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여성이 北 관장하는 국제기구에서 일하면 영예로울 것”

[인터뷰] 이화여자대학교 북한학과 김석향 교수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19/09/11 [13:00]

“탈북여성이 北 관장하는 국제기구에서 일하면 영예로울 것”

[인터뷰] 이화여자대학교 북한학과 김석향 교수

통일신문 | 입력 : 2019/09/11 [13:00]

2천 5백만 북한주민의 성별분포도 남한국민처럼 대략 남자 반, 여자 반이다. 그런데 탈북민 사회 80%가 여성임은 다소 이유가 있다. 북한에서 여성과 달리 남자들은 대부분 직장 및 조직생활을 아주 철저하게 한다. 일감이 없어 공장기계가 멈췄어도 근로자들에 대한 사상교육 통제는 단 하루도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북한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10년 군사복무를 하고 당국에서 지정해주는 직업에 종사해야 하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사직이나 이직이 절대 안 된다. 엄밀히 말해 독재당국의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숨겨진 방법이다.

그에 비해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가정살림을 명분으로 다니던 직장에서 사직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또한 시장 출입도 남자들에 비해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결국은 이런 조건으로 하여 외부세계 정보를 다소 접하는 여성들이다. 그러다가 생계목적으로 중국영토에 불법입국하며 그 와중에 남조선(한국)을 알기도 한다.

3만 탈북민 시대에 대학졸업생만 2,000명이 훨씬 넘는다. 그리고 현재 대학에서 공부하는 탈북여성은 수 백여 명으로 추정한다. 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에서 김석향 교수를 만났다.

 

▶최근 신간을 냈는데 소개해 달라.

두 달 전에 출간했다. 제목이 ‘북조선 여성, 장마당 뷰티로 잠자던 욕망을 분출하다’이며 박민주 선생과 공저한 저서다. 이 책은 경제난이 시작된 1990년대 들어선 이후 북한사회에서 여성들의 ‘꾸미기’ 현상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주목하려 했고 여성들의 뷰티문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시대의 문화적 변화에 따라 전반적 흐름이 바뀌는 가운데 북한 여성들은 집이나 옷, 장신구, 헤어스타일 등 ‘꾸미기 활동’의 주체로서 유행을 만들어냈다. 그 속에서 문화를 향유하는 핵심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왜 연구시점이 1990년대 인가.이때를 기점으로 지구상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대립이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형식상으로는 사회주의이지만 김일성에서 김정은까지 3대에 걸치는 변화는 분명 있었다. 북한의 주민생활과 사회적 환경도 많이 자본주의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탈북민들의 증언이기도 하다.

▶자세히 말해준다면.

책은 지난 3년간 탈북민 30여 명을 심층인터뷰 했고 그에 기초하여 집필한 참고서형 저서이다. 북한을 연구하는데서 학문도 중요하지만 실제 북한에서 살았던 탈북민들의 증언이 결정적인 플러스 효과를 가져 올 때가 있다.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북한인구의 절반인 여성과 이들의 일상생활이 지니는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은 정부와 기업, 학계 모두의 관점에서 반드시 달성해야하는 필수적인 과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향은 어디인가.

1959년 4월 경북 대구에서 출생했다. 2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서울에서 살고 있으니 실제로 서울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평안북도 철산군 태생으로 실향민이다. 지난 6·25전쟁 때 피란으로 내려오셔서 안동출신의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내가 맏이로 태어났고 아래로 남동생 3명이 있다.

 

북한사회에서 여성들 ‘꾸미기’ 현상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주목…뷰티문화를

집중 조명했다는 것이 이번 책의 특징

 

3년간 탈북민 30여명을 심층인터뷰 해

그에 기초하여 집필한 참고서형 저서

북한 연구하는데서 학문도 중요하지만

실제 북한에서 살았던 탈북민들 증언이

결정적 플러스 효과 가져 올 때가 있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어떤 것인가.

과묵한 성격의 아버지는 5형제 중 막내였다. 고향에서 과수원을 갖고 있던 할아버지는 목사는 아니었지만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설교도 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한다. 당시 노동당 기준으로 보면 처형대상 첫 번째이다.

