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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콰이강 다리'…현재 문화재로만 남아 현대사 증
[철원탐구-6] 승일교…한자 잘못 쓰면 혼난다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9/09/05 [11:38]

철원군 갈말읍에 있는 승일교는 한국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다리다.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장흥리(長興里)와 갈말읍(葛末邑) 내대리(內垈里)를 잇는 한탄강의 다리로 지방도 제463호선에 속해 있다. 2002년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석정 지척에 있는 이 다리는 교량의 노후화로 폐쇄됐고 지금은 바로 옆에 1999년 개통된 한탄대교를 이용한다.

승일교는 철원군 일원이 소련군정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효 지배 영역에 있던 1948년 8월 한탄교(漢灘橋)라는 이름으로 착공됐다.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장이던 김명여의 설계로 러시아식 공법의 아치교로 설계됐다.

 

철원군이 수복된 후 1958년 주한 미군

79공병대와 한국군 62공병대가 미완의

문혜리 쪽 공사 재개…1958년 12월3일

길이 120m의 다리가 모두 완공됐다

 

한국 전쟁 중 큰 공을 세우고 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박승일 연대장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 昇日橋라고 지어졌다는 것

 

공사는 5개의 교각에 양쪽으로 10m의 작은 아치형 다리와 가운데에 각각 50m의 아치형 다리를 세우는 공사였는데 3개의 아치 공사는 완공되고 문혜리 쪽 50m 공사만 미완으로 남겨 놓은 채 중단 됐다.

북한정권은 이 공사를 위해 모든 성인들은 20일씩 노력 봉사를 하도록 했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공사에 참여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또 다리 지지대는 금학산 뒤쪽 담터에서 대부분 조달했고, 돌 깨는 기계는 내대리 백토광산에서 일본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6.25전쟁이 끝나고 철원군이 수복된 후 1958년 5월 주한 미군 79공병대와 한국군 62공병대가 미완의 문혜리 쪽 공사를 재개, 6개월만인 1958년 12월 3일 길이 120m의 다리가 모두 완공됐다.

먼저 공사한 장흥리쪽 아치형 구조에는 좌우에 각각 8개의 홈이 있으나 추가 공사한 쪽에는 홈이 4개라서 바로 다리를 구분할 수 있다. 승일교의 공법은 유럽에서 유행하던 러시아식 상노(上路)아치형 다리로 1자형 교각 위쪽에 상판을 놓는 한국식 교량과 달리 다리 위에 바로 도로가 있는 구조다. 국내에서는 승일교가 상노아치형 다리로는 유일한 다리다.

철원군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김일성이 시작하고 이승만이 끝냈다고 하여 이승만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한자씩 따서 승일교(承日橋)라 했다는 설과 ‘김일성을 이기자’고 해서 승일교(勝日橋)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한국 전쟁 중 큰 공을 세우고 조선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박승일(朴昇日, 1920년~?) 연대장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 승일교(昇日橋)라고 지어졌다는 것이다.

1985년 세워진 승일교 입구의 기념비에도 이를 정설로 소개하고 있고, 비슷한 사례로 같은 시기에 포로로 끌려간 고근홍 연대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의 근홍교가 있다.

이와 관련 일화도 있다. 유홍준이 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권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에 승일교를 소개한 내용이 나온다. 1995년 박승일 대령의 유족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이 책의 출판사인 창작과비평사를 상대로 이 책에 대한 출판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유족은 철원군의 승일교는 박승일 대령을 추모하기 위해서 ‘昇日橋’라고 명명되었는데 책에서는 이승만(李承晩)과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에서 유래한 ‘承日橋’가 맞는 명칭이라고 기술하고 있어 박승일 대령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출판사가 1~8판까지의 책을 수거하고 9판부터 해당 부분을 수정해 출판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유격대 대대장으로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거구와 카이젤 수염으로 이름난 명 지휘관

박승일 대령에 대한 얘기는 이렇다.

