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정신으로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우승 했어요”

[인터뷰] 전향진 최초 탈북민 미스트롯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4/17 [15:40]

“탈북정신으로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우승 했어요”

[인터뷰] 전향진 최초 탈북민 미스트롯

통일신문 | 입력 : 2021/04/17 [15:40]

 


북한에서는 수령(최고지도자)이 직접 지도하거나 관람하는 공연을 ‘1호행사’ 혹은 ‘모심공연’ 이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외모는 기본이고 높은 기량과 수준을 요구하는 ‘1호행사’에 참여한 예술인을 ‘1호’ 가수 혹은 연주자로 부르기도 한다.

 

1970년대부터 사실상 수령이 된 김정일은 유별나게도 영화, 공연 등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동시에 자기 부친(김일성) 우상화에 국고를 탕진했으니 국가경제가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걸었으며 인민들이 서서히 굶기 시작했다.

 

동구권 사회주의나라들이 연쇄 붕괴한 1990년대부터 북한의 시련은 더욱 고조되었다. 김일성 사망, 자연재해 등이 있었고 남한으로 내려오는 탈북자 수는 크게 증가했다. 역설적으로 탈북민이 많이 생긴 것은 김정일의 독재정치 때문이다.

 

목숨 걸고 찾아 온 민주주의사회,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자유시민이 된 3만 탈북민은 자기의 적성과 능력껏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서 과거 ‘모심공연’ 경력을 가진 탈북가수 전향진 씨를 만났다.

 

진행 | 림일 객원기자

 

학교 때 우연히 나의 소질을 발견한

담임선생 조언으로 학교예술소조서 활동

’77년 고등학교 졸업 때 조선인민군협주단

양성전문반 들어가 평양에서 6개월간 합숙

고위층자녀들의 수준과 내 형편 맞지 않아

 

청진 2금속건설연합기업소서 공연예술생활

 

- 고향이 어디인가.

 

1980년 10월 함북 청진서 태어났다. 형제는 3남매의 둘째다. 부친은 제2금속건설연합기업소 기사장, 모친은 청진제2사범대학 교원(교수)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친북단체) 선전부장이었다. 1959년부터 시작된 재일조선인 귀국사업(25년간 조총련계 한국인을 북송시킨 행위) 때 온 가족과 함께 북한에 왔다.

황해도에 있는 OO신발공장은 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통째로 들여와 북한에 기증한 것이다. 그 대가로 해주시인민위원회 근로단체일군을 하시였다. 모친은 1970년대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 가수로 선발되어 영화방송음악단에서 활동했다.

 

- 좀 더 자세히 말해 달라.

 

모친은 그 후 북한의 첫 전문가극단인 ‘피바다가극단’에서 가수로 재직했다. 1971년에 창작되어 공연 시작된 혁명가극 ‘피바다’는 항일무장 투쟁시기 한 시골여인이 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김정일이 영화, 연극, 소설 등으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 가극에서 모친은 조연으로 칠성이어머니 역을 담당했다.

이후 모친은 김정일의 방침으로 창립된 ‘만수대예술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재일교포 출신인 무용수 고용희(김정은의 모친) 씨와 같이 공연했다. 김정일은 고용희의 공연을 보려 시도 때도 없이 극장에 나왔다고 한다.

부친이 평양에서 대학졸업 후 청진에 있는 제2금속건설연합기업소로 배치를 받으면서 모친도 만수대예술단 생활을 접고 청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청진제2사범대학 교원생활을 하면서도 부업으로 아이들의 노래, 악기 지도를 과외로 가르쳤다. 당시 청진의 과외예술 분야에서 우리 어머니를 ‘피바다 선생’으로 몰래 불렀다.

 

- 음악교육을 특별히 받은 적이 있나?

 

모친은 나를 운동선수(예술체조)로, 외모나 예술기량이 나은 언니는 예술을 시키려했다. 중학교 때 우연히 나의 소질을 발견한 담임선생의 조언을 듣고 모친은 생각을 바꾸어 내게 개인교습을 주었고 학교 예술소조에 속해 활동했다.

1997년 여름, 고등학교 졸업 때 모친은 평양의 지인에게 부탁하여 나를 조선인민군협주단 양성전문반에 보내었다. 평양에서 6개월간 합숙으로 동료들과 생활해보니 모두 고위층자녀들의 수준과 내 형편이 맞지 않아 자괴감이 들었다. 이후 청진으로 내려와 제2금속건설연합기업소 선전대에 들어가 공연예술생활을 하였다.

 

‘모심공연’은 한 달 전부터 하루 10시간 이상

맹렬하게 연습… 독창으로 ‘강성부흥아리랑’불러

공연이 끝나고 김정일이 무대로 나와 우리와 함께

기념사진 찍어… 꿈을 꾼 것처럼 벙벙한 느낌 들어

 

- ‘모심공연’을 언제 하였는지 궁금하다.