6·25가 터지자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전쟁이 2~3주면 끝나니 남쪽으로 먼저 내려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했다. 그렇게 되어 이산가족이 된 이북의 부모님을 찾는 신청을 대한적십자에 하라고 해도 아버지는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왜 그랬는가.

해방 후 5년간 북한정권을 체험하면서 아버지는 당국의 잔인성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때 인민재판이 있었는데 대상자를 타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분명 그렇게 되었을 거라며 이제 와서 이산가족으로 만나면 남겨진 가족은 당국의 감시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가슴 아프다고 했다.

 

아버지가 평안북도 철산군 태생으로 실향민

이산가족이 된 이북의 부모님 찾는 신청을

대한적십자에 하라고 해도 아버지는 시큰둥

이산가족으로 만나면 남겨진 가족은 다시

감시대상이 된다는 것에 가슴 아프다고 해

 

▶학력과 경력을 말해준다면.

1983년 2월에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9개월간 서울 종로에 있는 모 출판사에 취업하여 일을 했다. 이후 1984년 본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8년부터 5년간 미국 조지아대학교를 유학했다.

1993년에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박사논문 제목은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배경’이다. 이후 2년간 시간강사로 활동하다가 1995년부터 ‘종로 YBM시사영어사’ 편집부에 취업해 2년간 근무하였다.

▶통일부에는 언제부터 근무했나.

1997년 6월 1일부터 통일부 통일연구원 교수로 임명되어 8년간 근무하였다. 통일부 입부 다음해에 있은 금강산관광 관련 업무부터 참여했다. 대략 6개월에 한 차례씩 금강산(북한지역)을 방문해 상주 남한직원에 대한 교육을 했다. 금강산만 모두 10차례 방문했으니 그 분야에 대해서는 눈감고도 알 수 있다. 2001년 3월 북한최대 항구무역도시 남포를 방문하였다. 남한의 여러 민간단체에서 지원해주는 농수산물과 과일 등을 싣고 갔다. 우리가 든 숙소는 ‘외국인선원구락부’인데 항구 경내에 있으니 항구직원들 출퇴근 모습만 겨우 보았다.

5일간 머물렀다. 너무 답답해 신문과 책을 요구했는데 신문도 며칠 씩 묵은 것을 가져다 주더라. 그때 정주영 현대회장이 사망한 것도 3일 지나서야 알았다. 그런 생활은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평양의 주체사상탑을 참관했을 때 해설원이 “우리 수령님(김일성)께서는 생전에 1년 365일 인민을 위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시었다”고 해서 의문이 갔다. 4년에 한 번씩 오는 366일인데 “그러면 당신네 수령은 4년에 한 번씩 오는 2월 29일에만 휴식을 한 거라고 봐도 되는가” 했더니 안내원이 아무 말 못하더라.

 

통일연구원 교수로 임명되어 8년 근무

금강산관광 관련 업무 참여…6개월마다

금강산 방문해 상주 남한직원 교육시켜

신문과 책을 요구하자 신문도 며칠 씩

묵은 것을 가져다 주기도…그런 생활은

그들에게 평범한 일상이라고 느껴져

 

▶또 다른 방문지가 있었는가.

2003년 1월과 2005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함경북도 청진을 방문했다. 당시 우리 정부가 북한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쌀을 갖고 같다. 청진에서 체류하며 묵었던 호텔은 천마산호텔인데 주택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4층짜리 건물인데 4층에 청진 주재 중국영사관이 있는 걸로 알았다. 청진에는 외국인호텔이라고 시내에 있는 관관호텔과 우리가 묵은 천마산호텔 두 곳 뿐이었다. 정전이 자주 되어 청진시내는 새까만 유령도시가 되었다.

2005년 1월 우리가 3박 4일간 묵었던 천마산호텔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주변에서 열리는 장터의 상품이 어떤 것인지 다 알 정도로 가까운 지역이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남루한 옷차림이나 보잘 것 없는 생필품의 품질은 남한의 1950년대 후반, 그러니까 우리와는 근 50년 뒤 떨어진 수준이라고 느껴졌다.

▶북한을 많이 방문한 전문가로써 소감은.

글쎄, 하나의 거대한 잿빛사회라고 할까. 모두 타고 남은 연탄재가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허탈하게 상상된다. 그들도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가고 날이 지날수록 발전은커녕 퇴보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다.

