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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하나원 나온 새내기 탈북민들 위해 밑반찬 만들어 찾아가요”
[인터뷰] 서울 개봉동 ‘코다리찜·막국수’ 김도정 대표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9/08/22 [13:49]

탈북민 80%가 여성이다. 분명 북한의 인구도 남녀 반반씩이겠는데 말이다. 북한에서 여자직장인은 결혼을 하면 가사를 명분으로 휴직할 수 있다. 그래도 동사무소에 소속되어 조직생활(학습, 강연, 총화 등)은 꼭 해야 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10년의 군사복무를 마치고 당국에서 지정해주는 회사생활을 하되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이직이나 퇴직은 없다.

회사에 일감이 없어도 출근하여 사회노동(농촌 및 건설장 동원, 주변정리, 행사참여 등)에 참여하고 철저한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45세 미만의 남성은 시장출입이 철저히 금지된다.

현재 시장은 북한주민들의 생계터전이며 여기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다. 거기서 온갖 정보가 오고가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 목적으로 도강(탈북)하는 탈북여성들이다.

탈북여성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한에서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고 산다. 그들은 언젠가 올 통일시대를 앞당겨 사는 ‘통일부부’이다. 서울 개봉동에서 ‘코다리찜·막국수’집을 운영하는 김도정 대표를 만났다.

▶고향이 어디인가?

1974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2녀 3남 중 둘째였다. 아버지는 경성군 자동차사업소 운전수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두 분이 운동선수 출신이며 노동당원으로 당과 국가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1991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국영농장(종자재배 및 생산전문)에 농업노동자로 배치 받았다.

▶직업이 마음에 들었나.

아니다. 부모님의 유전자 탓인지 나는 고등중학교 때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에서 김정일의 방침에 의해 여자축구가 생기고 활성화 되었다. 나는 꼭 체육전문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그렇게 안 되었다.

이유는 아버지가 질병을 앓고 있어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경성에는 뭐가 특이한가?

경성군에서도 경치가 유명하기로 최고인 상온포리에는 1호 특각(김일성·김정일 전용별장)이 있다. 그 지역에 친척(부친의 이모)이 살았는데 명절 때 그 곳을 가려면 2개의 단속초소를 거쳐 신분과 방문목적을 확인해야만 했다. 대충 봐도 곳곳에 호화로운 건물이 많이 있었다. 건물 주변에는 자동보총을 메고 철갑모를 쓴 군인들이 부동의 자세로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다.

해마다 김일성은 7,8월이면 경성군에서 휴가를 보냈다. 풍설에 의하면 여름철 김일성의 체질이 경성군의 풍토와 가장 잘 맞는다고 했다. 김일성이 열차편으로 경성역에 도착하여 승용차로 특각을 향해 가는데 이때 주민들이 거리에 나와 꽃다발을 흔들며 환영한다. 평양에서 열리는 1호행사와 같다고 보면 된다.

 

고등중학교 때 축구선수로 활동

80년대 후반부터 여자축구활성화

체육전문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노동자였기 때문에 좌절

운동실력이 떨어져도 부모가 좋은

직업의 친구는 사범대체육학부 입학

그때부터 사회에 대한 불만 가져

 

▶사회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직장생활 3년 차인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했다. 그때 눈에 보이는 꽃은 전부 김일성 동상과 연구실(김일성 박물관) 앞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열흘이 넘도록 그랬으니 말은 못했지만 내심 불만이 컸다. 내가 소녀시절 ‘아버지 김일성 원수님 보고 싶다’며 아침저녁으로 읍 거리 청소에 나갔다 그 ‘위대한 수령’은 죽어서도 인민들을 고생시킨다고 생각하니 지나간 소녀시절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탈북동기가 궁금하다?

당시 우리 집에서 언니는 시집을 갔고 두 남동생은 군대에 나갔으며 막내 남동생은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식량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4식구 살기가 무척 힘들었다. 김일성이 사망, 아들이 승계하는 북한당국의 행태에 실망한 아버지가 어느 날, “내 보기에 이 사회는 정말 아니다”며 탈북을 권유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네가 우리 집안에서 형제 중 맏이나 다름없으니 가서 돈을 벌어 동생들을 챙기라”는 뜻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브로커를 따라 나서 1996년 10월 10일 두만강을 건넜다.

