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수기] 여자의 수난 -선우은숙 씨<上>

단련대에서는 알곡자체를 구경할 수가 없었다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15/02/09 [16:04]

[탈북 수기] 여자의 수난 -선우은숙 씨<上>

단련대에서는 알곡자체를 구경할 수가 없었다

통일신문 | 입력 : 2015/02/09 [16:04]

아침도 못 먹은 채 새벽 5시부터 걸어서 출발 했다. 단련대로 가는 길은 왜 그리도 멀어보이던지... 3시간을 내내 걸어서 단련대 본 청사에 도착했다. 단련대에서는 사상교육을 시킨다고 매일 아침 대열을 맞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시내를 돌아다니게 했다.

 

풀 한줌의 달맞이 국을 끓여주고

 

얼마 후 나는 단련대 火木장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의 일이 너무나 힘들어 죽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매일 철길원목을 산에서 나르는데 깔려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어떤 사람들은 3개월 판정받으면 죽어서 나온다고 비웃기도 했다. 누구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곳이었다. 보위부 감방생활과 집결소 생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녀 모두 합쳐서 백 명 정도 있었는데 진흙으로 지은 집에 수용되어 있었다. 방은 총 4칸, 첫 번째 칸은 주방이었다. 두 번째 칸은 식당 겸 남자들이 자는 방, 세 번째 방은 여자들의 방, 네 번째 방은 우리를 관리하는 지도원들의 방이었다.

잠자는 두 방의 바닥은 흙으로 된 구조였다. 조금만 움직이면 흙먼지가 날렸고, 밖에 비라도 오는 날이면 바닥이 온통 진흙투성이로 변하군 했다. 속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무로 만든 식탁을 쭉 붙이고 밥을 먹는데, 밥이라는 것이 달맞이 (북한주민들이 식용으로 사용하는)풀 한줌에 달맞이 국을 끓여주거나 돼지도 먹기 싫어하는 세투리(풀의 이름)를 끓여서 한줌씩 놓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감방이나 집결소는 그래도 옥수수나 콩을 먹었는데 단련대에서는 알곡자체를 구경할 수가 없었다. 달맞이풀이나 세투리는 단련대생들 중 환자 한명이 전문적으로 뜯어오는데 그도 하루에 8자루씩 뜯어오느라 죽을 고생을 하군 했다. 그나마 약간씩 배급되는 알곡을 지도원들이란 자들이 모두 집으로 가져간다는 이야기는 후에 들은 이야기다.

그리고 단련대에서 관리하는 부업지도 있는데 지은 알곡을 통째로 지도원이란 작자들이 실어간다는 이야기도 썩 후에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소금도 귀했다. 사람이 소금을 못 먹으면 속에 털이 나는 것 같다는 것을 그때에 알게 됐다. 그냥 세투리 한줌과 세투리로 된 싱거운 물로 식사가 끝이었다. 그것마저 하루정량을 못하면 주지 않아서 쓰라림으로 빈속을 달래군 했다.

 

입술과 이는 풀색으로 물들어져 가고

 

일감도 꼭 힘들어 죽지 않을 만큼의 양을 준다. 쓴 물도 빼지 않은 까만 풀과 국물을 먹는 우리들의 힘은 한정되어 있었다. 누구나 말 할 기운조차도 없었고, 모두의 입술과 이발은 풀색으로 물들어져 갔다. 거울 한번 들여 다 볼 수 없는 상황에 다른 사람의 입술과 이를 보면서 나의 이발과 입술도 풀색이겠지, 하고 생각하군 했었다.

모두들 사람이 아닌 짐승이었다. 통나무를 나르느라 다 낡아버리고 찢어진 옷, 모두의 어깨는 헐어서 피가 뱄고, 딱지가 앉아있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어깨가 벗어지고 곪아터지고...피는 매일처럼 흐르고 흘렀다. 저녁이 되면 쓰라린 어깨와 상처 난 다리를 만지며 고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되면 곪음과 피가 어깨의 옷에 굳어져버린 곳에 또 통나무를 지고 날라야만 했다.

딱지가 밀리면서 아픔은 더 큰 아픔이 되었지만 그날 과제를 해야 했기에 통나무를 나를 때나 가지러 갈 때나 항상 뛰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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