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봉] 한줄기 광명마저 차단한 인권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1/19 [21:39]

[모란봉] 한줄기 광명마저 차단한 인권

통일신문 | 입력 : 2021/01/19 [21:39]

<박신호 방송작가>

 

감격의 광복을 맞던 그 날을 기억하는 세대는 알고 있다. 우리 국민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고 있다. 나 역시 알고 있다. 특히나 38선과 6, 25 민족상잔의 아픔은 더욱 생생히 알고 있다. 살붙이를 잃었거나 친지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온 민족의 인권이 무자비하게 짓밟혔기 때문이다. 가축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었다.

▲ 박신호 방송작가


서울내기가 은퇴 후 거처를 파주로 옮겨간 지도 20여 년이 흘렀다. 옛 동료들은 남북통일을 앞당기려고 북한이 가까운 파주로 이사를 했느냐고 농을 하기도 했다. 파주는 이사 당시만 해도 중심부에서 벗어나면 도로에서 먼지가 펄펄 날랐다. 오로지 마음을 다독거려주는 것은 풍부한 문화유적과 맑은 공기였으며 수풀 우거진 동산을 산새 소리를 들으며 거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고로 내가 사는 데가 제일 좋은 곳이 아닌가. 변방으로 밀려났으면서도 변명 같지 않은 변명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느 하루 와서 보면 알 수 있다. 은퇴 후에까지 시끄럽고 혼탁하고 소란스러운 도심에 묻혀 살 필요가 있나 싶을 것이다. 더구나 집 때문에 못 살겠다고 비명 지를 일도 없다.

석양에 임진강 줄기 따라 달리다 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정경을 볼 수 없다. 한 폭의 화폭을 보는 듯한 노을이다. 가는 길 잠시 머물고 지는 태양을 바라보라. 아프리카에서도 볼 수 없는 황홀한 정경이 펼쳐진다. 노인에게 사라지는 것처럼 슬픈 게 없으련만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려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다. 금방 빨아 놓은 옥양목처럼 일순간 마음이 하얘지는 것만 같다.

임진강 강줄기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도라산역에서 길을 막는다. 고개를 들면 건너편으로 북한 땅이 뿌옇게 보인다. 어쩔 수 없이 평화의 동산 푸른 잔디를 둘러보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오면서 차창을 열어젖히고 달리면 찬바람이 가슴까지 파고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북 확성기방송이 들리던 지역을 지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북한군에게 확성기로 방송을 보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적막만 흐를 뿐이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확성기방송이 끊기면서 제일 먼저 원성을 높였던 사람은 전방에서 근무하던 북한군이었다고 한다. 고달프고 지겨운 최전방 10년 복무 중 크나큰 낙으로 삼던 대북방송을 하루아침에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게 뭔지 일깨워 주던 반려자를 무자비하게 내쳐버렸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일화도 들린다. 북한에서 최신 남조선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이 전방 복무를 한 북한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기도 많았는데 이젠 그마저 끊겨 아쉬워한다는 것이다.

다시 들을 수 없는 확성기만 아쉬운 게 아니다.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전단도 습득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전단 한 장 습득할 때마다 몇십 년 소식조차 알 수 없었던 살붙이를 만난 듯이 반가웠는데 이제는 헤매고 헤매며 찾아도 쪽지 한 장 볼 수 없는 삭막한 세상이 됐으니 이 얼마나 허탈하고 슬프게 하는 일인가.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몰래 보던 전단 한 장으로 세상 물정을 알고 세상을 엿보았건만 이제는 볼 수 없게 됐으니 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가.

불과 몇 년 전 북한 최전방 전역에서 북한군들의 고달픈 복무를 달래주고 희망을 안겨주던 확성기방송이 끊어지더니 이제는 전단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됐으니 북한군들은 물론이고 북한 주민들의 실망감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무기력한 한국정부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 김여정은 오늘도 한국 정부의 ‘대북전단금지법’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김여정 말 한마디에 찔끔 놀라는 한국 정부에 대해 김정은은 음흉한 미소를 지며 술잔을 기울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국제사회는 한국 정부의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해 인권을 짓밟는 짓이라고 일제히 비난의 말을 쏟아 붓고 있다. 어둠에 갇힌 북한 주민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 비춰주던 전단을 날리지 못하게 차단하다니 이렇게 나약할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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