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된 북한 땅에 청소년고아원 설립…그 날을 준비한다

[인터뷰] ‘한민족대안학교’ 최화숙 교장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19/12/19 [11:56]

통일 된 북한 땅에 청소년고아원 설립…그 날을 준비한다

[인터뷰] ‘한민족대안학교’ 최화숙 교장

통일신문 | 입력 : 2019/12/19 [11:56]

올해 미국의 대북정책을 보면 미·북정상회담은 그대로 진행하고 유엔제재 등은 별도로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서 북한주민들의 인권실태에도 꾸준한 관심을 돌리고 있다. 특히 탈북민들의 증언을 새겨듣는 미국의 정치인들이다.

한국의 안보는 미국의 영향이 크다. 지난 103일 한미친선우호 행사가 서울남산 하얏트호텔에서 한 시민단체의 주최로 진행되었다. 주최 측의 초청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여러 탈북단체장들이 참여했다.

그 속에는 여성단체장이 있었다. 한민족대안학교 최화숙 교장선생이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강연을 들으며 많이 공감했다. 탈북민들만큼 안보를 걱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남과 북의 두 사회를 체험한 탈북민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이다. 수령 개인감정이 나라의 정책이고 전체 주민이 수령을 위해 절대 존재하는 독재사회가 어떤지를 똑똑히 아는 존재들이다.

서울 양천구에 소재한 탈북청소년 방과 후 학교인 한민족대안학교를 찾아 최화숙 교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6311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넷째이고 맏딸이다. 아버지는 함경북도안전부 감찰과 예심원이었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19809주을의학전문학교약학과에 입학했으나 1년 뒤, 내가 동생들을 돌봐야하는 사정으로 퇴학했다. 이후 은덕군 OO협동농장 축산반에서 일을 했다. 1년 뒤, 군당학교 사로청반 6개월 과정을 졸업하고 축산반(사로청원 20) 초급단체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인기가 아주 많았겠다.

그랬다. 20명의 사로청원들의 정치사상 및 조직생활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으니 어깨가 으쓱했다. 일 잘하기로 소문이 난 것은 물론이고 노동당에 입당하겠다는 열성도 많았으니 주변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네 며느리하자면서 난리도 아니었다. 스물 살이 지나서부터 여기저기서 혼사소리가 들려왔으니 행복했다.

 

함북회령출생은덕군 한 협동농장서 일 해

1년 뒤, 군당학교 사로청반 6개월 과정졸업

사로청원 20명의 초급단체위원장으로 활동

 

축산반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 돼지, , 염소, 토끼 등을 기르는 곳이다. 소는 500마리, 돼지는 1.000마리, 양과 염소는 각각 700마리 정도 있었다. 내가 5년간 축산반에서 일하며 가축을 잡아 농장원들에게 공급한 적은 없었다. 농장간부들의 지시로 돼지나 염소 등은 자주 잡는데 고기는 상급기관(군당, 군인민위원회, 안전부 등)에 올라간다.

자세히 말해 소는 국가(농장) 재산으로 되어있기에 병들어죽지 않는 한 일부러 도살을 못한다. 가령 병들어 죽으면 도살하는데 그때 고기는 전부 상급기관에 올라가고 내장은 우리에게 차려진다. 그것을 깨끗이 씻어 끓여먹어도 배탈은 없다.

간부들은 자기들이 필요하면 어느 때든지 돼지와 염소를 잡는데 그때 서류에는 병들어 죽은 것으로 기록한다. 나는 양사육 분조에서 일했다. 양은 털 생산을 목적으로 사육하며 죽으면 그것도 간부들이 와서 가져간다.

결혼은 언제 하였는가.

처녀 때 5~6회 정도 괜찮은 혼사(미팅) 자리도 마다하고 23살에 27세의 인민군 군관(장교)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남편의 정신질환성 폭력이 잦았고 그런 문제로 제대하여 OO송배전소 전기기사로 일을 했다. 국가 식량배급은 없고 남자들은 장사를 못하게 했다. 10살 넘은 두 아들을 키우자니 내가 장사에 나섰다.

어떤 장사를 하였나.

