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들에 보내준 사랑…봉사활동으로 돌려 드리고 있어요”

[인터뷰] 부산지역 탈북민 '통일희망봉사단' 황현정 단장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19/11/14 [11:31]

“탈북민들에 보내준 사랑…봉사활동으로 돌려 드리고 있어요”

[인터뷰] 부산지역 탈북민 '통일희망봉사단' 황현정 단장

통일신문 | 입력 : 2019/11/14 [11:31]

유난이 무더웠던 지난해 8월 중순,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특별한 KTX열차에 탑승했다. 6·25전쟁 때 북한군의 도발로 평화로운 이 땅에 동족상잔이 발생했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인민군에 빼앗긴 비통한 사변이 있었다. 그 비극적인 아픔을 가상한 피란(하행)-통일(상행) 열차가 부산역을 향한 것이다.

파란체험 승객은 123명인데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서 전쟁 및 북한과 여러 가지 사연이 있는 7세~70세 연령의 보통 시민들이다.‘피란의 어제 통일의 내일로’ 라는 주제의 그 행사는 동아대학교 부산하나센터가 주간했다.

2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부산에서 하루 일정을 마치고 여장을 푼 곳은 아르피나호텔이다. 행사 주최 측에서 차린 만찬에는 부산지역 탈북민 봉사단체인 ‘통일희망봉사단’의 축하공연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고향의 봄’ ‘휘파람’ 등 귀에 익은 북한가요가 무대에 올랐고 관객들은 무척 흥에 겨운 모습을 보였다.

2일간 부산의 자랑을 아낌없이 해준 예쁜 여성이 있었다. ‘통일희망봉사단’ 황현정 단장이다. 서울 공덕동 효창운동장에서 있은 ‘제37회 대통령기 이북도민 체육대회’에 참가한 황현정 통일희망봉사단장을 만났다. 

▶어디서 근무하고 있나.

부산시 사상구 소재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야간에 지적장애 1급 성인남성 4명을 돌보고 있다. 입사 3년 즈음 사직서를 제출하고 OO종합사회복지관 취직해 8개월간 일하다가 이들이 눈에 밟혀 다시 여기로 와서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맺어준 친구들인 것 같아 계속 이들을 돌보려고 한다.

▶‘통일희망봉사단’을 소개해 달라.

내가 남한에서 1년을 보내며 깨달은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감사이다. 북한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중국에서 북송 공포에 떨던 나를 따뜻한 집에서 배고플 걱정 없이 살게 해준 남한정부가 정말로 고맙다. 그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봉사를 하며 살아야겠다는 불같은 마음이 들어 2011년 8월 탈북민 35명으로 설립했다. 현재는 30명의 회원이 있다. 그중 7명은 통일을 사랑하는 남한 분들이다.

▶그동안 어떤 일을 하였나.

봉사단이 설립된 초기 3년간 매달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펼쳐지는 어르신 무료급식에서 음식을 나르는 봉사를 나갔다. 대략 어르신 800~900명을 대상으로 한다. 그 이후부터는 부산 OO노숙인급식소로 북한음식을 만들어 갖고 봉사를 나간다. 노숙인 120명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활동이다.

▶고향이 무척 그리울 텐데 어디인가?

1969년 11월 함경남도 신포에서 태어났다. 6형제 중 넷째이다. 아버지는 신포10호사업소 수산노동자(어부)였고 어머니는 탁아소 보육원이었다. 나는 인민(초등)학교 시절부터 노래와 화술 등 예술분야에 취미가 깊었고 연중 절반은 학교예술소조에서 활동했다. 1986년 8월 신포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다니는 신포10호건설사업소에 배치 받아 입직 1년 뒤부터 청년예술기동대에서 활동을 했다.

▶‘기동대’와 ‘선전대’는 어떤 차이가 있나?

‘기동대’는 15명 규모로 하루 4시간 예술 활동을, 나머지 4시간은 현장 일을 한다. 선전대는 30명 규모로 전문예술 활동만 한다. 선전대원은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전문으로 다뤄야 하고 하루 4시간 훈련에 축하공연 연습을 한다.

이들을 보고 ‘유급’(전문 사무노동을 한다는 의미)이라고 한다. ‘반유급’(현장 일 절반, 사무노동 절반)으 불리는 기동대원은 종일 공연연습 및 현장공연을 나간다. 기동대원은 기본적으로 2가지 이상 악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예술선전 활동을 어떻게 하는가.

