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들 봉사활동은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한 부분이죠”

김혜성 탈북민단체 ‘하나봄봉사단’ 단장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6/04 [01:51]

“탈북민들 봉사활동은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한 부분이죠”

김혜성 탈북민단체 ‘하나봄봉사단’ 단장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1/06/04 [01:51]

 


남한사람들이 북한사회에 대해 궁금한 것 중의 하나가 ‘북한에도 봉사활동이 있을까?’이다. 북한사회도 분명 일상에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 꼭 있을 것 같다며 궁금해 하기도 한다.

 

북한은 수령을 절대적인 신(神)격화로 숭배하는 나라이다. 수령이 다녀간 곳은 ‘혁명성지’ 혹은 ‘사적교양지’로 된다. 그 곳을 매일 닦고 쓰는 일을 ‘정성작업’ 이라고 하며 이것이 곧 북한주민들의 봉사활동이다. 이는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것으로 간주되기에 주민들은 단체 혹은 개별적으로 성실히 참여하고 있다.

개인이 알게 모르게 주고받는 물건(상품, 기념품)에 대해서는 ‘선물’ 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미개한 사회에서 살던 탈북민들은 남한에 와서 ‘봉사활동’을 보며 사뭇 신기해하고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를 한다. 

서울 양천구에서 탈북민단체인 ‘하나봄봉사단’ 김혜성 단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하나봄봉사단’단체를 소개해 달라.

2020년 10월에 봉사정신이 투철한 탈북민 20여 명이 주축으로 설립한 탈북민단체이다. 목적은 탈북민들이 남한에 입국해서부터 받아 안은 정부의 많은 배려에 나라사랑, 이웃사랑 봉사활동으로 조금이나마 보답하자는 것이 단체의 설립 취지다.

우리 단체는 탈북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탈북노인들이 북한사투리로 인해 경로당, 복지센터 등에서 남한 노인들로부터 ‘왕따’를 많이 당한다. 우리가 북한음식을 만들어 자주 찾아가 말동무, 청소도 해준다.

 

- 그동안 주로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

작년 추석 탈북민 독거노인 60가구에 과일과 만두를 선물했다. 이럴 때에는 가급적이면 탈북민이 운영하는 사업체에서 생산한 제품을 이용한다. 

우리 탈북민들에게 음력설과 추석은 그야말로 눈물과 한숨의 시간이다. 두고 온 고향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부모형제, 자식들을 생각하면 쌀밥이 목에 넘어가지 못하니 말이다.

10월에는 임진각, 한강공원 쓰레기수거 봉사활동을 벌렸다. 현장에서 구슬땀을 흠뻑 흘리면서 보람찬 노동을 하는 그 순간이 최고로 행복하였다. 11월에는 탈북민 가정 100가구에 ‘사랑의 김치’ 100박스를 선물로 보내주었다.

 

2020년 탈북민 20명 주축으로 설립한 단체

목적은 남한에 입국해서부터 받게 된 정부의

배려에 봉사활동으로 나라와 이웃사랑 보답

 

이웃 독거노인 60가구에 과일과 만두를 선물

가급적 탈북민 사업체에서 생산한 제품 이용

임진각, 한강공원 쓰레기수거 봉사활동 벌려

현장에서 구슬땀 흘리는 그 순간 최고로 행복

- 또 다른 봉사활동도 있었는가.

올해 2월에는 맛있는 국수 60세트를 구입하여 새내기 탈북민가정에 후원하였다. 작년부터 코로나19로 경제상황이 많이 어려워진 현실에서 새내기 탈북민들의 남한정착은 쉽지만은 않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일은 무엇이든 찾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에는 서울탑골공원에서 현지 노숙자들에게 떡 나눔 봉사를 했다. 지역사회 장애인을 위한 공연 및 목욕봉사 등 여러 가지 활동계획도 준비하고 있다.

 

- 탈북민은 봉사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우리 탈북민들에게 봉사는 새 삶의 터전인 대한민국에 와서 정부나 국민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받은 만큼의 사랑을 사회의 환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 함께하는 모습은 후배들에게도 다소 귀감이 될 것이다.

봉사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합심이다. 서로 믿어주고 이끌어주며 부족한 것은 채워주고 모르는 것은 배워주는 것이다. 노력은 반드시 성공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 아름다운 봉사활동이 빛나는 것이다.

 

봉사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합심

서로 믿어주고 이끌어주며 부족한 것은

채워주고 모르는 것은 배우도록 하는 것

노력은 반드시 성공을 낳는다는 말 있듯

누군가의 희생으로 봉사활동이 더 빛날 듯

 

- 고향이 어디인가.

