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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들 성공적 정착 중요…통일은 “다름 수용하고 품어 주는 것”
[인터뷰] 통일코리아 협동조합 박예영 이사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20/06/10 [15:57]

 

북한에서는 당국이 개인에게 좋든 싫든 일괄적으로 직업을 배치해준다. 노동당의 지침이기에 인민은 절대 따라야 한다. 만약에 거역하면 그는 분명히 수령의 지시에 의견과 불평이 있는 불량분자로 낙인 되어 엄한 추궁을 받는다.

그런 폐쇄적 사회에서 살다보니 북한주민들은 창업이나 개인사업 등 직업의 다양한 세계를 잘 모르는 실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국이 지정해주는 직업에서 평생토록 충성하는데 개인의 정신관 및 노동 생활관이 굳어져있다.

20206, 탈북민 35천명 시대이다. 이 중 미성년 세대와 노년층을 제외하면 순수 노동력 가능 계층은 17천 명 정도로 추산한다. 탈북민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직업선택 및 창업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한다.

연평균 1,000명씩 입국한 본격적 탈북민 증가 시대가 열린지도 20년이 되었다. 다양한 탈북민 사업자들의 경제네트워크도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통일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통일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사업을 지속하는 공동체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박예영 이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고향이 어디인가.

19762월 자강도 동신군에서 태어났고 2살 때부터 함경북도 김책시(해방 전 성진시)에서 살았다. 형제로는 남동생 2명과 여동생이 있다. 1980년대 북한에서 상당한 인기직업의 재쏘노동자(러시아 주재 북한근로자, 벌목공) 출신인 아버지는 김책시OO자재상사에서 자재 인수원으로 근무하였고 어머니는 부양(주부)이었다.

고등학교 때 특별한 추억이 있나.

19936, 졸업(8)을 두 달 앞둔 시점에 아주 특이한 일이 있었다. 내가 학급 담임선생을 학생들로부터 챙긴 뇌물수수, 부정축재, 비리 등의 안건으로 함경북도당위원회 신소과에 무기명으로 신고(민원을 넣는 것)했던 것이다.

도당 검열지도원이 내려왔고 필적검사 등을 통해 발각되었다. 학교에서는 훈방조치로 끝났으나 고등학교 졸업 때 직장 배치에 영향력이 있는 담임선생에게 찍혔으니 희망대로 대학이나 좋은 직장으로 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당시 예술영화 효녀가 인민들 속에서 상당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그 영화는 자강도 전천군 상업관리소 정춘실() 소장의 일화를 그린 내용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춘실 따라 배우기 운동이 최고 열풍이던 시절이었다. 당과 국가에서 내세워주는 영웅처럼 살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나도 정춘실 영웅처럼 살리라!’는 결심을 하고 어느 날, 자강도 전천군으로 정춘실을 찾아 떠났다.

정춘실에 대해 소개해 달라.

1941년생인 정춘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16살부터 자강도 전천공업품상점 판매원으로 일했다. 이후 그녀는 공업품상점 점장, 전천읍종합상점 지배인 등으로 재직했으며 1969년부터 전천군 상업관리소 소장이 되어 일을 하였다.

김정일은 상업일군 정춘실을 10여 차례 접견하고 199110정춘실운동을 발기하고 전국에 일반화하도록 지시했다. 그녀는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훈장(1982/1992)을 수훈, 1964년에 이어 1986년에 두 번째로 로력영웅 칭호를 받아 2중 로력영웅이 되었다. 정춘실은 1977년부터 최고인민회의대의원(국회의원)이다.

그러면 정춘실을 만났는가.

어렵게 만나 꼭 전천군에 와서 일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고백했다. 그녀가 다소 놀라면서 내 청원을 들어주었다. 이후 김책으로 돌아와 행정이동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데 학교에서는 나를 김책OO광산에 이미 배치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김책시당 조직비서에게 편지를 썼다. 정춘실 영웅처럼 살고 싶어 자강도 전천군 상업관리소로 가고 싶다는 내용이다. 조직비서는 정 그러면 김책시 상업관리소에서 일하라고 직접 상업관리소에 데려가 배치해주었다.

 

정춘실 영웅처럼 살고 싶어서 자강도 전천군

상업관리소로 가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 보내

조직비서 김책시 상업관리소에서 일하라

식료품 상점 관리기관인 상업관리소에 배치

가축사육장 선동원으로 일하면서 농업전문학교

통신으로 입학3~4시간 자면서 휴일도 없이

땀 흘려 일했던 것은 노동당에 충성하기 위한 것

 

 

상업관리소는 좋은 직장이 아닌가.

