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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 보릿고개 넘어 인생고개
 
통일신문 기사입력  2020/05/27 [10:27]

 <박신호 방송작가>

 뒷동산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하루가 다르게 아낙네의 얼굴색은 점점 근심 걱정으로 어두워지고 식구들의 얼굴색은 궁색이 짙어만 간다. 보릿고개가 닫쳐와서다. 음력 4~5월이면 어김없이 닥치는 춘궁기인지라 인사말이 끼니는 땠나?” “진지 잡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했을 적이 있다. 지지리도 못살았었다. 어쩜 그렇게도 못살았는지, 눈만 뜨면 끼니 걱정이 앞섰으니 목구멍이 포도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십 년 전이다.

내가 보리밥을 처음 먹어본 게 6, 25 전쟁 때 시골로 피난 가서다. 처음 먹어보는 보리밥이 입안에서 뱅뱅 돌면서 넘어가질 않았다. 그래서 구박받으며 겨우 목을 넘기곤 했다. 지금도 보리밥을 굳이 먹지 않는지만 그래도 아주 맛있게 먹은 기억은 있다.

1·4 후퇴 때 (1951)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고 김천에서 한겨울을 방 한 칸에서 아홉 식구가 보내고 초여름에 대전으로 올라가게 됐다. 사람은 트럭 뒤에 탈 수가 없어 이사보따리와 함께 냄새나는 텐트를 뒤집어쓰고 갈 수밖에 없었다. 숨이 콱콱 막혔다. 겨우 점심때쯤 돼서 어느 시골 마을에 정차했다.

꼭두새벽에 나오느라 아침밥도 못 먹어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였다. 밥상이 차려졌다. 보리밥 한 그릇에 반찬이라고는 달랑 마늘종에 된장 하나였다. 하지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아귀처럼 덤벼들었다. 그때 그 보리밥과 그 마늘종 맛은 7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해인가 꼭 요만 때이다. 강원도 치악산 기슭에서 골프를 치고 오다가 시골밥상집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식단은 보리밥에 열무김치와 마늘종, 상추가 전부였다.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한 끼가 있을까. 하도 감탄을 하며 먹으니 친구가 참다못해 그렇게 맛있어? 세끼만 먹어 봐

지겹고 슬픈 보릿고개 시절은 다 지나갔나 싶었더니 코로나19가 덮치면서 너나없이 재난지원금을 감지덕지 받아야 하는 궁색기를 맞았다. 살아생전에 이런 험한 꼴은 보지 않으리라 했더니 어림없는 생각 인가보다. 밖에 벌 일이 있어도 대중교통을 마음 놓고 타기가 꺼려지니 선뜩 나설 수가 없다. 하늘에 삶을 맡기게 된 꼴이다.

지금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큰 시련기를 겪고 있지만 불과 20여 년 전에 난 더 큰 시련을 견뎌내야만 했다. 이치를 깨닫는다는 육십이 돼서 세상이 보기보다 험하다는 걸 알게 되고 뼈저리게 느꼈다. 정년퇴직이 내 삶을 태풍 속에 몰아넣었고 세상 물정에 눈뜨게 한 것이다.

직장생활에서 벗어난 것만도 좋았지만 또래 열 명이 안산회(安山會)란 모임을 만들어 매주 서울 주변 산을 오르기도 하고, 술도 다음 날 숙취 걱정 안 하고 마음껏 마셨다. 한편으로는 글도 마음대로 쓸 수 있어 은퇴 전보다 오히려 바쁜 나날을 보냈다. 더해서 골프도 치기 시작했고 여행도 일정도 정하지 않고 즐겼다. 전문 작가가 됐으면 학문을 더 갉고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인생 즐기기에 빠진 것이다.

책상에 놓인 다이어리에는 계획이 겹친 날이 늘어났다. 평생을 밥벌이하느라 수고했는데 이쯤 즐기는 건 당당하다 싶었다. 새로운 삶은 선택이 아니라 개척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세월은 몸에서부터 서서히 거부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뼈마디가 서서히 충돌하기 시작했다. 별수 없이 골프는 인도어 골프로 만족하고 등산은 수영으로 대치했다. 하지만 믿었던 투자가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고 큰 병으로 입원까지 해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기댈 언덕이 무너진 꼴이다. 설상가상으로 80줄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쓰던 글도 그만 끝내자며 무자비(?)하게 끊었다. 이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일상생활뿐이 됐다. 차마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도 눈물이 앞을 가려 끝까지 다 듣지 못하는데 어느 80대 노부부의 이야기나 되뇌며 긴긴밤을 지새우라 한다.

빨리 걸어야만 걸음이던가. 천천히 걷는다 한들 못 갈 곳이 있을 건가. 한 발자국씩 내딛다 보면 천수인들 못 누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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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5/27 [10:27]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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