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편집 2019.12.14 [00:01]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정치  경제  군사/외교  사회/NGO  탈북민  인터뷰  통일교육  오피니언  북한풍물기
인터뷰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북녘의 보고 싶은 얼굴 그리며…정든 목소리 전파에 담아 보낸다
[인터뷰] KBS한민족방송 이소연 프리랜서 MC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9/08/01 [13:39]

북한에서는 남한의 방송을 들을 수 없다. 모든 TV, 라디오에는 정부가 규제한 채널고정 봉인표시를 부착해야 한다. 국내산 혹은 수입산 제품이든 TV와 라디오가 출시(세관통과 수입) 될 때부터 채널고정을 시킨다. 북한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편법이 있기 마련이다. 불법적이지만 일부 주민들은 라디오채널 고정을 해제하고 몰래 외부의 방송을 듣기도 한다. 그 중에서 중국조선족 방송인줄 알고 들었다는 방송이 바로 ‘KBS 한민족방송’ 이다.

이 방송을 지속적으로 듣다보면 어느 부분에서인가 ‘여러분이 청취하는 이 방송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내보냅니다’라는 ‘놀라운’ 소리도 나온다. 실제 탈북민들 중에는 당국의 금지물인 이 방송을 듣고 탈북한 사람도 있다.

북한주민들이 남몰래 KBS 한민족방송에서 많이 듣는 프로그램은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이다. 이 유명프로그램의 15년 진행자(MC)가 있다. 서울 여의도에서 이소연 KBS 한민족방송 프리랜서 MC를 만났다.

▶ KBS 한민족방송은 어떤 방송인가.

한민족방송은 KBS 라디오채널 중 하나로 멀리까지 전파를 보내기 위해 아직도 유일하게 AM 주파수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KBS콩’ 앱을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다시 듣기까지 가능해서 전 세계 한민족 동포들이 고국의 다양한 소식과 문화, 정보에 이르기까지 청취가 가능하다.

1992년 한중수교 이전에는 공산권 동포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다른 점, 고국의 소식 등을 알 수 없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고향을 떠난 북간도, 사할린, 중앙아시아 지역의 동포들에겐 소리의 등대 같은 방송이었다.

처음에는 ‘사회교육방송’이라는 명칭이었으나 2007년부터 ‘한민족방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제는 스마트 폰으로도 자유롭게 청취할 수 있다. 탈북 동포들도 이 방송을 듣고 ‘남조선’의 정식 국호가 ‘대한민국’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니 70년 분단의 세월이 가져온 아픔도 더욱 크게 다가온다.

▶ 방송내용이 주로 어떤 것이었나.

사회주의 국가 동포들에게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과 그들이 듣지 못하는 고국의 소식을 전했다. 그동안 알 수 없었던 헤어진 가족들의 사연을 위주로 가족 찾기를 최초로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프로그램이었다. 1972년 ‘사할린 동포에게’로 제목의 방송을 시작한지 몇 달 후 사할린에서 제3국을 거쳐 편지를 받았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고 당시 선배들 이야기를 들으며 더욱 방송의 내용에 신경을 썼다.

1992년 8월 한중수교 후 방송내용이 달라졌다. 한국과 중국 동북3성, 러시아 사할린에 있는 가족을 찾아주는 이산가족 찾기가 더욱 활기를 띄었다. 그동안 이질화된 인식과 문화에 대한 동질성 회복으로 동포들과 하나 되는 내용은 더욱 풍성해졌다.

▶ 어떤 방법으로 가족을 찾아주었는가?

미국과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냉전시대 종료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인 ‘88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은 비약적인 성장을 누렸다. 88올림픽으로 인해 중국과 러시아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한국에 부러움을 금치 못하던 시기였다. 당시 KBS 사회교육방송 앞으로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가 왔다.

한국에 있는 가족·지인의 인적사항을 담은 내용이다. 허면 방송국에서는 그것을 일일이 해당지역 경찰서로 보냈고 확인되면 방송으로 공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초대되고, 고국을 방문하여 가족을 상봉했다.

 

KBS콩’ 앱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다시 듣기까지 가능…전 세계 한민족

동포들이 고국의 다양한 소식과 문화

정보에 이르기까지 청취할 수 있어

 

▶ 한중수교 전과 이후로 방송이 달라졌겠다.

