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자녀 탈북민…“그냥 따뜻한 관심과 작은 배려만 해 주세요”

[인터뷰] 손명화 사단법인 6·25국군포로가족회 회장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1/19 [21:05]

국군포로 자녀 탈북민…“그냥 따뜻한 관심과 작은 배려만 해 주세요”

[인터뷰] 손명화 사단법인 6·25국군포로가족회 회장

통일신문 | 입력 : 2021/01/19 [21:05]

▲ 손명화 사단법인 6·25국군포로가족회 회장  © 통일신문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

손명화 사단법인 6·25국군포로가족회 회장을 만나다

 

국군포로는 6.25전쟁 당시 북한군 혹은 중공군에 의해 포로가 된 군인을 말한다. 주로 북한지역에서 많이 발생했다. 정부가 파악한 한국전쟁 국군포로는 약 8만 2천명, 유엔은 다국적 군인포로까지 포함해 약 10만 명 정도로 본다.
북한은 지금까지 국군포로에 대해 어떠한 자료도 공식 발표한 적이 없다. 북한사회의 유일한 산증인인 탈북민들의 종합적인 정보에 의하면 북한 내부 자료에 7만 4천여 명 가량으로 기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0년 이전 까지다.
국군포로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주역은 6.25전쟁 당시 북한에 포로 되어 1994년 10월 대한민국으로 귀환한 조창호 소위(1932~2006)다. 그의 뒤를 따라 2010년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귀환했고 현재 생존자는 20명뿐이다.

모두 80~90세 고령이며 언제 하늘나라로 갈지 모를 그들을 위해 다양한 시민활동을 하는 단체가 있다. 서울 중구 만리동1가에 위치한 사단법인 <6.25국군포로가족회> 사무실을 방문하여 손명화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6.25국군포로가족회를 소개해 달라.

2008년 5월 국방부로부터 정식 인허가 받은 국군포로 자녀들의 탈북민단체이다. 2012년부터 4년간 사무국장 직무를 맡았고 2018년 1월 회장으로 취임했다. 단체의 목적은 국가수호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에 강제로 억류(포로)된 후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권익보호와 탈북 한 국군포로 가족(2·3세)의 정착도움이다.
현재 단체에 소속된 국군포로 가족은 110가족의 560여 명인데 모두 탈북민들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국군포로 유해는 전부 7구이다. 80명의 국군포로와 7구의 유해는 100% 본인과 가족들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 정부의 국군포로 대우는 어떠한가.

우선 국군포로가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면 브로커비용으로 3천만 원을 지급해준다. 그리고 본인이 살아서 한국에 입국하면 7억 2천만 원의 보상금을 준다. 주거지원금 1억 5천만 원과 연간의료지원금 1천만 원의 혜택을 받는다. 국군포로의 자녀가 북한에서 부친의 유골을 가져와도 혜택은 없다.

2018년 1월 회장 취임…단체의 목적은
국가수호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북한에 강제로 억류(포로)된 후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권익보호와 탈북 한 국군
가족(2·3세) 110가족 560명 정착도움

 

- 유골은 DNA 검사를 확인하지 않나?

당연히 한다. 내 아버지 유골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확인한 7구의 국군포로 유골은 남한가족, 친인척과의 DNA검사를 했고 모두 99.99% 일치 한 것으로 판정을 받았다. 지금은 유골을 가져온 국군포로 가족이 브로커비용 1천 5백만 원 받는데 이것도 지난 수년간 우리가 해당부처와 치열한 투쟁을 벌려 쟁취한 성과다.

- 정부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국군포로 자녀가 부친의 유골을 가져오면 살아서 귀환한 국군포로가 받는 보상금의 절반이라도 달라는 것이다. 지옥의 땅 북한에서 죽은 것만도 가슴이 아픈데, 아버지의 고향에 와서 이렇게 차별대우를 받으니 가슴이 찢어진다.
해당부처 관계자들은 “망자까지 보상하자면 통일 후 그 많은 국군포로에게 드는 보상금액은 국가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군인들을 보상하기 어렵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정말 답답하다. 해당 부처 관계자들의 내심은 “국군포로 자녀라 할지라도 탈북자의 말을 쉽게 믿지 못 하겠다”는 뉘앙스다. 대한민국 정부는 언제부터인가 국내에서 6.25전쟁 때 전사한 중공군의 유해를 발굴하여 중국으로 보내고 있다. 6.25때 중국군은 분명 우리 아버지들의 적이었다. 국민의 혈세로 적군의 유해를 발굴해 유족에게 보내주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 북한에 포로가 된 군인들은 방치한다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 관계 법령을 개정했다던데.

