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들 타운 만들고 싶어…남한사회 또 다른 정착방법 아닐까”

[인터뷰] 북녘 고향집 안방 ‘평양라이브’카페 양경순대표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0/09/29 [15:45]

“탈북민들 타운 만들고 싶어…남한사회 또 다른 정착방법 아닐까”

[인터뷰] 북녘 고향집 안방 ‘평양라이브’카페 양경순대표

통일신문 | 입력 : 2020/09/29 [15:45]

 추석은 남한에서 민족최대의 명절이다. 동남권의 전통명절로 한반도의 남과 북, 중화권과 베트남 등의 나라에서 쉰다. 해방 후 북한정권은 공산체제를 세우며 사회주의문화에 위배가 된다며 배척하던 추석을 1980년대부터 쉰다.

북한에서는 국가명절인 김일성 생일(415), 김정일 생일(216)민족최대의 명절로 부른다. 추석날 당·국가의 간부들은 죽은 전임수령들의 시신궁전을, 일반 주민들은 주거지역에 세워진 수령 동상에 헌화하는 참배가 우선이다. 이를 고의적으로 위반하면 반동으로 찍혀 사회생활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그랬던 탈북민들은 남한에서 많이 놀란다. 추석날 죽은 대통령의 묘소를 방문하는 국민이 없고 모두 고향의 부모형제를 찾아가니 말이다. 추석을 앞두고 서울 대림동에 있는 평양라이브카페를 찾아 양경순 대표를 만났다.

 

추석이 오면 고향에 있는 언니·오빠 생각이 더욱 간절할 텐데?

35천 탈북민이 모두 나와 똑같을 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은 본능적 습관이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부모님 계시는 고향방문도 자제하는데 그것까지도 부러운 우리 탈북민들이다.

올해는 예년에 없던 3개의 태풍으로 인해 남한보다는 북한이 더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남북관계가 하루빨리 좋아져 고향에 계시는 우리 부모형제들의 어려운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는 소식만 들려오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북녘에서 보낸 추석날 기억나는 일이 있나?

내가 17살 때 무산시장에서 남조선 비디오테이프가 몰래 유통되었다. 추석 무렵이다. 테이프 2개를 옥수수 14kg값을 주고 빌려 봤는데 남조선드라마 가을동화였다. 4인 남녀의 사랑, 이별, 아픔의 이야기를 그린 그 드라마에 매혹되었다.

솔직히 가을동화의 주인공들인 송승헌, 송혜교, 원빈 등 멋진 배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많이 행복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남조선에 가면 저 배우들처럼 비행기도 타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가을동화본 후 가을동화에 정신이 꽂혀 언젠가 언니에게 우리 남조선으로 갈까?”라고 물었다. 화들짝 놀란 언니가 덮치듯이 내 입을 막으며 !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꼴 보고 싶어 그래? 다시는 그런 소리 말라!”고 해서 포기했다. 내색은 안했지만 이후 마음속에 그래 언젠가는 꼭 남조선으로 가리라!’는 다짐이 들어찼다. 추석날이면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고향이 어디인가.

198810월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5남매의 막내였고 아버지는 OO목재사업소 노동자, 어머니는 주부였다. 내가 7, 8살 때에 부모님께서 연년이 굶어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큰오빠는 4명의 동생을 맡아 키워야 했기에 군사동원부에 토끼가죽 15장과 옥수수 40kg을 뇌물로 바치고 군대초모에 면죄를 받았다.

건설사업소 노동자로 일하는 큰오빠를 도와 5인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14살 때부터 장사에 나섰다. 재적은 무산고등중학교에 걸어놨으나 나처럼 생계장사로 인해 등교를 못하는 아이들이 학급에 절반 이상이었다.

장사를 했다고 하는데 어떤 물건을 팔았는가?

일찍이 시집을 간 언니네 집에서 언니와 함께 만든 두부밥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고난의 행군시기 이후에도 국가에서 인민들에게 식량을 공급 못하는 실정이니 시장에서 음식장사는 제법 잘 되었다. 갓난아기 주먹크기 만한 두부밥 한 개 5원이었다. 하루 판매목표량 100개의 두부밥은 1~2시간이면 팔린다. 장사를 하며 겪었던 어려움은 시장은 비싼 사용료(자릿세)를 내야하는데 대부분 돈 없는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고 시장주변과 골목 등지에서 수시로 생겼다가 없어지는 메뚜기시장’(상인들이 공권력 단속을 피해 메뚜기처럼 뛰어다닌다 해서 그렇게 불림)을 이용한다.