1975년 5월 양강도 대홍단군에서 태어났다. 오빠와 남동생이 있다. 아버지는 무산목재일용품공장 초급당비서(당간부), 어머니는 읍탁아소 보육원(교사)이었다. 1995년 8월 대홍단농업전문학교 수의축산과(3년제)를 졸업하고 대홍단국영농장 신흥분장 수의사로 배치를 받았다. 원래는 도(道)급 방역기관에 가고 싶었으나 현실체험 몇 년 경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혜산농림대학(4년제)은 통신으로 졸업하였다.

 

- 신흥분장 수의사로 배치 받은 대홍단국영농장은 어떤 곳인가?

국영농업기업소로 감자, 밀, 보리, 들쭉 등을 재배하며 북한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 6·25전쟁 이후 김일성의 교시로 생겼고 1970년대 후반부터 축산업도 한다. 공식명칭은 ‘대홍단군종합농장’인데 보통 ‘국영농장’으로 부른다.

대홍단군 인구의 85%가 대홍단종합농장 노동자(출퇴근을 하며 월급, 식량배급을 받는 사람)들이다. 종합농장 산하에는 읍분장, 개척분장, 삼봉분장 등 10여개의 분장이 있으며 한 개 분장에 속한 노동자는 대략 150~300명이다.

 

- 근무했던 돼지목장의 현황과 수의방역 실태는 어떤가?

돼지 300~500마리 규모의 목장이다. 언젠가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정일이 지시로 신흥분장 돼지목장을 현대화로 개량하게 되었다. 노동자는 60~70명, 수의사는 나까지 3명 있었다. 허나 중국과 다른 점이 있었다. 중국은 24시간 전기가 들어오고 돼지사료는 옥수수를 사용한다. 북한은 전기가 5~6시간 정도 오고 사료는 두박(기름을 뽑아낸 콩 찌꺼기) 혹은 발효된 감자찌꺼기에 풀을 섞어 끓여 사용한다.

수의방역은 우선 목장에는 정전이 자주 되다보니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돈사는 항상 불결한 상태에 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온갖 세균덩이, 곰팡이, 오물 등이 난무하다. 분뇨처리장은 물론이고 병들어 죽은 돼지 처분장도 목장 안에 있다.

목장에서는 평균 1년에 한 번 정도 대형 방역사고가 발생한다. 주로 돼지열병(장티브스), 발족이 섞어드는 병 등이다. 방역사고가 났다하면 보통 50~60마리의 돼지가 폐사된다. 간혹 합숙생들이 매장된 돼지를 몰래 파서 먹기도 한다. 주로 뒷다리 부위를 가져와 깨끗이 씻어서 반드시 끓여 먹는데 아무런 탈도 안 난다.

 

대홍단군 인구 85%가 대홍단종합농장 노동자

종합농장 산하에 읍분장, 개척분장, 삼봉분장

10여개 분장이 있으며 노동자는 150~300여명

 

- 당시 대홍단군 인민들의 식량 사정이 궁금하다.

다른 지방과 달리 대홍단군에서는 고난의 행군시기(1990년대 중후반)에 굶어죽은 사람이 없었다. 이유는 식량(쌀·옥수수) 배급을 못 받는 대신 가을에 감자라도 받았기 때문이다. 1년분 식량의 5~6배 정도 되는 감자를 꼭꼭 받았다.

집집마다 몇 톤씩 되는 감자를 저장움(야외에 있는 지하창고)에 두고 1년 내내 먹는다. 당시 주변지역 일부 사람들은 국영농장 주변에 천막을 치고 며칠씩 묵으면서 다 캐낸 감자 밭을 다시 헤치면서 쭉정이 감자를 찾기도 했다.

 

- 그 광경을 본 심정은 어떠했나?

다소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대홍단군과 인접한 함북 연사군, 무산군 등의 인민들은 식량배급을 못 받아 굶주리며 노약자들이 아사되고 있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래도 우리는 감자고장에서 살고 있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고 타 지역 인민들보다는 몇 배나 행복함을 느꼈다. 굶주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당에서 받은 강연내용대로 모든 불행과 고통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의 제재책동 때문인 줄 알았다.

 

- 또 다른 경력도 있는가?

1997년 2월부터 국영농장 노동자주택을 전문 건설하는 대홍단건설사업소 경리(통계)원으로 재직했다. 종업원 230명 중 90%가 남자이다. 사업소에 일감이 많지 않아도 직원들은 출근해서 사회노동이라도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식량배급표를 받을 수 없다. 식량배급표는 가을에 감자와 바꿔주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것이다.

 

- 사회노동은 어떤 것이고, 중국 장사꾼들이 왜 그런가?

중국 수출(매매)용 나무를 벌목하려 노동자 수십 명씩 조를 형성해 산림현장에서 일을 한다. 온종일 벌목한 수백 입방의 나무는 며칠 뒤, 중국 장사꾼들이 10톤 화물차 20~30대(2~3대에는 밀가루를 적재함)를 가져와 실어간다.