국방부는 1998년에 6.25전쟁 행불자, 국군포로에 대해 ‘1950년 입대, 1953년 전사’라고 일괄 처리했었다. 국군포로의 자녀가 부친유골을 갖고 탈북, 남한 친인척과 DNA검사를 통해 친자임을 확인하고도 부모의 호적에 등재되지 못했다.
우리 당사자들은 너무 황당하다. 이러한 문제를 헌법소송으로 재판하여 승소했다. 현재는 탈북 한 국군포로 자녀들이 국가유공자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성과를 위해 나는 피터지게 관련 공부를 독학으로 했다.

- 해당 부처의 문제점은 또 뭐라고 보나?

정권에 따라 보훈 및 관련 정책도 다소 바뀌는 것이 문제다. 큰 차이는 없지만 보수정권, 진보정권이 서로 다른 정책을 펴니 그 후과는 분명 있다. 사람 따로, 서류 따로, 증거물(유골) 따로. 모두 제각각이니 답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이 문제와 싸우다 지쳐서 정신과치료 받는 사람도 생겼겠는가.

-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62년 2월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2남 4녀 중 셋째 겸 맏딸이다. 아버지는 국군포로 출신으로 무산광산연합기업소 채탄공(광석 캐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OO국수집 주방장이었다. 나는 1982년 8월 청진고등경제전문학교(3년제 전문대)를 졸업하고 이후 무산제재공장 알코올직장에 배치를 받아 일하였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시었나.

경남 김해 태생인 내 아버지 손동식 씨는 25살 때인 1950년 9월에 참전, 1953년 5월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다. 평양강동수용소에 들어가니 29명 있었는데 포로가 들어오는 족족 건설현장의 인부로 돌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1953년 8월 안전성건설대에 편입, 길주팔프공장 확장공사장에 강제로 동원되었고 이후 무산광산으로 배치를 받았다. 무산광산에는 약 100명의 국군포로가 광석을 캐는 노동자로 있었다.
국군포로들은 대부분 전쟁고아 출신 여성들, 혹은 평양에서 추방되어 내려온 가족 중의 딸들과 결혼을 하였다. 광산에서 자그마한 사고가 발생해도 우선 의심대상은 국군포로들이었다. 간부에게 불려가 생활비판서를 쓰기도 했다. 1975년 여름에 아버지가 폐암진단을 받았는데 치료는 고사하고 광산직맹위원회 측에서는 그냥 쉴 수 없으니 산에 들어가 동발목이라도 마련해오라며 산간오지로 강제 이동시켰다. 산전막에서 9년간 전깃불 없이 짐승처럼 일했다.

-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

아버지는 항상 우리 자식들에게 밖에 나가서 말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언젠가 내게 조용히 했던 말의 내용이다. 전쟁이 끝난 후 OO지역에 수백 명의 국군포로를 모아놓고 “고향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오른 쪽에, 이북에 남고 싶은 사람은 왼쪽에 서라!”하고 오른쪽 무리에 기관총탄을 퍼부어 수백 명이 즉사시켰다고 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북한이 6.25전쟁 때 소련(현 러시아)에서 어마어마한 군수물자를 차관(빌리는 돈) 형식으로 받아왔다고 한다. 3년간의 참혹한 전쟁은 끝났으나 갚을 돈이 없었고 대신 러시아 벌목공으로 수백 명의 국군포로를 강제로 송출시켰다고 한다.
또한 북한당국은 1976년 8월 ‘판문점도끼만행사건’ 때 자칫 미국과 남한이 북한을 침공할 수 있다고 봤다. 가령 이때 건실한 국군포로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 예견하여 수백 명의 국군포로를 ‘말반동’(술자리를 비롯한 사석에서 당 정책을 비판하거나 정부에 불평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으로 몰아 처형시켰다고 했다.

아버지 유골 포함해 확인한 7구 국군포로
유골은 남한가족, 친인척과 DNA검사 했고
모두 99.99% 일치 한 것으로 판정을 받아

아버지의 고향에 와서 많이 차별대우 받아
해당 부처 관계자들 내심은 탈북자의 말을
믿지 못 하겠다는 뉘앙스…정부는 국내에서
6.25전쟁 때 전사한 중공군의 유해를 발굴
중국으로 보내고 있어…나라를 위해 싸우다
북한에 포로가 된 군인들 방치에 안타까워

-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뭔가?

