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봉] 무소식이 비극이다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1/07 [21:12]

[모란봉] 무소식이 비극이다

통일신문 | 입력 : 2021/01/07 [21:12]

<박신호 방송작가>

 

우리나라 속담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내성적인 탓인지, 집안 내력인지 가까운 친지와도 별로 소통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집안에 큰일이 있거나 행사가 있어야 마지못해 전화를 걸거나 얼굴을 보는 편이다. 그러니 외국에서 사는 아우와는 더욱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든 아우가 몇 년 만에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한동안 전화 한 통 나누지 않았다. 담을 쌓고 살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세 번 국제전화를 걸었다가 통화가 안 된 다음부터 연락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아우가 뉴욕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십여 일 전에 왔다는 소식을 조카를 통해 들었다. 그 얘길 듣고 그동안 전화 한 통 안 한 게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제수씨가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얼핏 듣자 하니 그만한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왔으면 형님에게 전화 한 통 못하느냐고 싫은 내색을 한 모양이다. 그러고 며칠 후 갑자기 집으로 오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현관 벨이 울려 문을 여니 아우 내외가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우에게 불쑥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고 아우는 엉겁결에 지팡이를 쥔 채 내 손을 잡았다. 그제야 아우가 다친 다리를 치료하려고 한국에 왔다는 말을 들은 게 생각이 났다.
집안 내력 특이의 어색한 표정을 지며 형제가 술상 앞에 앉았다.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선지 제수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주버니, 그동안 섭섭하셨지요? 이 사람, 국제전화는 통 받지를 않아요. 하지도 않구요. 궁금해 하면서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오랜만에 만나선가, 술기운인가, 이런저런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래서 살붙이란 건가? 하나밖에 없는 사위가 고향 한산에서 가지고 온 앉은뱅이 술이라는 소곡주가 슬슬 넘어갔다. 서로 얼큰하게 취하자 아우가 지나가듯,

“형, 나 월남전에 참전하고 현지 제대하고 나서 다신 한국에 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벌써 50여 년이나 지난 얘기다. 당시 정부에서 몹시 섭섭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걸 아우는 잊지 않았으며 용서도 하질 않았다. 아우는 그 이후 몇십년을 국제 떠돌이 신세가 됐다가 겨우 뉴욕시민으로 터를 잡았다. 그 사연을 떠올리면 할 말이 없었다. 아무 말 안 했다. 지금 아우는 나와는 다섯 살 터울이니 일흔아홉이다. 늙어가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형, 내년에 뉴욕에 와요.” 뉴욕에는 십여 년 전 칠순 때 초청을 받아 한 달가량 갔었다. 그랬어도 아내가 반기며, “맨해튼 허드슨에 있던 아파트를 없앴다면서요? 뉴욕박물관도 가까워 좋았는데...”

오늘따라 거실 넘어 보이는 넓은 논밭이 유난히 속 시원히 펼쳐져 보였다. 시골 같은 도시에서 두 늙은이가 흘러들어 의지 가지하며 산지도 20년이 훌쩍 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깊숙이 박혀 살다 보니 서울 출생이 대순가 싶다. 소식은 전해야 소식인가. 가슴에 있으면 그 또한 소식인데.

하지만, 하지만 무소식이 비극인 사람들이 눈을 밟는다. 북한 주민이다. 어둠 속에 갇혀 사는 그들에게 전단 한 장 못 보내게 하다니 이렇게 인권을 무시한 잔인한 짓을 하다니 점점 더 가슴이 미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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