(옥수수)국수

회령감자전 등 18가지…하루 매출 음식 중 절반

이상은 인터넷으로 주문 판매될 정도로 인기 높아

 

- 고향이 어디인가.

1959년 1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5남매의 맏이였고 아버지는 함경북도농촌경영위원회 처장, 어머니는 모건설사업소 부기장이었다. 1978년 청진경제전문학교(2년제) 부기과를 졸업하고 청진농업설계사업소 예산원으로 배치 받았다. 2년 뒤 아버지가 회령시 농촌경영위원회 위원장으로 승진하면서 회령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이후 회령시 상업관리소 식료상점 판매원으로 근무했다.

 

- 특별히 기억되는 일은 뭔가.

아버지가 시(市)농촌경영위원회 최고 간부였으니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명절에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아래 단위 간부들로부터 뇌물(쌀, 육류, 과일 등)을 많이 받았다. 우리 집에서는 한 달이 멀다하게 위원회 간부들의 회식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부터 어머니의 일손을 도와 음식을 만드는 일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1959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5남매의 맏이

아버지는 함경북도농촌경영위원회 처장

청진경제전문학교(2년제) 부기과를 졸업

청진농업설계사업소 예산원으로 배치 받아

 

- 80년대 인민들 생활수준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당시는 국가에서 인민들에게 식량배급을 다소 정상적으로 주었다. 어른은 700g, 학생은 400g, 아동은 200g의 식량(쌀·옥수수)을 공급했다. 옷과 신발, 비누, 치약 등 생활용품이 충분하지는 않아도 가구별, 인원수 별로 분배되었다.

식료상점에는 간장·된장, 기름(식용유)이 떨어지지 않았고 사탕·과자, 물엿 등이 매점에 가득했다. 물고기 철에는 상점 마당에 물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잘 사가지 않았다.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사과, 배, 토마토 등 많은 과일이 상점에 들어왔고 인민들에게 골고루 공급되었다. 회령의 특산물은 백살구다. 시외 주변 농촌지역에는 집집마다 백살구 나무를 많이 심고 키운다. 상업관리소에서는 오이, 가지, 양배추, 호박 등 계절에 나오는 남새(야채)도 시민들에게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상 공급했다.

 

- 당시 풍족한 생활의 이유는 뭐라고 보나?

그때는 북한의 동맹인 소련(현 러시아) 및 구라파 사회주의나라들의 충분한 원조를 받아 나름대로 공장, 기업소, 광산 등이 잘 돌아갔다. 북한의 웬만한 대형기업소(남한의 대기업) 등에서는 수입원료 자재를 많이 사용한다. 1980년대 말 구라파 사회주의나라들이 간판을 내리면서 북한이 받던 원조도 모두 끊기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0년대 북한에 각종 자연재해가 몰아쳐 고난의 행군시기를 겪었다.

 

- 이후 경력은 어떻게 되는가.

23살에 결혼을 해서 아이 2명 낳고 한동안 주부로 있었다. 이후 회령남새직매점 부기(회계)원으로 취직하여 14년간 성실하게 일했다. 직매점은 회령시 여러 협동농장들에서 야채를 넘겨받아 인민들에게 공급하는 상업기관이다.

1980년대 후반 경부터 북한 전역에 ‘직매점’이 많이 생겼다. 예전에 국가기관(시행정위원회)에서 조정하던 농촌과 도시간의 상업거래를 해당 단위(상점과 농장)들에서 직접적으로 거래하라는 새로운 방식이나 크게 효과는 없었다. 북한에서는 노동당에서 무엇을 하라고 하면 그것이 옳든 그러든 무조건 따라야 한다.

 

80년대 식료상점에 간장·된장, 기름 등 풍족

사탕·과자, 물엿 매점에 가득…물고기 철에는

상점마당에 물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을 정도

인민들에게 식량 정상적으로 배급했다고 기억

 

- 근로업무 중에 편법도 있을 것 같다.

연말 농장서는 직매점에 많은 농산물을 납품했다고 ‘가짜 영수증’을 청탁한다. 상급기관(농촌경영위원회)의 추궁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뇌물(농산물)을 바치며 하는 부탁이다. 경우에 따라 야채 1톤이 10톤으로 둔갑되기도 한다.