브로커의 말로 굶지 않고 돈을 벌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넘은 국경이다. 허나 이내 절망했다. 브로커들끼리 서로 연관된 ‘인신매매단’에 걸려 길림성 연변의 농촌지역으로 조선족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돈에 팔린 것이다.

 

식량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4식구

살기가 무척 힘들어…김일성이 사망

아들 승계에 실망한 아버지 탈북권유

형제 중 맏이나 다름없으니 가서 돈을

벌어 동생들을 챙기라는 뜻으로 알고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브로커를 따라

1996년 10월 10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서의 생활은.

다행히 남편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탈북자이기에 항상 불안한 마음이었다. 가끔 출동하는 공안(경찰)을 피하여 여기저기로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공안이 철수하면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어디 갈 데도 없는 사람들이 바로 탈북자들이 아니겠는가. 마을 전체 가구 수는 30호 정도였다.

▶공안에 단속 된 적은 없는가?

4년간 모두 6~7회 정도 공안에 단속되었다. 때로는 현장에서 달아나 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찰서에 가서 뜨거운 눈물로 애원하여 나오기도 했다. 다행히도 북송은 한 번도 되지 않았다. 무척 운이 좋은 편이라고 본다. 주변에 북송된 탈북여성도 많았다. 그런 경우 중국남편들이 브로커를 통해 북한에 돈을 보낸다. 그러면 석방된 탈북여성은 중국에 남겨진 아이 때문에 다시 탈북하기도 한다. 그들의 사연을 다 말하자면 끝이 없다.

▶한국으로 오면서 겪은 일이 많을 것 같다.

중국에서 11년 동안 살면서 몰랐던 것은 한국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원래 탈북은 한국으로 갈 목적으로 했지만 중국으로 넘어오자마자 ‘인신매매단’에 팔려 시집을 갔다. 또 아이와 가족이 생기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2007년 12월 브로커를 통해 중국을 떠나 몇 나라를 지나 태국으로 갔다.

중국과 달리 태국은 탈북자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여 국제법에 따라 한국으로 보내준다. 수감자 1인당 현지 돈 3,000바트(한국 돈 9만 원 정도)의 벌금을 물고 재판을 받는다. 탈북자신분을 증명하고 한국행 목적을 밝히는 것이다.

탈북자 속에서도 차이가 있다. 돈 없는 사람은 나중에 받는데 약 한 달간 차이가 난다. 그러니 내부에서 마찰이 생겼다. “태국정부가 돈벌이 목적으로 수감자들을 천천히 보내준다”며 그에 대한 항의로 탈북자들이 단식을 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단식소식은 탈북자들이 몰래 갖고 있던 핸드폰으로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전달되었고 그것이 언론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태국 정부가 탈북자들의 인권을 유린한다”고 서방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바빠 맞은 이민국 책임자가 탈북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고 1주일 만에 단식은 끝났다. 2008년 4월에 있은 일이다.

 

굶지 않고 돈 벌수 있다는 환상 갖고

넘은 국경에서 브로커들끼리 연관된

‘인신매매단’에 걸려 길림성 연변의

농촌지역 조선족 남자에게 시집 가

 

▶언제 한국에 입국했으며, 정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나?

2008년 5월 16일에 태국을 떠나 한국으로 입국했다. 그해 8월 3일 하나원을 나왔고 서울시 양천구에 있는 임대아파트 배정을 받았다. 12년 동안 타국에서 불안해하며 살던 심신이 “이제는 잡혀갈 일이 없겠구나!” 하였다. 그러니 막상 다른 현상이 생기더라. 12년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서인지 정신이 절반 나간 사람처럼 멍멍해지더라. 밥도 못 먹겠고 잠도 오지 않더라. 3일을 굶어보니 빈혈이 생기고 급기야 병원에 까지 갔었다.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다. 정착금으로 받은 300만원은 집을 받고 온 나를 문 앞에서 기다리는 브로커에게 모두 주었다. 통장에 돈 1전도 없으니 월 임대료 20만원 고지서를 보고 “정부에서 나에게 왜 이렇게 비싼 집을 배정해주었지? 살기 힘들면 죽으라는 소리인가?” 하는 오해까지 했다. 그러면 안 되겠다하고 일어나 일자리를 찾았다.