메뚜기시장에서는 누군가가 저기 안전원이 온다!”고 하면 펼쳐놓았던 각종 좌판을 단 5초 사이에 정리하고 자리를 뜬다. 안 그러면 이년들아!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장사는 왜 하냐?”는 안전원(경찰)에게 모든 물건을 압수당한다.

 

올해 예년에 없던 3개의 태풍으로 인해

북한이 큰 피해 보았다는데남북관계가

하루빨리 좋아져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들

생활이 나아졌다는 소식 들려오길 바라

 

또 다른 장사품목도 있는가.

사탕과자도 취급했는데 과자는 언니네 집에서 만들었고 사탕은 다른 집에서 가져다 팔았다. 그 후에는 담요장사를 했다. 청진수남시장에서 주패담요수십 장 가져다 옥수수와 콩을 바꿔 그것을 다시 팔면 제법 돈이 되었다. 중국산 의류·신발·생필품 장사 재미도 쏠쏠하게 보았다. 여담이지만 나는 16살 때 옥수수 40kg값을 주고 쌍꺼풀 수술까지 했다. 보통 수술은 몰래 가정집에서 마취 없이 진행한다.

쌍거풀 수술이라면 그것은 불법 의료행위가 아닌가?

물론 그렇지만 그것이 일상이다. 엄밀히 말하면 의사들도 식량배급이 전혀 없는 병원에 꼬박꼬박 출근하는 것보다 불법이지만 개인에게 쌀값(혹은 식량)을 받고라도 암암리에 의술을 펼쳐야 밥을 먹고 산다. 의사의 진단을 받은 환자가 병원에 입원하려면 먹을 쌀과 약을 갖고 가야하는 형국이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소토지(개인농사)를 해보았다고 하던데 무슨 일인가?

간혹 장사를 못할 때는 산골로 들어가 밭을 일구었다. 너무 깊은 산골이어서 행정당국의 통제도 못 미친다. 오빠네 친구들에게 점심식사를 주면서 일을 같이 했다. 나무를 자르고 돌을 골라내고 풀을 뽑아 수백 평의 밭을 만들었다.

거기에 콩, 감자, 옥수수 등 온갖 농작물을 심었다. 이른 봄부터 여름 내내 땀 흘린 보람은 가을에 있었는데 옥수수는 최고 1t까지 수확했다. 그때 비로소 당에서 극구 통제하는 개인농사는 작황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탈북은 언제 했으며 동기가 궁금하다.

우리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일찍 결혼하는 일이 흔했다. 20살 때 중매꾼의 소개로 한 농장 작업반장의 아들을 소개받았는데 약혼식 후에 알고 보니 결핵환자였다. 결핵은 전염이 쉽고 약혼식 날 하룻밤 잔 것도 아니고 해서 거절했다.

그런데 큰오빠가 약혼식까지 했으니 그 남자와 살아야 한다!”고 했고 언니마저도 내 심정을 몰라줬다. 며칠 고민하다가 결혼도 할 수 없고 지긋지긋한 이 고향땅도 싫다. 나는 죽어도 남조선으로 가련다는 비장한 결심을 다졌다.

6년간 장사를 했으니 국경경비대원도 제법 알았다. 200710, 누나·동생하며 친했던 군인 2명에게 각각 옥수수 30kg값을 주고 두만강을 건넜다. 난생 처음 밟은 이국땅이었고 두려움은 다소 있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중국 땅에 발을 딛고 몸에 품었던 조선공민증(주민등록증)을 찢어 강물에 버리고 뒤도 안보고 앞으로 달렸다. 운명의 장난인지 2일 만에 중국공안에 단속, 강제 북송되어 무산으로 왔다.

탈북했다 북송되면 엄청난 처벌이 있었을 텐데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안전부(경찰)에서 취조를 받고 노동단련대로 넘겨져 6개월간 처벌(하루 12시간 무보수 강제노역) 결정을 받았다. 큰오빠의 도움을 받아 옥수수100kg을 단련대 간부에게 바치고 2주간의 노동을 하고 간신히 출소되어 사회로 나왔다.

이틀 뒤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나를 낳아준 사랑하는 부모님이 굶어서 돌아간 그 땅,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몸부림치는 언니·오빠들, 다정한 소꿉친구들이 있는 고향땅을 뒤돌아보니 눈에서 피눈물이 났다.

다시 탈출 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되는데 그럼 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탈출 후 인신매매에 걸려 끌려 간 곳은 흑룡강성 하얼빈이었다. 여기서 14개월간 살면서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 덕분에 신문광고를 보았고 요령성 심양에 한국기업과 관련 일자리가 많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이후 목단강을 거쳐 심양으로 갔고 편의점에서 한동안 일했다. 곤명, 라오스, 태국을 거쳐 201112월 한국에 왔다.