대부분 남측 사람들과 상대하는 북측사람들은 통전부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남한을 잘 아는 것처럼 위세를 떨거나 흉내를 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진정성 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꼭 상부의 눈치를 보는 자세가 많았다.

▶이유를 뭐라고 보는가.

탈북민들의 증언을 들어봐도 내가 방북해 상대했던 북측 관계자들의 모습을 봐도 북한 사회는 주민상호 감시체제가 분명하다. 내가 통일부 근무 초기에 방북자들에게 했던 교육에서도 강조했지만 북한에서 수령(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비판하거나 손가락으로 지칭을 해도 ‘정치범’이 되는 무서운 사회이다.

▶이화여대 대표적 북한학 교수이다.

2005년 3월부터 이화여자대학교 북한학과 교수로 임명되어 재직 중이니 벌써 15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 현재 우리 대학교에 재학 중인 탈북여성은 대략 50여 명인데 대부분 20대 중후반의 나이다.

내가 교육자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탈북여성들이 빨리 혹은 늦게라도 공부를 시작해서 끝가지 졸업하는 모습은 참 좋다. 돈과 명예는 늦게도 벌수 있지만 공부는 가급적 빨리 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은 하나의 거대한 잿빛사회 타고 남은

연탄재가 쓸모없는 것처럼 허탈하게 상상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가고

날이 갈수록 퇴보한다는 생각 없지 않아

 

▶탈북여학생들에게서 특이한 점은 뭔가?

A학생이 있었다. 2학년 때 “아, 저 학생은 졸업해서 뭐가 되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어느 날 남자친구를 만나더니 연애에 너무 몰입하는 걸 보고서다. 그래서 “연애를 조금 미루더라도 졸업해서 좋은 직장 취직하면 그때 더 멋있지 않을까?” 했는데 말을 안 듣더라.

B학생은 언젠가부터 TV출연과 인터뷰, 잡지 기고 등으로 학업에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확히 말해 동료 학생들도 마치 제 아래 사람 보는 듯한 ‘연예인병’에 걸리지 않았는가 할 정도로 의심이 들었다.

내가 말했다. “탈북민이라는 특수 신분상 잠시 혹은 일시적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겠지만 그것보다는 학업을 제대로 마치고 후에 활동을 해도 된다”고 말이다. 머리를 끄덕이던 그 학생은 현재 휴학 중이다.

▶자랑할 만한 학생도 있지 않나.

당연히 있다. C학생은 남동생과 함께 사는데 정말 열심히 산다. 방학기간 단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을 챙겨주더라. 그러면서 봉사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인데 내가 또래의 남자라고 해도 반할 정도로 그렇게 아름답고 멋진 탈북여학생도 있다. 그런 학생은 정말 보배다.

 

탈북민이 우리 사회에 먼저 온 통일이라는

사실은 5천만 국민이 공감하는 사안으로

3만여 탈북민 80%가 여성…그 중 30%가

고등학생,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통일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배우고 있어

과정이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면 안 돼

 

일부 여성들 그늘로 탈선되는 걸 보면

부모가 아니라도 마음 찢어지는 것 같아

 

▶김 교수의 탈북학생관은 뭔가?

애증이다. 북한을 떠나 온 탈북민이 우리 사회에 먼저 온 통일이라는 사실은 5천만 국민이 공감하는 사안이다. 3만 탈북민 80%가 여성이다. 그 중에서 대략 30% 정도가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 또는 그 나이 여성으로 본다.

이들은 통일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많이 배워야 한다. 그 과정이 다소 어렵고 힘들더라도 도중에 포기하면 안 된다. 일부 탈북여성들이 사회의 어두운 그늘로 탈선되는 걸 보면 내가 부모가 아니라 해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현재 남한에 와서 대학에 재직 중인 탈북여학생들이 제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했으면 좋겠다. 물론 취업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탈북을 하던 그 정신이라면 취업고난이 ‘고난의 행군’에 비하겠는가.

그 중에는 정말 유엔과 국제기구에 정식 직원으로 취업되는 탈북여성도 최초로 누군가가 탄생했으면 좋겠다. 그것은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탈북여성이 북한을 관장하는 국제기구에서 일한다면 상징적으로도 영예스러운 일이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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