가끔 명절이면 우리 집에 국군포로 출신 노동자들이 모여 술과 음식을 놓고 회포를 나누었다. 그때면 우리 아이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어느 날 어른들 몰래 문밖에서 집안의 소리를 들으니 그리운 남쪽의 고향이야기 뿐이었다. 다소 신기한 것은 어떤 때는 자주 보이던 얼굴들이 안 보이기도 했는데 훗날 아버지한데 듣기로 술자리에서 말실수로 보위부에 잡혀갔다고 했다. 정치범수용소에 간 것이다.

- 아버지의 유언은 무엇이었나.

1984년 1월 어느 날, 향년 59세에 폐암에 걸려 숨지면서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에게 “가능하다면 내 시신은 내 고향 경상남도 김해군 동상리 315번지에 묻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평소에는 그냥 “아버지 고향은 저기 남쪽 부산이다”고만 했었다. 이때 처음으로 자세한 주소를 알았고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 국군 K이다”고 하셨다. K는 한미합동 전투부대를 의미한다.

아버지 손동식은 25살 때 1950년 9월 참전
1953년 5월 북한군에 포로…평양강동수용소에
들어가니 29명 있었는데 포로가 들어오는 족족
건설현장 인부로 돌려…이후 무산광산에 배치
100여명 국군포로가 광석을 캐는 노동자로 전락

- 이후 생활과 탈북 경로를 말해 달라.

25살에 인민군 4군단 26사단 군관(장교)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6개월 만에 남편이 황당하게도 제대되었다. 이유는 국군포로 딸과 결혼한 ‘죄’ 때문이다. 이후 이혼했고 아들 2명은 내가 맡아 키웠고 10년 만에 남편과 재결합했다.
고난의 행군 때 남편은 굶어죽었고 더 이상 북한사회에 어떤 미련도 없어 2005년 10월 30일 막내아들과 함께 탈북 했다. 중국 안도에서 13일간 보냈으며 북경-내몽고-몽고를 거쳐 2005년 12월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 아버지의 유골은 어떻게 들여왔나.

지난 2013년 봄, 고향에 있는 여동생에게 아버지의 유골을 갖고 탈북하라고 권유했다. 여동생은 오빠와 함께 유골을 준비했으나 겁먹고 다른 탈북가족(3명)에게 유골함을 전하고 무서워서 탈북을 못하겠다고 했다. 유골함은 왔으나 그로해서 동생과 오빠, 조카까지 정치범수용소에 갔다. 내가 국군포로 유골을 갖고 온 1호 탈북민이다.
다소 미안한 일이지만 한국에 들어 온 아버지의 유골을 21개월간 집에 갖고 있었다. 국군포로에 대한 너무나 잘못되고 허술한 행정체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다. 그 유골함을 들고 청와대 앞, 국방부 앞에서 8개월간 1인 시위를 벌렸다.
그 결과 우리 단체 회원 국군포로 110가족이 국가유공자 자녀임을 인정받았다. 또한 일부 가족에게 ‘화랑무공훈장’ 수여되도록 이끌었으며 우리는 전체 국군포로에게 수여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다 포로가 되어 사망한 국군포로들에게 마지막 명예라도 주자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 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우리 국군포로 가족들이 과거 나라를 지켜 싸운 아버지들을 핑계로 정부를 향해 큰돈을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따뜻한 관심과 배려만 아주 작게라도 주었으면 한다. “정부가 그동안 국군포로를 방치한 것은 너무나 큰 잘못이다. 우리 때문에 당신들이 북한에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는 말 한마디 왜 못해주는가 말이다. 왜 국군포로 자녀 탈북민인 우리를 마치 이방인 쳐다보듯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 앞으로의 계획은.

최근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의 비참한 실상과 이야기(3자 증언)를 담은 다큐멘터리 ‘버려진 영웅들 43호’를 제작했다. 조만간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이 영화를 해외에서 특히 한국전쟁 참가국 16개 나라에서 상영하려고 한다. 또한 국군포로 후손들의 증언을 계속 사료로 모아왔는데 내년쯤에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위 사업의 수익금과 후원금으로 대전국립현충원에 ‘국군포로 추모비’를 건립하려고 한다. 추모비 앞면에는 살아 돌아온 분들의 사진을, 뒷면에는 사망한 분들의 이름을 새겨 넣으면 좋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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