연로보장(정년퇴직)을 받은 아버지는 OO군 시골에서 담배농사를 개인부업으로 하였다. 거기서 담배를 받아서 나진선봉으로 가서 팔고 수산물을 사와 중국 보따리장사꾼들에게 넘기면 5~6배의 이익이 남았다. 제법 쏠쏠하게 돈이 되는 장사였다. 그 일로 돈을 모아 그걸 밑천으로 중국보따리 장사에 접어들었다.

 

23살에 결혼남편의 정신질환성 폭력 잦아

10살 넘은 두 아들 키우기 위해 장사 나서

시골에서 담배농사를 개인 부업하는 아버지

담배를 받아 나진선봉 가서 팔고 수산물사와

중국 보따리장사꾼들에 넘기면 5~6배의 이익

돈을 모아 중국보따리 장사에 본격 뛰어들어

 

사사여행자 신분으로 말인가.

그렇다. 사사여행자증명서(친척방문 허가증, 일종의 여권)는 함경북도당위원회 외사부에서 발급한다. 북한당국에서 중국에 있는 친척 주소가 정확하고 합당한 사유가 있는 조건에서 방문기간을 지정해서 승인하는 정책이다.

1992년과 1994년 두 차례 중국 연길에 있는 친척집 방문으로 나왔다. 주로 가져갔던 물건은 건어물, 버섯, 고사리 그리고 US달러 등이었고 나올 때는 TV, 녹음기, 자전거, 의류 등을 갖고 와 시장에 팔면 3배 이익 되었다.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겠다.

그랬다. 내가 장사를 하여 돈을 버니까 무엇보다 두 아들이 기죽지 않고 학교생활 하는 것이 좋았다. 그 속에는 학교 담임선생에게 꾸준히 갖다 바치는 뇌물(, 담배, )이 있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허탈한 기분이 드는데 사회가 그런 풍조이니 어쩔 수 없다. 안전원, 보위원에게는 항상 뇌물을 바쳐야 살 수 있다.

탈북 동기는 무엇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이다. 13살 때 어머니를 잃고 엄마의 사랑 없이 자란 나였고 시집가서는 남편 복 없이 거의 매 맞고 살았다. 저주로운 사회와 남편을 원망하며 자살하려 했으나 두 아들이 눈에 밟혀 못한 적이 한두 번 아니다. 그 두 아들을 제대로 키우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돈을 벌려면 위험하지만 탈북을 해야 했고 199868일 눈물의 강,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에서 어떤 생활을 하였나.

연길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며칠 후 일자리를 찾으려고 인력시장에 나갔으나 쉽지 않았다. 몇 주 뒤 도시외지에 있는 조선족 남자를 만나 교회를 다니면서 살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수시로 단속 오는 공안에 위험하다.

시장에서 피복(옷감, 천류)을 받아다가 집에서 재봉(재단)하는 일을 하였다. 다소 안도감이 들어 일을 하면서 연길OO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중국 당국이 허가한 공식교회이며 거기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두 아들을 제대로 키우려면 돈이 있어야

돈을 벌려면 위험하지만 탈북 해야 했고

199868일 눈물의 두만강을 건너

 

조선족 남자를 만나 교회에 다니면서 살아

단속하는 공안의 위험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시장에서 옷감을 받아다가 집에서 재봉 일

안도감 느끼며 일 하면서 연길교회에 나가

 

중국 교회에 대해 궁금하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 당국은 교회 설립을 공식 허가했다고 한다. 단 조건이 있는데 직경 1.000m 안에 두 개 이상 세울 수 없다. 그리고 교회성도 수는 물론이고 교회가 들어갈 시설도 있어야만 승인했다. 허가 없이 생긴 크고 작은 교회들이 많은데 그것들은 일명 지하교회’ ‘가정교회라고 한다. 불법 교회는 발각되면 중국 돈 500(한화 10만원)의 벌금을 물린다.

또 어떤 규정이 있는가.

정말 무서운 규정이 있다. 만약 중국 교회에 한국선교사를 받았다하면 중국 돈 3만원(한화 500만원)의 벌금을 물린다. 거기에 탈북자를 숨겨주거나 교회 성도로 받았다하면 목사는 법정 구속(경찰 입건) 된다. 규정은 어디까지나 이렇게 엄한데 일부 중국공안(경찰)은 어느 정도는 눈감아 주는 경우도 간혹 있다.

북한에 다시 가려고 했다면서.