또한 시행정위원회 상업과, 시은행 재정과 등에서 검열을 나온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눈감아 달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결국에는 도(道)와 중앙에 허위로 보고가 되는 것이다. 사실대로 하면 모두 처벌감이다.

 

- 탈북 경위는 무엇인가.

남편은 항상 “기회가 되면 중국 친척집에 가서 경제적 도움을 청하고 싶다”는 말을 외웠고 언젠가 모습을 감추었다. 애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아버지 ‘행방불명’ 딱지가 난처했다. 하여 중국 가서 남편을 찾으리라 마음먹고 1999년 7월 탈북했다. 화룡에서 한 달간 담배 따기를 했고 이듬해 공안 단속으로 북송되었다.

온성군 보위부에서 며칠간 조사를 받고 비교적 경범처벌로 온성군 안전부 산하 노동단련대에 갔다. 만약 조사에서 “중국에 있을 때 기독교를 접하였고 남조선 사람을 만난 일이 있다”는 등 죄목이 심하면 도(道) 보위부로 이송된다. 단련대서 수개월간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석탄 나르기, 퇴비 옮기기, 동물사료 주기 등의 고된 노동을 하였다. 이후 출소하여 한동안 공산품(옷, 신발, 담배 등) 장사를 했다.

 

- 재 탈북은 어떻게 했나.

수개월간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설령 중국으로 가서 남편을 찾아온다고 해도 북한에서는 ‘도강자’ 딱지가 붙어 아이들의 장래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았다. 북한은 인민들에게 ‘꼬리표’(이력서)가 평생 따라붙는 사회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온 가족이 탈북을 하자고 결심을 했다. 일단은 내가 먼저 탈북하여 중국에 은신처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2001년 11월 어느 날, 깊은 밤 경비대군인에게 뇌물을 주고 국경을 넘었다.

 

온 가족이 탈북 하자고 결심 내가 먼저 탈북

중국에 은신처를 마련하는 것 우선이라고 판단

2001년 11월 경비대군인에 뇌물주고 국경 넘어

 

- 중국에서 어떤 생활을 하였는가.

도문에서 4개월간 남편을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돈을 벌어 북한에 남겨진 아들과 딸을 안전하게 탈북시켰다. 어느 날 남편 등 4식구가 모두 모이게 되었다. 이후 남한으로 가는 비용을 마련하려 식당일을 했다. 아이들은 중국말을 모르니 농촌에 숨어있어야 했고 남편과 나는 온갖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돈을 벌었다.

중국공안은 탈북자 신고자에게 5천 위안 포상금을 준다. 그러니 어디에도 발붙이기 힘들었다. 여름에는 밖에서도 잤는데 겨울에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노숙생활을 하였다. 2003년 5월 태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 남한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어떤 일인가.

탈북민 단체들에서 워크숍이나 행사를 할 때면 고향음식을 만들어 제공했다. 적을 때는 수 명분, 많을 때는 수십 명분의 식사를 무료로 보장했다. 많은 탈북민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고향의 어머니 손맛이 깃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고 할 때가 제일 기쁘다. 앞으로 몇몇 탈북 독거노인에게 반찬을 해드리려고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 추억이 더욱 간절해지고 고향의 향수도 깊어진다. 특히 입맛이 그렇다. ‘함경도아지미’ 가게는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라 우리 탈북민들이 언제든 와서 즐거운 수다도 떠는 ‘고향사랑방’ 이기도 하다.

 

탈북민 단체들에서 워크숍이나 행사를 할 때

고향음식을 만들어 제공…적을 때는 수 명분

많을 때는 수십 명분의 식사를 무료로 보장

“고향어머니 손맛 깃든 음식 맛있게 먹었다”

할 때 제일 기뻐…탈북 독거노인에 반찬제공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나이 예순을 넘겨 살아보니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 라는 것이 더욱 실감난다. 아무리 젊음이요, 명예요, 돈이요 해도 건강만 못하다. 누구든 건강해야 가족도 있고, 사회도 있고 또한 우리의 소원인 통일도 있는 것이다. 

자유의 땅, 남한에서 행복을 누리는 우리 탈북민들이 모두 건강해서 꼭 통일의 그날 금의환향을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다시 만나는 가족형제들에게 속죄하는 가장 진실한 모습일 것이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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