사업소 문화회관에서 연습한 공연은 현장에서 한다. 건설현장의 특정장소에서 임시무대를 만들어놓고 공연을 펼친다. 당 정책 구호 합창, 선동호소, 독창, 기악연주 등으로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것이다.

선동 내용은 모두 수령의 위대성, 사회주의 우월성 홍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를테면 ‘위대한 수령을 높이 모신 행복’을 영광으로 느끼며 당에 충성해야 한다는 선전이다.

 

인민학교 시절부터 노래·화술 등 예술분야에

취미가 있어 연중 절반은 예술소조에서 활동

신포고등중학교 졸업 후 건설사업소에 배치

입직 1년 뒤부터 청년예술기동대에서 공연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 인가?

1988년 봄, 흥남비료연합기업소로 이동선전 활동을 나갔다. 당의 지시로 전국의 많은 시·군 단위 기동대가 참여했다. 한 번에 7~8개 기동대가 와서 1~2주간 선전활동하고 가면 다른 그룹이 와서 공연을 하는 방식이다.

이때 전국의 기동대원들 중 인물과 기량이 높은 대원들을 뽑아 이듬해 평양에서 있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행사보장 성원으로 차출해갔다. 우리 기동대원 한 명이 뽑혔다가 경쟁에서 밀렸는지 두 달 만에 내려왔다.

▶또 다른 추억이 있다면.

2주간 매일 세끼 밀국수를 먹었는데 꾸미는 절인 양배추, 염장무가 전부였다. 그것도 예술선전 활동하는 사람들이라고 특별히 예우해준 것이다. 흥남비료연합기업소는 직원이 수 천 명이 되는 특급기업소이다.

제대군인들 수 백여 명이 기숙사 생활하면서 식당을 이용하는데 그들도 하루 세끼 밀국수를 먹으며 일했다. 피가 한 동이씩 끓는 20~30대 청년들이 말이다. 그들의 얼굴은 대부분 창백하다.

▶예술인들에 대한 안 좋은 편견도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북한 사회에 만연한 일반 주민들의 그릇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들은 현장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데 옆에서 ‘봄날의 매미처럼’ 노래나 하고 있으니 예술인들을 아니 곱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예술단, 선전대, 기동대원들은 모두 노동당의 지시를 철저히 따를 뿐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반유급’ 선전활동 방식이 나왔다. 현장에서 일을 절반 하고 절반은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이다.

▶선전대원들의 연애 문화를 말해 줄 수 있나?

사업소 문화회관에서 선전대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공연연습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녀가 서로 정이 들어 연애(교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대중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은 없다. 선전대에서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것이 결혼으로 이어지면 좋지 않다. 이유는 청년들은 수령과 혁명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당의 의도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세히 말해 준다면.

내가 기동선전대에서 활동할 때 동료 박 동무가 23살에 약혼식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고 박 동무를 대하는 시선도 안 좋았다. 이어 그녀는 임신되었고 선전대에서 3개월간 사상투쟁을 받고 퇴직했다.

박 동무의 결혼식은 초라하게 하였다. 대중의 시선이 안 좋은 결혼식에는 일반 결혼식보다 참석자가 절반 정도에 그친다. 나는 24살에 결혼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1살 차이로 결혼하는 것이 이렇게 극과 극이다.

 

선전대원들이 공연연습을 하다 자연스럽게

남녀가 정이 들어 연애를 하는 경우가 있어

선전대에서 연애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결혼으로 이어지면 좋지 않아…혁명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당 의도에 위배되기 때문

 

▶자신은 비판 받은 적 없나?

아마도 북한주민들 치고 생활총화에서 비판받지 않은 사람은 전혀 없을 것이다. 참고로 생활총화는 모든 북한주민들의 의무적으로 하는 사상 및 정신총화 회의이다. 22살 때인가 현장에서 일하던 중 휴식 시간에 오락회가 있었다. 나는 흥겨운 리듬의 ‘휘파람’ 노래를 부르며 다소 몸을 흔들었다. 그 동작이 “누군가에게 야시시한 느낌을 주었다”고 수개월 동안이나 생활총화에서 비판을 받았다.

▶결혼 후 생활은 어떠했는가.

1992년 결혼을 하면서 다니던 사업소에서 사직을 했다. 이즈음부터 국가의 식량배급이 더욱 악화되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직장보다는 장마당(재래시장)을 더 많이 찾았다. 1998년에는 남편이 불치병으로 사망했다.