내가 배치 받았던 광산보다는 훨씬 좋은 직장이다. 상업관리소는 김책시의 각 식료(공업)품 상점을 관리하는 기관인데 자체로 목장도 운영하고 있다. 내가 간 곳은 OO목장(가축사육장)이었다. 당의 신임을 받아 선동원(정책적 정치선전 담당자)으로 일하면서 한 편으로는 김책시농업전문학교를 통신으로 입학하여 다녔다. 하루 3~4시간 자며 휴일도 없이 땀 흘려 일했던 것은 오로지 노동당에 충성하고 싶어서였다.

또 다른 일은 무엇을 했나.

19941월부터 근무했던 상업관리소 목장일은 2년 뒤인 968월에 그만두었다. 이유는 96년 초부터 식량배급이 전혀 안되었고 상부에서는 식량을 자체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던 것이다. 충성심으로 당과 수령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었지만 충성심도 배가 불러야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퇴직하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사촌언니를 따라 구리(금속)장사에 나섰다. 구리 1kg을 김책에서 60원에 사서 중국 국경지역인 혜산에 가서 팔면 300원을 받았으니 제법 남는 장사였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김책시에 있는 성진제강연합기업소는 직원 1만 명에 달하는 특급기업소(남한의 대기업). 여기서 생산되는 특수강은 각종 무기생산에 쓰인다. 국가서 식량배급을 못주니 과반의 종업원들이 기업소 자재(구리)를 몰래 훔쳐 팔았다.

기업소 당위원회서는 노동자들에게 매주 강연·학습시간에 지금 우리 인민들이 시련을 겪는 것은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괴뢰들의 간악한 압살정책 때문이다. 그럴수록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당에 더욱 충성해야 한다고 했다.

전형적인 노동당의 왜곡선전이 아닌가.

당연히 그렇다. 인민들은 나라의 재산을 훔쳐 쌀을 사먹는 지경에 도달했다. 일반 노동자들이 훔친 금속을 단속하는 사람들(공장 규찰대)은 자신이 그걸 다시 갈취하는 걸 보면서 이러다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럴수록 내게는 반미감정이 더욱 깊어졌다. 왜냐하면 언제든 미국과 한 번은 반드시 붙어서 끝장을 봐야 우리가 허리를 펴고 살 수 있다는 당의 선전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탈북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혜산에서 5~6개월, 금속장사를 할 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중국이 무척 잘 사는 나라이다. 중국에서 3일간 번 돈으로 한 달 식량을 살 수 있다는 소리에 중국동정심이 생겼다. 특히 중국은 매해 풍년이 들어서 한 해 농사의 양으로 3년도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욱 중국으로 가고 싶어졌다.

고민을 많이 하였을 것 같다.

당시 혜산시장에는 붉은 꽃이 그려진 중국산 이불감이 많았다. 빨래를 해도 잘 퇴색되지 않았는데 그 신비한 이유는 중국에서 깡패들이 탈북한 여성들을 감금해놓고 피를 뽑아 이불감의 물감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조선안기부 놈들이 중국서 탈북여성들을 납치해 나체사진을 찍어 북한에 보내는데, 그러면 보위부서 그 가족을 3대 멸족시킨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북한정보당국에서 이런 헛소문을 만들어 돌린 것으로 느껴진다.

 

금속장사를 할 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중국서 3일 벌면 한 달 식량을 살 수 있다

소리에 중국동정심생겨매해 풍년들어

한 해 농사로 3년도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욱 중국으로 가고 싶어져

 

언제 탈북하였는가.

어느 날 혜산역 앞에서 우연히 알게 된 탈북브로커(여성)와의 만남이 시작이었다. 그녀에게서 중국의 실상을 들으며 탈북을 고민하던 중 만난 고등학교 후배가 언니! 우리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엔 중국 가서 하루라도 실컷 배불리 먹어보자고 용기를 주었다. 결국 나와 고교후배, 또 다른 여성 모두 3명이 탈북브로커의 뒤를 따라 19972월 차디찬 얼음장이 두껍게 낀 압록강을 넘었다. 첫 탈북이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처음으로 간 지역은 료녕성 OO시다. 도매시장 상가에서 의류가게 직원으로 일을 하다가 식당 서빙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04월 중국 공안에 단속, 북송되었다. 3개월간 집결소(감옥)에서 취조 및 강제노역을 하고 풀려났다.