거주지 주변에 위치한 작은 핸드폰조립회사에 취업했다. 월급이 85만원인데 집 임대료와 생활비 나가고 중국에 있는 아들 보호자에게 보내주고 나니 통장에는 한 푼도 안 남더라. 그래서 3개월 만에 다른 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원에 있는 전자제품조립 회사인데 월급은 170만원이었다. 여기를 다니며 새롭게 만난 한국남성과 결혼을 하여 아이 둘을 낳고 산전산후 휴가비도 받아보았다. 근로 장려금도 꼬박꼬박 모아 아이들을 위해 저축했다.

 

그동안 안 쓰고 안 먹고 저축한

6천만 원으로 2018년 5월 오픈

바닷가 지역이었던 고향 향수로

명태가공 일을 하면서 재미 붙여

식당 하면 황태음식 팔겠다 생각

 

▶한국정착에 나름대로 자신을 가질 수 있었겠다. 식당은 언제 개업했나?

그동안 일하면서 안 쓰고 안 먹고 저축한 돈 6천만 원으로 2018년 5월에 이 자리에 오픈하였다. 내가 여기 저기 TV에 나가서 소개되었는데 사람들이 조금은 의아해 한다. “탈북민인데 왜 북한음식도 아닌 남한음식인가?”고. 그럴 때는 “탈북민이라고 꼭 북한음식을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고 되묻는다.

▶남한음식을 시작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사실은 시댁이 강원도와 가까운 경기도 가평이다. 아이를 낳고 유아휴직 때 시댁에 있으면서 황태덕장(명태를 자연에서 건조하는 것)일을 조금 하였다. 바닷가 지역인 내 고향 향수로 명태가공 일을 하면서 재미가 붙었다. 그때 이미 결심을 했다. 꼭 식당을 하면 황태(명태) 음식을 만들어 팔고 싶었다. 다행히도 남편이 그때나 지금이나 두 팔 걷고 나서 도와주니 정말 고맙다. 내가 아이 두 명이나 낳아주었으니 조금 큰소리치면서 산다.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던데, 어떤 활동을 주로 하는가?

올해 1월부터 서울남부하나센터 소속 ‘소망두레봉사단’ 단장을 맡았다. 20여 명의 탈북민들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이다. 지난 6월 29일 북한 바로 알리기 행사의 일환으로 양천구 행복한백화점 앞에서 북한음식시식회를 했다. 회원들이 만든 5가지의 북한음식을 시민들에게 무료 제공해주며 북한 문화를 알리려고 열심히 준비했다. 또 매주 한 차례씩 하나원을 나온 새내기 탈북민들에게 밑반찬을 만들어 갖고 찾아간다. 그때 분명하게 “무엇보다 빨리 한국음식에 적응하라. 남한의 어느 지역음식이든 다 맛있어야 그것이 진정한 정착이다”고 말해준다.

매월 정기적으로 지역의 양로원을 찾아 노인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리고 그들의 목욕을 도와준다. 개인적으로 그 때가 가장 보람되고 “나도 뭔가를 다”는 자긍심이 드는 행복한 순간이기도 하다.

 

올 1월부터 서울남부하나센터 소속

‘소망두레봉사단’ 단장 맡아 20명

탈북민들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으로

6월 양천구 행복한백화점 앞에서

북한음식시식행사…회원들이 만든

5가지 북한음식 시민들에게 제공

북한 문화 알리려고 열심히 준비

 

탈북민들이 국민세금 축내는 존재

로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

당당히 세금을 내면서 사는 국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부가 진정 우리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하는지 다소 의문스럽다. 몇 년 전에 모 기관에서 공모한 사업자모집에 참여해서 받았던 불이익이 억울해 청와대에 민원을 넣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답변을 받는데서 탈북민이니 통일부로, 통일부에서 산하 재단으로 서류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그리고 남한사람들은 탈북민들이 국민세금이나 축내는 존재로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본다. 우리도 당당히 세금을 내면서 사는 국민이다. 남한여성들이 낳기를 주저하는 아이도 많이 낳으니 탈북여성들은 애국자 아닌가?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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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8/22 [13:49]  최종편집: ⓒ 통일신문
 
정착금이 세금이다. 구구 19/09/23 [17:36] 수정 삭제
  임대 집 마련해주고. 정착금 300만원이 국민세금이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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