 

2001년 가을로 기억된다. 청진에 있는 김책제철연합기업소로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나왔다. 그는 수행간부들과 현지 시찰을 마치고 해당부문 예술인들이 하는 공연을 보는 특이한 버릇이 있다. 아마도 그것으로 피로를 푸는 것 같았다.

모친은 당시 김책제철연합기업소 선전대에서 활동을 했는데 제2금속건설연합기업소와 합의하여 내가 ‘모심공연’ 준비차원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모심공연’은 최소 한 달 전부터 하루 10시간 이상 맹렬하게 연습을 하는 게 보통이다.

 

- 김정일 앞에 선 기분은 어떠했나?

 

행사 시작 전 어디선가 요란한 목청이 들렸는데 분명 김정일 앞에서 큰 소리 칠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 소리 듣고 약간 긴장되었다. 나는 여성독창으로 ‘강성부흥아리랑’을 불렀고 김정일은 “재청!”(앵콜) 이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어서 부른 노래는 ‘오직 한마음’이다. 공연이 끝나고 김정일이 무대로 나와 우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잠시 꿈을 꾸었던 것처럼 벙벙한 느낌도 다소 들었던 것 같다.

 

- 1호 가수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어떤 것인가?

 

공연을 마치고 김정일의 선물로 첫날옷감(결혼할 때 여자가 입을 한복을 지을 천)을 받았다. 남자들은 양복지(옷감)를 받았다. 선물은 형식이고 중요한 것은 “김정일 장군님 모시고 진행한 1호 공연에 참가한 예술인” 이라는 영예이다. 일종의 명예이다. 이후로 여러 형태의 문화공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 이후 생활 궁금하다.

 

당시 함경북도예술단이 종종 해외(중국)공연을 다녔다. 해외공연 참가도 일종의 명예이기에 그 곳에 입단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북한이 미사일발사로 북·중관계가 소홀해지며 예술단의 해외공연이 단절되었고 입단 노력을 포기했다.

이후 일한 곳은 OO연유판매소이다. 중앙당 통일전선부 산하 기업으로 정상적인 식량배급은 물론 생필품공급이 잘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조선인민경비대 7총국 산하 남강판매소(수입상품 취급소)에서 일하며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 2곳 모두 특수단위가 아닌가.

 

북한의 모든 단위에서는 해마다 2월 16일(김정일 생일), 4월 15일(김일성 생일)이면 ‘충성의 노래모임’을 한다. 그것도 각 부문별로 치열한 경쟁으로 말이다. 내가 소속된 기관은 항상 나로 인해 우수한 성적으로 거두었다. 특수단위(중앙당 및 군부 산하)의 종사자들은 춥거나 배고픈 줄 전혀 모르고 산다. 일반 인민들의 눈에는 특수단위 직원들의 모습이 마치도 다른 나라 사람들의 모습으로 비쳐질 것이다.

 

함경북도예술단이 종종 중국공연을 다녀

해외공연 참가도 명예이기에 입단하려 노력

북한 미사일발사로 북·중관계 소홀해지며

예술단의 공연이 단절되었고 입단 노력 포기

 

모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돈이 필요해서

화폐가치가 없는 북한돈 보다 중국 돈이나

미국 돈이 있어야 했고 중국이나 남한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탈북 결심 굳혀

 

- 가정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1호 행사 준비에 너무 신경을 썼던지 이후 모친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돈이 필요했다. 화폐가치가 없는 북한돈 보다는 중국돈(위안)이나 미국돈(달러)이 있어야 했고 결국 중국이나 남한에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래서 2007년 3월 두만강을 건너 3개월간 도문에 있는 친척집에 숨어 지냈다. 이후 남한행이 최종결정 되었고 이제 가면 영영 못 볼 것 같아 청진에 계시는 모친이 보고 싶어 다시 북한으로 몰래 들어갔으나 발각되어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17일간 조사를 받고 함경북도 집결소에 수감되어 3개월간 강제노동을 하였다.

 

- 3개월 처벌이면 짧은 것 아닌가?

 

보통 1년 이상의 처벌을 받아야 했으나 모친이 배워준 제자의 아버지가 집결소 소장이었기에 힘을 쓴 것이다. 출소 후 시집을 갔다. 남편은 무역일군이었는데 3년 뒤 간암으로 사망했다. 5살짜리 아들과 함께 살기가 힘이 들었다. 미래를 위해 다시 모험하기로 작정하고 2013년 9월 아들과 압록강을 넘었다. 라오스, 태국 등을 거쳐 그 해 11월 한국에 입국했고 이듬해 3월 하나원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왔다.