정말 헐값으로 넘겨지는 북한의 목재이다. 우리가 너무 아쉬워 “조금이라도 밀가루를 더 달라”고 요구하면 중국 상인들은 도끼눈을 하고 실은 나무도 다 부려놓고 가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면 우리는 “미안하다!”고 사죄한다.

한마디로 조선(북한)사람을 업신여겨서다. 중국에 흔한 밀가루를 없어 못 먹는 조선인들이니 얼마나 우습게보겠는가. 아마 속으로 노예처럼 보았을 것이다. 벌목 현장과 민가지역의 거리는 화물차를 타고 다닌다. 언젠가 적재한 나무가 우르르 쏟아지면서 여러 명의 노동자가 나무에 깔려 죽거나 중상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 탈북 동기는 무엇인가.

내가 23살 때 부모님은 2년 사이에 모두 질병으로 사망하셨다. 평시 영양상태가 나쁘니 질병에도 쉽게 걸리는 것이다. 오빠는 군대서 제대하며 대학을 추천받아 왔는데 집 형편이 어려워 난감했다. 

어느 날, 어떤 여인(탈북브로커)이 “중국에 가서 고사리 따는 일을 한 달간 하면 큰돈을 받을 수 있으니 생각이 없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생활이 어려우니 더 고민해볼 시간도 없이 선뜻 응하겠다고 대답 했다.

 

- 중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살았는가.

2002년 6월 두만강을 건넌 곳은 중국 화룡이었다. 여기서 극악 인신매매단에 걸려 반항을 하며 몸부림을 쳤으나 남자브로커들의 발길·주먹질뿐이었다. 길림 화전으로 팔려갔는데 북한서도 못 본 낡고 허름한 심신산골의 농촌 집이었다.

강제로 간 시집에는 시아버지와 남편 등 7명 대식구가 있었다. 어떻게 하나 악착하게 돈을 벌어 고향으로 가려는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3개월 만에 태아가 생겼으니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7년간 있으면서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같은 희귀난치병을 앓던 시형, 시누이와 시아버지까지 사망했고 모두 내 손으로 장례를 치렀다.

 

2002년 6월 두만강을 건넌 곳은 중국 화룡

인신매매단에 걸려 반항하며 몸부림 쳤으나

북한서도 못 본 낡은 농촌 집으로 팔려가

 

탈북여성이 공안에 잡혀 북송된 사실 알게 되고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 끼쳐

그래서 하루빨리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브로커 통해 선을 찾아… 심양, 곤명, 태국 거쳐

5살짜리 딸을 데리고 2009년 1월 한국에 입국

 

- 한국으로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인근에 나처럼 인신매매로 시집와서 살던 어느 탈북여성이 어느 날, 공안에 잡혀 북송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언제인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또한 주변에서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하루빨리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브로커를 통해 선을 찾았다. 심양, 곤명, 태국을 거쳐 5살짜리 딸을 데리고 2009년 1월 한국에 왔다. 이후 남편을 데려오려 했으나 간암으로 사망했다. 기구한 나의 운명이었다.

 

- 사회 직장생활을 공무원으로 시작했다고 하는데.

2009년 6월 하나원(탈북민정착교육기관) 수료 후 대구에 주거지를 받았으며 노동부 산하 대구고용센터 직원채용 면접에 합격하여 탈북민 담당자로 근무하였다. 아이의 교육문제 등을 고려하여 4년 뒤 서울로 올라와서 2015년부터 서울남부고용센터 직업상담사로 재직했다. 이후 2017년부터 2년간 경기도 부천시청 행정과에서, 2019년 7월부터 서울시 양천구청 민원여권과 주무관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

 

하나원 수료 후 대구에 주거지 받아 노동부 산하

대구고용센터 채용에 합격 탈북민 담당자로 근무

7년간 서울과 지방에서 7명 공무원으로 취업시켜

현재 서울 양천구청 민원여권과 주무관으로 근무

 

- 탈북민을 도우면서 기억나는 일은 뭔가?

지난 7년간 서울과 지방에서 탈북민 7명을 공무원으로 취업시켰다. 정보, 공지, 안내 등 도움을 드렸던 것이다. 취업 정보수집, 면접, 입사 등은 남한사람도 어려운 것인데 수십 년을 다른 사회에서 살다가 온 탈북민들은 더욱 힘든 것이다. 탈북민 구인·구직 정보를 탈북민사회 최대 단체 카카오톡 방에도 꾸준히 올려준다.

 

-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다. 사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취업과 생활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북한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다.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먹고 추위걱정 모르고 발편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북한의 2천만 인민들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사람들이다.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최선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열심히 또 열심히 사는 것 밖에는 없다고 본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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