1950년 11월 7사단 5연대 소속 무전병으로 근무하다 덕천 전투에서 포로가 된 이기봉씨는 그의 저서 ‘제5전선-장백산에서 임진강까지’에서 포로가 된 박승일 연대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는 포로가 된 뒤 평양 인근 순안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됐다가 1951년 4월 초 탈출 했지만 대동강을 건너다 붙잡혀 평양 사동 교화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시 탈출, 갖은 역경 끝에 그 해 5월 25일 임진강을 넘어 국군 1사단으로 귀대했다.

박승일 대령은 덕천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명단에 올라있다. 포로로 끌려가서 아연 광산인 초산군 화풍 광산 얼음굴에서 고생하다가 다시 분류돼 이동하기 위해 광산 사무소 앞에 전 포로들이 집결했을 때였다. 북한 병들의 포로 인원 점검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었다.

“야! 저기 7사단 5연대장 아녀?”

포로 중에 누가 이렇게 외치며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나는 귀가 번쩍 띄어 그 쪽을 바라봤다. 물론 나뿐이 아니라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봐도 그는 분명히 박승일 대령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골은 너무나 처참했다.

그는 지난 날 6·25전쟁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서부터 이른바 귀신 유격대 대대장(당시 제 5사단 3연대)으로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거구와 카이젤 수염으로 이름난 명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이제 무운(武運)이 다 했단 말인가?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무척 인정 많고 부하를 친형제처럼 아끼던 지휘관이었다. 적병에게도 인자했다.

지난 날 중상을 입고 피를 철철 흘리는 북한군의 포로를 자기 지프에 싣고 의무대로 달리는 걸 보았고 때때로 최전방 초소에 나가 사병들과 산병호에서 비를 맞으며 밤을 지새우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박 대령의 부대(국군 제 7사단 5연대)에 배속되어 낙동강 전선의 영천에서부터 여러 번 전투에 참가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덕천에서 중공군 포위망에 빠져 함께 적중을 헤매다가 헤어지지 않았던가?

그 후 포로가 된 박 대령은 이 수용소 어딘가에 따로 감금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만치 둔덕길 위에서 역시 국군의 고급장교 (대장 또는 대대장급)로 짐작되는 수 명의 다른 포로와 함께 소달구지에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박 대령의 얼굴에 그 인상적인 카이젤 수염이 안 보인다. 스스로 깎아 없애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 쓰라린 심정이 오죽 했을까?

일반 포로들이 모여 서있는 광장 저만치 둔덕길 위에서 박 대령 일행을 태운 소달구지는 이내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위는 착검한 총을 든 5-6명의 북한 병들이 따랐다.

“연대장님!”

포로 가운데 누군가가 이렇게 불쑥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박 대령은 달구지 위에서 머리에 쓰고 있던 방한모를 벗어 우리를 향하여 흔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머리를 죄수처럼 박박 깎지 않았는가?

박 대령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계속 방한모를 흔든다 .

서글픈 듯한 미소를 띄우며...

“연대장님!”

“박대령님!”

포로들의 목 메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잇달아 일어난다.

박 대령은 달구지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두 팔을 쳐들어 포로들의 아우성에 응답을 했다.

“아, 아니! 이 동무들 덜 돼 먹질 않았구만잉! 닥치라우. 쌍...!”

북한 경비병들은 당황해서 포로들의 머리 위에 총대를 휘두르며 악을 썼다.

박 대령을 부르는 포로들의 아우성은 곧 잠잠해져 버렸고 박 대령과 그의 몇몇 고급장교 포로들을 태운 소달구지는 계속 계곡 아랫길로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압송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압송 당하고 있는 본인들도 물론 모르리라. 이것이 박승일 대령의 최후였다.

승일교는 총길이 120m, 높이 35m, 너비 8m로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영화 ‘빨간 마후라’의 마지막 장면 촬영장소로 더욱 유명해졌다. 남북분단의 비극을 간직한 채 이제는 차량 통행이 중단된 승일교. 문화재로만 남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증언하고 있다.

글·사진=양승진 통일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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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05 [11:38]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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