1980년대 말 이후 동구권사회주의가 줄줄이 무너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1992년 8월 24일, 중국 베이징 영빈관에서 한중수교가 있었다. 그전까지 공산이념, 고국소식, 이산가족 찾기 위주였는데 9월부터 화해, 정보공유, 소통의 방송으로 변했다.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궁금하다.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였다. 아마도 그때만큼 사람들이 라디오 앞에 모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때 방송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인간사회에서 전파의 힘이라는 것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할 분야였다. 전 국민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방송이라는 특수성에 대한 긍지도 분명하게 있었다. 당시 에피소드가 있다. 1999년 가을 경 중국 연길에 가서 우리 방송(KBS 사회교육방송) 청취율조사를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한국에서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서 내가 두 번째로 꼽혔다.

“이소연 아나운서가 결혼 했느냐?” “목소리만 듣고는 20대 아가씨인 것 같다” 등의 행복한 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그만큼 애청자들이 나를 응원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1999년 가을 경 중국 연길에서 KBS

사회교육방송 청취율조사…‘한국에서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이 누구인가?’

질문에 김대중 대통령, 이소연 MC

애청자들 응원에 더 노력할 것 다짐

 

▶ 언제부터 북한주민들을 대상으로 방송했나.

중국 동북3성에서 서울로 보내오는 동포들의 편지 속에는 간혹 탈북자들의 편지도 있었다. 내용은 남한에 있는 친척 문의도 있었지만 서울의 경제발전 상에 대한 궁금증을 비롯하여 어떻게 하면 남한으로 올 수 있는가? 등 이었다.

당시에도 중국은 탈북자를 ‘불법월경자’로 취급하고 북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들에게 남한에 입국한 선배들이 직접 체험한 경험이나 조언을 방송해주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말이다.

▶ 좀 더 자세히 말해준다면.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사할린, 북한 동포들에게 남한의 발전상을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고 봤다. 한편 남한에 들어온 탈북민들이 북녘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를 내보냈다. 실제 남한에 온 중국동포나 탈북민들 중에는 한중수교 이전부터 중국과 북한에서 KBS 한민족방송을 라디오로 들었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 탈북민 방송은 언제부터 있었나.

북한에서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1990년대 중후반에 최악의 경제난인 ‘고난의 행군’이 있었다. 이때부터 남한으로 입국한 탈북민이 크게 늘었다. 1년에 평균 수백 명씩 들어오다가 2000년 이후 1.000명씩 입국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고향의 부모형제에게 안부의 인사와 자기의 근황을 알려주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출연자가 있다. 탈북여성 최미라(가명) 씨는 중국에서 인신매매 단에 걸려 흑룡강성 외진 심심산골에 살았다. 그녀는 쓰레기장에서 얻은 라디오로 우연히 우리 방송을 듣고 남한으로 오려고 했으나 남편의 구타와 감금으로 온갖 고생을 했다. 보다 못한 자식의 하소연으로 남편이 겨우 승낙을 하여 한국에 올 수 있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부터

남한으로 입국한 탈북민 크게 늘어

1년에 평균 수백 명씩 들어오다가

2000년 이후에는 1.000명씩 입국

그 많은 사람들이 고향 부모형제에

안부인사, 근황 알려주려 편지 보내

 

▶ 탈북여성 한 부모 가정도 많던데.

지방에 사는 김하옥(가명) 씨는 탈북으로 인해 10여년 갈라졌던 아들을 데려오고 기쁨은 고사하고 고민이 생겼다. 10여년이나 엄마를 원망하며 자란 아이의 감정이 보통 아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우리 방송에 모자(母子)가 함께 출연하여 서로가 마음을 풀었다. 그 아들은 현재 한국에서 의대에 다니고 있다.

▶ 또 다른 사연의 주인공을 말해 달라.

고난의 행군시기 15살 난 아이를 데리고 중국으로 식량구입을 떠난 아내를 둔 남편이 있었다. 2~3년이 지나도 아내에게서 소식이 없자 남편이 중국과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까지 왔다. 혹시나 한국에 왔을까 해서이다.

