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봉] 어지러운 영상자료 시대

박신호 방송작가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4/08 [10:53]

[모란봉] 어지러운 영상자료 시대

박신호 방송작가

통일신문 | 입력 : 2021/04/08 [10:53]

▲ 박신호 방송작가

아침이면 머그잔에 커피를 담아 들고 서재에 들어가 고전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거나 신문을 읽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런 행복을 위해 길고 긴 험난한 여정을 밟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그럴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아침나절을 서재에서 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은 평온치가 않다.

 

욕심 부리지 않고 조용히 살려는 사람까지 속을 뒤집어 놓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야 정치판에서 벌리는 꼴을 보지 않으면 되겠지만 살아 있는데 죽은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 애꿎게 거실에 있는 아내까지 흥분시켜 놓고 만다.

오늘은 마감해야 할 글이 있어 메모해 놓은 노트를 뒤적이다가 멈췄다. 책이나 신문을 읽다가 보면 좋은 글들이 있다. 아까워 그걸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기억력이 좋으면 메모할 것이 없으나 그렇지 못하니 적어 놓고 다시 보거나 인용하고는 한다. 한 메모 쪽지에 눈이 갔다.

 

미국 법무부에 들어가는 정문 위에 새겨져 있는 글귀였다. 영화에서 본 걸 메모한 것이다. “법이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 이 한 줄기 글귀를 보는 순간 오늘날 우리의 정치판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3명의 전 현 법무부 장관과 전 검찰총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들 3명의 얼굴에서 “법이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는 글귀가 겹쳐져 떠올랐다.

왜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단 이들 얼굴에서만 이 글귀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칼자루를 쥔 자가 휘두르는 칼날에는 으레 피를 보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곧은 사람이 법치를 외치고 상식을 들이대며 읍소하듯 마이크 앞에서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메모장을 다시 넘겼다. 영화를 보다가 적어 놓은 글이다. “밀림의 왕이 되려면 왕처럼 해서는 안 된다. 왕이 되어야 한다.” 짧은 말이지만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이 말 뒤에는 이런 메모가 이어졌다. “왕이 되려면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말라” “의심은 혼돈과 파멸을 초래함으로”라고 했다. 이어 “학년이 높아갈수록 학문도 쌓여야 하는데 퇴보를 한다면 그건 못난 대통령의 레임덕과 마찬가지다”

말은 날아가고 글은 남는다고 한다. 하지만 말도 순간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세상이 아니다. 지금은 아카이브 (ARCHIVE-영상자료) 시대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말과 글이 영상으로 남겨진다. 시장 보궐선거에서 그 위력을 목격한다. 좋은 세상인지 고약한 세상인지 모르겠다.

하기는 집에서도 부부간에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거니 “분명히 했다”거니 하며 다투는 경우가 있다. 특히 이런 일이 늙은 부부만 사는 집에서 자주 벌어지기 쉬운데 아무래도 정신이 가물가물하는 황혼기가 돼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한데도 끝끝내 우기다 보면 언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 말, 안 한 말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 탈이다. 그래서 급기야는 방마다 CCTV를 설치하자거나, 말할 때마다 핸드폰에 녹음하자고 하기에 이른다. 이게 다 늙어 기억력 부실 탓으로 돌려버리면 되겠건만 그랬다간 언젠가는 치매 소리까지 들을 것 같아 끝끝내 우기게 되니 그게 탈이다. 하긴 그래 봤자 자고 나면 다 잊어버리거나 얼마 못 가 잊게 마련이니 다행이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건강 프로그램이 온통 뒤덮고 있다시피 하고 있다. 살만한 세상이 됐으니 더 오래 살고 싶어 그런 것 같지만 않은데 너 나 없이 건강에 관심을 쏟는다. 무관심보다는 바람직하기는 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만들어 탈이다. 몸에 좋은 약과 운동이 뭐가 그리 많은지 정신이 없을 정도다. 그대로만 하면 100세 훌쩍 넘길 수 있나? 또 100세를 넘기면?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는 생활을 하면 치매가 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수까지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 들면 안경을 껴도 금세 글자가 가물가물하다. 텔레비전도 편하게 볼 수 없다. 어느새 얼보인다. 그러니 친구와 만나 얘기라도 나누면 좋으련만 먼저 세상을 황망하게들 하직하니 날이 갈수록 가슴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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