사회생활 초기에는 날마다 아이를 껴안고 잠자리에서 눈을 감으면 1차 탈북 때 장마철 불어난 두만강 물에 휩쓸리거나 국경경비대 보위부에 붙잡혀 17시간 동안 강도 높은 취조를 받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세 달이 멀다하게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으며 그렇게 1년 6개월 동안 극심한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5살짜리 아들과 함께 살기가 힘이 들어

미래를 위해 다시 모험하기로 작정하고

2013년 아들과 죽을 각오로 압록강건너

라오스, 태국 거쳐 11월 한국 입국했고

이듬해 하나원 졸업하고 사회로 나와

 

- 어떻게 극복했는지 듣고 싶다.

 

내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7살짜리 아들 때문이다. 나의 분신으로 귀중히 여기고 압록강을 건너 머나먼 이국을 거쳐 여기까지 데리고 온 아들의 앞날을 위해, 그 아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엄마가 돼야겠다는 결심이 불같이 섰다.

평양민속예술단, 백두한라예술단 등 탈북민 예술단체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좋았다. 탈북예술단체는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과 민속무용, 북한의 특수한 예술을 대중에게 보여드리니 무엇보다 편안한 마음이었다.

 

-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우승을 했다.

 

결혼을 하고 8개월간 ‘피자가게’를 하였으며 이후 집에서 한동안 살림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이 “여보! 당신 정말 노래를 버리지 않았다면 이번에 우리 지역(용인시)에서 하는 KBS 전국노래자랑에 한 번 나가보세요. 나는 당신이 압록강을 넘어 탈북하던 그 정신으로 하면 꼭 우승할 거라고 봐요” 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래서 나간 것이 2019년 8월 현지서 녹화하고 10월에 전국에 방송된 KBS 전국노래자랑,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편이다. 여기서 소리새의 ‘그대 그리고 나’를 불러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전국에 ‘전향진’ 이란 이름을 알렸다.

 

- 당시 우승 소감은 어떠했나.

 

지옥의 땅, 북한을 탈출하여 자유의 땅, 남한에 입국한 날은 ‘조용히 기쁜 날’이었다면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우승한 날은 ‘요란하게 기쁜 날’이었다. 북한에서 김정일이 인민을 위한 좋은 정치를 하였다면 내가 굳이 남한에 올 이유가 없었다. 수령의 독재정치가 싫어 남한에 왔고 김정일 덕분에 KBS 전국노래자랑서 우승했다. 한 때 우울증으로 방황하던 나도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경험에 감사했다.

 

지옥의 땅, 북한을 탈출 자유의 땅, 남한에

입국한 날이 ‘조용히 기쁜 날’이었다면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우승한 날은 ‘요란하게 기쁜 날’

한 때 우울증으로 방황하던 자신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과 미스트롯2 출연한 것 감사

 

- 2020 미스트롯2에 출연하였던데.

 

종합편성채널 TV조선의 예능프로이다. 종편방송의 예능프로는 종류와 사안에 따라 지상파 공영방송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한다. TV조선의 ‘2020 미스트롯’도 KBS의 ‘전국노래자랑’ 못지않게 국민들이 많이 보는 프로그램이다.

전국에서 4~5만 명이 도전장을 내밀었고 예선 출연자 100인 중에 첫 무대에 올라 나훈아의 ‘녹슬은 기찻길’로 올하트를 받았다. 40인 선을 넘으며 본선에 올라 최선을 다했지만 아쉽게도 탈락했다. 탈북민 가수로는 유일한 기록이다.

 

- 첫 앨범을 발표하였다.

 

신곡 ‘관심 좀 가져줘요’ ‘설악산’으로 작년 12월에 냈다. 두 노래의 작사, 작곡은 김동찬 선생이다. ‘봉선화 연정’ ‘네박자’ 등 수많은 국민가요를 쓰고 히트시켰으며 2007년 제7회 한국전통가요 작사부문서 대상을 수상한 분이다. 지난 수년간 저의 음악생활에서 친아버지 같은 심정으로 도와주시고 아껴주시는 김동찬 선생이다.

 

- 고마운 분이 누구인가.

 

거두절미하고 남편이다. 내가 생활에서 힘들어 할 때마다 곁에서 조용히 응원해주는 동지이다. 남편의 권고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려 다시 무대에 섰고 오늘은 이렇게 전국에 자랑할 수 있는 ‘미스트롯2 가수’ 타이틀도 갖게 되었다. 또한 유튜브 ‘전향진의 사랑노래’서 나를 응원해주시는 많은 팬 여러분께도 감사하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탈북가수’ 전향진이 아닌 ‘국민가수’ 전향진이 되고 싶다. 그렇다고 ‘탈북’이란 이름을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쩌면 그 이름 때문에 국민들에게 나를 많이 알렸으며 싫든 좋든 그 이름은 내게 평생토록 붙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탈북’이란 표현이 없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통일일 것이다. 갈라진 남과 북이 하나로 통일되어 7천만 민족이 행복하게 사는 그날을 위해 열심히 노래를 부르겠다.

 

림일 객원기자

  • 도배방지 이미지

정방산성의 봄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