두고 온 두 아들이 정말 보고 싶었다. 거기에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니 죽음 같은 건 두렵지 않았다. 북한에 가서 보위부에 취조와 고문을 받겠지만 그것마저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달게 받으리라 했다.

허나 그것도 쉽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온 선교사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설득을 받고 마음을 달리했다. 내가 우선 살고 두 아들을 꼭 살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200211월 라오스,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왔다.

남한생활 초기 무엇을 했나.

중국에서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었기에 한국에 가면 꼭 신학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20043월부터 대전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에서 사회복지학과를 복수 전공했고 20082월에 졸업하였다. 이듬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석사과정, 3년제)을 졸업했다. 2015년 국제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민족대안학교를 소개해 달라.

탈북교사 출신의 최 모 교장이 지난 20087월에 설립했다. 탈북민 자녀들을 위한 방과 후 교실로 운영하는 학교이다. 개교는 6명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선생은 6명이었는데 3명은 탈북교사, 3명은 남한 분이었다. 20124월부터 내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지금은 25명의 탈북민 자녀출신 학생과 12명의 선생님이 있다. 물론 대부분이 자원봉사자 선생님으로 정말 감사한 분들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해준다면.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완전히 중국 사람이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아이들도 우리 학교에 와서 공부하면서부터 3개월 정도 지나면 한글을 쓰고 읽고, 1년 쯤 지나서부터 어떤 대화도 어려움 없이 진행하고 있다.

북한에서 부모가 죽고 형제를 따라, 혹은 지인을 따라 탈북해서 한국에 온 학생들도 있다. 이들에게는 다른 아이들보다는 특별히 선생님들이 신경을 쓰도록 당부하며 가급적이면 깊은 관심과 배려를 돌리자고 호소한다.

학생들이 호소하는 애로점은.

일부 학생들이 언어 사용의 애로점을 말한다. 원래 북한말은 억양이 강해서 서울 말씨와 비교하면 마치도 싸우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탈북학생들은 북한 말씨로 인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을 받을 때는 전혀 다른 환경이다. 탈북교사들이 같은 억양으로 교육을 하니 때로는 친근하고 정감이 들기도 한다고 소감을 말한다.

탈북학생들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통일의 소중한 인재들이다. 남북의 두 제도를 경험했기에 통일 후 북한 재건에 가장 확실히 기여할 사람들이다. 분단과 통일의 두 시대를 역사에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미래지향적으로 봐도 탈북학생 중에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런 인재들을 양성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하고 있다.

 

통일의 소중한 인재들남북한 두 제도경험

통일 후 북한 재건에 가장 확실히 기여할 것

분단과 통일의 두 시대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사명감 갖고 하고 있어

 

누가 제일 고마운가.

전라도 태생의 동갑내기 남편이다. 42살에 교회에서 모 권사님의 요청으로 만났는데 처음에는 그냥 별로였다(웃음). 그런데 지내보니 정말 괜찮은 남자이더라. 이 남자 놓치면 일생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 들 정도로 내가 반했다.

무엇보다 신앙이 깊고 교회생활에 열성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슨 일을 해도 늘 꼼꼼하고 차분하면서도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은 남편이다. 전기기술자인데 우리 학교 공동생활가정(기숙사) 관리를 전담하고 있다.

힘들 때는 어떤 때인가.

일부 학부모들의 잘못된 인식으로 다소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마치도 학교 선생님들이 자기 아이들 때문에 먹고 산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학교 운영비의 일부는 국가보조금도 있지만 적지 않게 후원금으로 충당하기도 한다. 그 후원금을 마련하려고 교장이 여기 저기 발이 부르트도록 뛰고 또 뛴다.

앞으로의 꿈이 무엇인가.

통일이 되면 북한의 내 고향에 가서 청소년고아원을 짓고 경영하는 것이다. 내가 탈북한 후 내 두 아들은 고아원에 들어가 살았다. 큰 아들은 너무 배고파 고아원에서 가출하여 행방불명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한국으로 데려왔다.

아들의 증언을 들으면 기가 막히다. 아이들이 먹지 못해 하루아침에 몇 명씩 시체가 되어 나갔다고 한다. 그 속에서 살아 나온 아들은 현재 신학공부 준비 중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아들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다른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주려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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