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북침조차 제대로 모르는 한국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 좌파성향 정부일수록 친일파 범위 확대 해석

송광호 기자 | 기사입력 2021/06/15 [23:14]

“6·25전쟁, 북침조차 제대로 모르는 한국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 좌파성향 정부일수록 친일파 범위 확대 해석

송광호 기자 | 입력 : 2021/06/15 [23:14]

 


1945년 해방되던 해 김일성은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8.15 해방직후 그가 평양에 등장했을 때 북녘주민들은 태극기아래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당시 3년간의 신탁통치 실시로 소련군정(스티코브 중장)이 시작됐을 때다. 미국과 소련군대가 3,8선 남북에 진주하면서 무척 어수선한 시대였다. 김일성은 당시 북한 통치권자로 군림한 소련장군들 승인아래, 뒷전에서 자신의 위상굳히기에 바빴다.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가정환경이 좋았던 집안들 대부분

친일파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남한은 남한대로 미군정(하지중장)아래 정부 안정이 쉽지 않았다. 소련과 미국 두 군정사령관의 군 경력이나 성향은 사뭇 달랐다. 미 하지중장이 전형적인 직업군인으로 남한을 책임 맡은데 비해, 소련 스티코프는 정치군인으로 주민통치방법에 극명한 차이점을 보였다.

소련군정은 김일성을 앞세워 강압적인 정치세력을 펴 나갔고, 서울에서는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 당대 국내지도자로 꼽히던 제1정객들이 잇달아 암살당하는 대 혼란기 속에서 결국 이승만 단독정부가 세워졌다.

해방 후 비록 나라는 독립국가가 됐으나, 이제는 동족끼리 ‘이념문제’ 갈등으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비극이 연거푸 일어난 것이다. 이는 일제시기 강우규, 이봉창, 안중근 의사 등 일본을 겨냥한 민족의거가 아닌 우리 남과 북만의 뼈저린 아픔이었다.

해방 후 이러한 혼탁한 시대에 태어나 서울에서 6.25를 겪으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늘 “사람 사는 생활환경이 일제시대 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던 것이 기억난다. 부모고향 뿌리가 북한 대지주 집안이고, 남북이 3.8선 둘로 갈려 있으니 더욱 그런 주변얘기들이 회자된 듯싶다.

1970년대 중반 캐나다로 이주해 그 뒤 한국교육실정을 잘 몰랐지만, 나중 보니 6.25전쟁의 남침, 북침조차 제대로 파악 못하는 한국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 20-30대 청년기 나이일수록 더욱 깜깜이었다. 학창시절 배운 역사교과 내용이 언제부터 한국 젊은이에게 그렇게 달라지고, 실종돼 있는지 몰랐다. 좌파성향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육과정이 조금씩 달라져 간 것인가.

또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가정환경이 좋았던 집안들은 대부분 친일파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 국어교과서에 글을 실었던 이광수, 최남선은 친일파로 낙인찍혀 교재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어느 정도 근거와 잣대에 따라 취해진 교과과정이겠지만, 좌파성향 정부일수록 친일파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놓은 것 같았다.

한때 특파원 활동을 했던 러시아에 북한관련 자료 등이 많았다. 90년대 초반 모스크바에는 북한 한의사(고려의학) 2명이 상주해 의료 활동을 했다. 나도 두세 번 진료를 받은 적이 있다. 북한에서 파견된 미술관계자들도 모스크바에 거주했다. 그들은 시내 미술관 전람회장을 빌려 1년 내내 조선(동양)화 그림 등을 판매했다.

러시아 남쪽지역엔 북한 건설노동자들 수백 명이 있었고, 극동지역에는 시베리아 북한벌목공이 기천명이상 일했다. 카자흐스탄 알마아타 국립대학에도 북한교수가 파견돼 있었다. 나는 지난 1980년대부터 북한인을 일찍 접한 경험이 있어, 북한사람을 마주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다 같은 동족일 뿐이었다.

 

국어교과서에 글을 실었던 이광수,

최남선 친일파로 낙인찍혀 교재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한번은 라 기자가 해방 후 몰랐던 북한사건을 알려주었다. 나중 해당인물 사진(첨부)도 건네주었다. 1946년 3,1절 김일성 연설당시 발생한 김일성 암살미수 수류탄사건이다. 또 궁금했던 월북 작가 상허(호) 이태준(1904-?)에 관한 일부 얘기도 들려줬다.

이태준은 문학계에선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라고 일컫는 대표적인 한국근대문학 작가다. 이태준의 월북이후 소식이 완전 끊어진 마당에 일부 족적을 알게 됐다.

북한 3.1절에 발생한 김일성암살 미수사건부터 간략히 전한다. 1946년 3월1일 해방 다음해다. 평양역전 광장에는 3.1절 행사를 위한 군중대회가 오전부터 열리고 있었다. 해방 후 두 번째의 대규모 군중대회다. 북한주민들은 금의환향한 젊은 ‘김일성장군’ 장악아래 공산정부체제를 확립해 나가던 시기였다. 김일성이 단위에서 기념식 대표연설을 끝냈을 때, 갑자기 조그만 폭탄(수류탄)하나가 날아들었다.

주위에는 소련군 보초들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단 앞에 서 있던 경비간부인 소련 노비첸코(Novitchenko) 소위가 곧 이를 발견해 주웠을 때 수류탄이 터졌다. 폭음과 함께 소련소위는 오른팔이 달아나고, 몸과 눈에 상처를 입는 등 중상을 입었다. 그나마 경비소위가 구사일생 살아남은 것은 가슴 속에 넣어 둔 책이 보호막 역할을 했다한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18세의 ‘김형집’ 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곧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형 돼 처형당됐다고 전해졌다. 해방 후 북한에는 ‘백의사’라는 반공우익의 비밀결사단체가 있었고, 김형집은 이 단체멤버였다. 이 백의사는 신익희 등 임정요인들이 관련해 결성됐다고 한다. 6.25전쟁이전 남쪽 켈로(KLO) 부대처럼, 남과 북에는 이념으로 갈린 좌우세력이 극한대립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울 때였다.

 

 

 

김일성이 단위에서 기념식 대표연설을

끝냈을 때, 갑자기 조그만 폭탄 하나가

날아들었다

 

김일성은 그때 자신을 구한 야콥 노비첸코 소위를 잊지 않았다. 김주석은 북한정부가 자리 잡은 훗날인, 지난 1984년 소련방문 때 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에 거주하는 노비첸코 집을 방문했다. 그때 ‘노력영웅’ 칭호를 주고, 북한에 국빈자격으로 여러 차례 그 가족을 초청했다. 러시아 북한공관을 통해서도 매년 선물 등을 전달했다. 김일성주석과 구소련시민 노비첸코 와의 관계는 후대 김정은 대까지 이어졌다. 2019년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은 “김정은 위원장 명령에 의해 북한대사관은 노비첸코 생일기념으로 그의 무덤에 헌화하고, 고향 집 뜰에 우호의 나무로 사과나무를 심었다”고 보도했다.

나는 그때 북한 라웅걸 기자가 알려준 수류탄사건을 처음 알았고, 나중 모스크바에서 만난 고려인 박길룡(전 북한 외무성간부)노인이 사실임을 확인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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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도 만포방사공장 노동자들 휴식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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