 

탈출 후 인신매매에 걸려 끌려 간 곳은

흑룡강성 하얼빈14개월간 살면서

중국어 열심히 배운 덕에 신문광고 보고

한국기업과 관련된 일자리 정보 알게 돼

곤명, 라오스, 태국 거쳐 201112월 입국

 

그래도 중국에서 빠른 시일에 한국에 왔다. 사회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나.

언젠가 지인의 소개를 받아 대학교 신입생모집 행사에 갔다. 쟁쟁한 대학이름이 적힌 안내책자를 보며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시기 가족부터 살려야겠기에 포기했던 공부를 늦게나마 실컷 하겠다는 의욕이 났다.

허나 며칠을 고민하고 생각을 접었다. 고향에 있는 4명의 언니·오빠가 마음에 걸렸다. 시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겨우 사는 그들에게 내가 남한에서 대학공부를 하는 모습은 거의 사치스러운 광경으로 비칠 수 있으니 말이다.

사는 것이 생소한 남한에서 그동안 어떤 일을 하였는가?

낮에는 일반음식점에서 서빙을 했고 저녁에는 제과제빵학원을, 주말에는 컴퓨터전문학원을 다녔다. 그렇게 6개월을 바쁘게 보냈으며 나만의 일을 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후 북한음식 및 식품판매사업을 하게 되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북한산 인조고기, 명태, , 담배와 아바이순대, 두부밥, 떡 등을 각종 행사장이나 모임장소에 가서 팔았다. 음식은 내가 직접 밤을 새며 만들기도 했다. 그로인해 허리에 물까지 차는 병을 한동안 앓았었다.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고향의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던데?

남한에 와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고향의 언니·오빠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 적게 보낼 때는 1인당 100만원, 많이 보낼 때는 그 이상의 금액이다. 3명의 언니·오빠는 내가 보내는 돈을 잘 받는데 유독 큰오빠만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통화를 했는데 경순아! 큰오빠 걱정은 하지 말고 너만 잘 살아라. 부디 앓지 말고 건강해서 통일이 되면 꼭 만나자고 하더라. 그 소리를 듣고 며칠 동안 울었고 마음이 아팠다.

현재 운영 중인 평양라이브소개 부탁한다.

20194, 서울지하철 2호선 대림역 근처에 개업한 카페이다. 손님들이 음료와 맥주를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추는 곳이다. 영등포구 대림3동 사거리 건물2층에 70평 규모이고 주차장도 있다. 오후7시에 문을 열어 새벽2시까지 영업한다. 전화번호는 0507-1331-4434, 주소는 서울시 영등포구 가마산로 352 이다.

카페의 특성과 자랑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주변에 여러 개의 카페가 있지만 우리 평양라이브만큼 현대적이고 최신장비로 꾸린 곳은 없다. 가게 사장으로써 직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은 친절, 친절 또 친절이다. 손님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은 친절이 곧 생명이나 같다.

음악인 출신의 남편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내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도 부른다. 그리고 우리 카페에는 유튜브에 있는 북한음악 3만 곡이 있으며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다. 고향의 향수를 달래려고 탈북민들이 제법 찾아온다.

손님 중 탈북민들이 많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인가?

글쎄, 딱 찍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게 올 때는 전체 손님의 15% 많을 때는 30%까지 된다. 그 중에 10년 이상 남한에서 산 사람들이 많다. 남한사람들도 향수가 그리워 전통음식점과 옛날식 주점을 찾듯이 탈북민들도 똑같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여기를 북녘 고향집 안방으로 생각하고 찾아오는 단골 고객이 적지 않다.

북한노래는 일반 노래방에도 있지 않나.

현재 남한의 노래방이나 카페에 있는 북한 노래는 반갑습니다’ ‘휘파람’ ‘심장에 남는 사람등 이 3곡이 전부이다. 이것도 벌써 20년째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 평양라이브에는 모란봉악단 등에서 만든 북한의 최신음악이 전부 있다. 북한노래는 사상만 빼고 들으면 모두 우리의 전통가락이고 예술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남한에서 10년째 산다. 서울 대림동에는 중국조선족들이 타운(일정한 지역)을 형성하고 잘 단합되어 있다. 그러듯이 우리 탈북민들도 타운을 만들어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분명 우리들만의 문화도 있다. 어쩌면 그것도 다양성이 존중되는 이 남한사회에서 개성이 강한 우리 탈북민들의 또 다른 정착방법이 아닐까 한다.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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