20013월 다시 탈북하여 OO시에서 관광객 가이드를 하였다.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지역안내 일이다. 그 업무를 하면서 한국에 대한 정보를 다소 취득했고 태국을 경유해 20027월 남한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통협)을 소개해 달라.

지난 201311월에 설립되어 다양한 영역에서 이미 온 통일을 살아가는 사명감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 통일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사업을 지속하는 공동체이다. 통일이후 남북의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경제모델을 미리 체험해보는 시도이다. 260여명의 조합원은 시민단체장, 대학교수, 연구원, 언론·종교·기업인, 가정주부, 대학생 등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한국인, 탈북민, 해외교포, 외국인들로 구성되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준다면.

우리 조합의 추진사업은 크게 세 가지인데 통일관련 사업, 문화, 교육의 유통이다. 여기서 가장 중점은 탈북민 사업가들의 자립을 돕는 일이다. 현재 남한에 있는 탈북민 출신의 사업자는 대략 1.500~2.000명으로 본다. 탈북민 사업가들의 사업유통을 위한 플랫폼이 절실하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사업과 제품을 온라인으로 꾸준히 홍보 및 유통하는 일을 주력하여 한다. 탈북민 사업가들을 돕는 일이 사각지대에 있는 탈북민들의 일자리를 늘려가는 일로도 연결되기에 분명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20013월 재 탈북중국서 관광객 가이드

한국 관광객 상대로 하는 지역안내 일하면서

한국에 대한 정보 취득 태국 경유 남한 입국

 

탈북민 기업제품은 어떤 것이 있나?

현재는 토마토착즙, 숙성칡즙, 블루베리착즙, 천연꿀 등 탈북민들이 직접 제조하는 농토산물이 있다. 또한 탈북민들이 수입 유통하는 non-GMO해바라기씨유, 짝태(명태), 사탕과자 그 외에 판촉물 등이 있다. 탈북민 기업제품은 전체 상품의 30%정도 차지한다. 나머지는 남한 사람들의 제품으로 모두 통일관련 상품이다.

꾸준한 변신을 시도하던데.

최근에 통협 홈페이지 안에 있던 몰을 네이버(http://smartstore.naver.com/ukcmall)로 확장해서 개설했다. 이름은 통협몰’(통협의 인터넷쇼핑몰)인데 소비자들의 접근이 아주 쉽다. 통협몰에는 실용 유익한 선물용 상품이 많다. 주문제작용 행사티셔츠, 머그컵, 통일보틀, 통일커피 드립백, 원터치 텀블러, 평양성탄절 머그컵, 각종 전자제품 등이 있고 계속 탈북민 사업가들의 제품 입점을 늘려갈 계획이다.

문화, 교육유통에 대해서 궁금하다.

찾아가는 통통콘서트사업을 통해 통일문화를 유통한다. 통일전문가 강의 및 공연, 토크쇼를 통해 통일관련 여러 사안을 함께 알아간다. 남북문화를 공유하기 위한 언어, 음식, 스포츠, 음악 등 문화사업을 추진한다. 아카데미, 포럼, 세미나 등을 통해 통일세대인 남북청년들을 평화통일의 리더로 양성하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모든 행사문의는 사무국(02-701-1311) 또는 홈페이지로 하면 된다.

박 이사장의 통일관은 무엇인가?

탈북민은 사실 굉장히 상징적인 존재이다. 3만 탈북민의 성공적 남한정착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남북한 사람들이 통일할 맛이 날 것이다. 바람직한 통일은 너와 나의 다름을 수용하고 포용하고 품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이념적인 전쟁에 치여 왔다. 이제는 그 벽을 과감히 뛰어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기업들과 적극적인 협력 사업을 도모하고 있다. 통협은 수익의 10%를 통일 미래를 위해 기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더 열심히 하려고 유튜브채널 박통통TV’도 하고 있다.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던데.

사실 기독교는 중국에서 처음 접했지만 공안에 단속되어 언제 북송될지 모를 불안한 마음의 탈북자 신분이라 별로 와 닿지 않았고 돈 벌이 때문에 더욱 외면했다. 그러다가 태국 방콕 한인연합교회에서 수개월 지낼 때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2004년 감리교신학대학교, 2009년 동대학원을 다녔고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20195월 미국 워싱턴D.C 소재 웨슬리신학대학원서 목회학 박사를 받았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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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10 [15:57]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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