어린 딸을 굶기지 않으려면 뭐든 해야 했다. 과일과 수산물 등을 도매로 받아다가 시장에서 팔아 겨우 밥을 먹고 살았다. 그래도 힘이 들어 2001년 오빠가 있는 혜산으로 가서 미용기술을 배워 그것으로 돈을 벌었다.

▶ 탈북동기를 말해 달라.

혜산은 중국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도시이다. 2003년 9월 어느 날, 브로커한테서 귀가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중국에 가서 3개월만 일해서 번 돈으로 조선(북한)에서는 3년은 먹고 살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오빠도 어디서 들었는지 묵묵부답이었다. 맞다 는 소리다. 이후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도 그와 유사했다. 3개월간 고민하던 끝에 브로커의 말을 듣기로 하고 2003년 12월 압록강을 넘었다.

 

2003년 브로커한테서 귀가 솔깃한 제안받아

중국에서 3개월만 일해 번 돈으로 조선에서

3년은 먹고 살아…주변의 소리도 그와 유사

3개월간 고민하던 끝에 12월 압록강을 넘어

 

▶중국에서의 행적은 어떻게 되나.

대기 했던 브로커를 만나 료녕성 초양으로 갔다. 어느 농촌 마을 집에 들어갔는데 돈 받고 팔려온 것이다. 인신매매에 걸린 것이며 거기서 3년을 살았다. 그 기간 4~5회의 공안(경찰) 단속이 있었지만 다행히 모두 피신했다.

2006년 가을, 심양 서탑으로 이동하여 24시간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 돈은 조선족을 통해 북한에 있는 오빠네 가족과 내 유일한 살붙이인 딸을 보호하고 있는 함남 신포에 있는 시집에 보내줘야 했다.

▶언제 한국에 왔는가.

중국에서 6년간 살면서 일상생활 중 공안만 봐도 심장이 떨릴 정도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고 ‘혹시 탈북자인 나를 체포하려고 오는 건 아닌지? 만약 잡히면 어떻게 하지?’ 하는 공포에 떨었다. 정말이지 “나라 없는 백성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잘 알겠더라. 그 비참한 설움에서 해방되고자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어 곤명, 태국을 거쳐 2009년 4월 남한으로 왔다.

▶사회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는가.

하나원 생활 3개월간 마치고 부산으로 주거지를 배정 받고 나왔다. 부산은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남한의 최대 해안도시다. 이렇게 좋은 곳에 삶의 보금자리를 폈으나 북에 두고 온 딸 때문에 죄책감에 빠져 1년을 보냈다.

그 딸을 데려오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자동차부품회사, 김치공장 등에 취업하여 일을 하면서 야간에는 코코패션디자인학원과 동부산대학 사회복지과를 2014년 2월에 졸업하고 그해 7월부터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또 다른 일이 있다면.

우리 봉사단은 해마다 어버이날을 맞아 부산지역의 여러 요양원을 방문하여 어르신들을 위한 목욕봉사, 북한음식대접, 무료공연 등을 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 회원들 중에는 나처럼 북한 예술선전대, 기동대 출신이 다소 있다.

매해 추석 때 지역주민들과 함께 펼치는 ‘통일공감한마당’ 축제를 한다. 적게는 100명 많기는 300명이 참가한다. 남북음식 함께 해먹고 남북노래 함께 부르는 이 축제야 말로 언젠가 꼭 오는 민족통일대축제 예행연습이다.

▶고마운 분이 있다면.

‘통일공감한마당’ 축제를 그동안 일부 후원기관의 찬조와 우리 단체 회원들의 회비, 내 사비를 보태어 진행하다가 이번에 남북하나재단의 후원으로 진행하였다. 덕분에 여느 때보다 더욱 크고 효과적인 내용으로 축제를 치렀으며 그 결과 주변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우리 탈북민들의 남한사회 정착을 위해 늘 애쓰시는 탈북민정착지원기관인 남북하나재단 고경빈 이사장님께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딸도 데려와 현재 부산예술대학교에 재학 중

우리 모녀에게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삶을

준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지옥의 땅, 북한에 두고 온 딸도 데려왔다. 현재 부산예술대학교에 재학 중이다. 그래도 내 유전자를 조금 가진 것 같다(웃음). 우리 두 모녀에게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삶을 주신 대한민국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통일이 오는 그날까지 받은 사랑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하며 살도록 하겠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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