탈북민은 신분의 특성상 100% 정부의 조사를 받고 관련기관에 등록이 된다. 한국에도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가진 그 탈북남성은 지금도 혼자 산다. 통일되면 혹시라도 고향으로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겠다면서 말이다.

▶ 탈북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실향민이 제1이산가족이라면 탈북민은 제2이산가족이다. 분단과 휴전의 비극인 이산가족문제 만큼은 정치, 체제, 이념을 떠나 즉각 해결돼야 한다. 고향의 형제를 못 만나고 세상을 뜨는 실향민 어르신과 탈북민이 많다. 무엇보다 남북당국의 공통적 문제인식과 그 해결을 위한 공동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자신을 소개해준다면.

서울에서 태어났다.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때 KBS 공채 3기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결혼과 함께 퇴사하며 1983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KBS 1TV ‘여성응접실’ ‘오후의 교차로’를 진행하였고 KBS1 FM ‘FM희망음악’ ‘영화음악실’ ‘음악과 시’ 등을 맡아 진행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즈음부터 KBS 사회교육방송 ‘귀순용사와 함께’ ‘우리들은 동향인’ ‘성공시대’를 함께 했다.

▶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언제부터 했나?

1992년부터 10년 동안 진행하다가 ‘종교와 인생’ ‘서울살림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등의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가 2014년부터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애청자들과 다시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고 그때 애청자들과의 해후는 나에겐 가장 큰 기쁨이었다. 15년째 고정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례도 흔치 않다. 이 지면을 빌어 애청자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실향민이 제1이산가족이면 탈북민은

제2이산가족…분단과 휴전의 비극인

이산가족문제 만큼은 정치, 체제, 이념

떠나서 즉각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해

남북당국 공통적 문제인식과 해결을

위한 공동노력이 있어야 한다 ‘기대’

 

▶ 실향민 가족이라던데.

5년 전 9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고향이 이북이다. 1·4후퇴 때 혈혈단신 남하하여 서울 태생의 어머니와 가족을 이루었고 3녀 1남을 두셨다. 내가 형제 중 맏이고 장녀였으니 별명이 왕초였다. 쩍하면 군기를 잡는다며 소란을 피웠으니 동생들이 벌벌 떨었다(웃음). 그때가 제일 즐거운 시절이었다.

▶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많이 있겠다.

1972년 경기도 파주에 임진각이 생겼다. 해마다 추석이 오면 아버지는 온 식구를 데리고 임진각에 가셔서 이북 고향에 계시는 부모형제를 무척 그리워했다. 북녘 하늘을 바라보시며 부모형제 고향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다. 가족 그리움이 얼마나 크셨을까 한다. 그때는 그 마음을 미처 몰랐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우리 딸이 KBS 이소연 아나운서’라고 늘 자랑했고 내 방송을 꼭꼭 모니터링 해주셨다. 다른 어떤 방송보다 한민족방송을 진행할 때는 어린애마냥 너무 좋아하셨다. 아마도 내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고향 향수를 늘 느끼며 생활했기에 지금도 애청자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는 것 같다.

▶ 가장 보람이 있었던 때는.

중국과 사할린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찾아가 동포들과 직접 만나 위문공연을 하며 손잡은 순간들이다. 함께 두 손을 손잡고 감격에 겨워 노래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시간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며 동포의 위상을 높이는 모습에 감사하다. 언젠가는 북한주민들과도 꼭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한국에 와서 활동하는 80만 중국동포들과 3만 탈북동포들은 언어는 같다고 해도 이질화된 문화와 낯선 환경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까 안쓰럽다. 그러나 KBS 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가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다.

탈북민들은 통일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부디 힘내서 모두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고향에 남겨진 부모형제들에 대한 도리이다. 또한 ‘먼저 온 통일’로 남북사회 통합에 큰 도움이 되어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림일 객원기자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9/08/01 [13:39]  최종편집: ⓒ 통일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회원약관 개인정보취급방침 회사소개 한국통일교육학회 기사제보 보도자료
(140-806)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5-3 남영빌딩 201호
(주)통일신문(TEL:02-701-8347 FAX:02-701-8345)
Copyright ⓒ 2007 unityinfo.co.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