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2019.06.19 [16:01]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정치  경제  군사/외교  사회/NGO  탈북민  인터뷰  통일교육  오피니언  북한풍물기
인터뷰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탈북민이라면 손해를 당하는 편…그런 시선도 이겨 내야지요”
[인터뷰] 수선사 일에 열중하는 이금단 패션디자이너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9/03/21 [11:26]

만약 정부가 국민들의 개인예금(은행에 저축한 돈)에서 만원을 천원으로 바꿔준다고, 그것도 일정 금액에 한에서 그런다면 어떤 현상이 생길까? “세상에 이런 날강도 같은 정권이 다 있어?” 하고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실제 그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간악무도한 당국에 아무런 말조차도 못하고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나라가 있을까? 있다. 우리와 한 핏줄인 동포들이 사는 북한사회가 그렇다. 북한에서는 지난 2009년 11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 기습적으로 ‘화폐교환’을 실시했다.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교환 자체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써 전혀 문제가 없지만, 교환 가능한 금액을 세대(가족) 당 10만원으로 한정하고, 나머지 금액은 국가은행에 맡겨야 하는 이상한 규칙이 북한 사회에 상당한 충격과 공황을 발생시켰다.

이때부터 북한주민들은 국내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맡기기는 쉬워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은행에 돈을 맡긴다는 것은 국가가 돈을 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009년 화폐개혁 당시 증언을 취재하려고 패션디자이너 겸 수선일을 하고 있는 이금단 탈북민 여성을 만났다.

▶고향이 어디인가?

1957년 12월 자강도 희천에서 4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부친은 희천공작기계공장 공학연구소 설계기사, 모친은 주부였다. 본 연구소는 6·25전쟁 이후 김일성의 현지교시에 의해 평양에 있던 기계공학연구소가 내려온 것이다.

희천은 지형적으로 군수품공장이 있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다. 북한의 군수품공장은 전부 지하화 되어있다. 아마도 김일성이 휴전이후 다음 전쟁에서는 꼭 승리하겠다는 야망이 컸음으로 군수공업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1974년 8월 전평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강계의학대학에 추천 받아 입학하였다. 그런데 ‘사회적 노동력이 모자란다. 사회주의 대 건설장으로 고교졸업생(73년, 74년 졸업생)들을 많이 진출시키라’는 당국(노동당)의 지시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사람들은 전문학교로, 전문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현장으로 한 단계씩 내려서 사회로 강제 진출시킨 것이다. 나는 희천공업전문학교(3년제 현재는 희천공업단과대학)에 입학, 1977년 8월에 졸업하였다.

▶이후 경력은 어떻게 되는가?

1983년 여름까지 희천공작기계공장 설계사업소 전기설계실 설계원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결혼을 하였고 함경남도 단천시로 시집을 갔으며 단천영예군인공장 설계원으로 일을 하였다. 그 직업에서 11년간 했는데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 전역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끔찍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단천시 경우 1992년 93년부터 식량배급이 들쑥날쑥 형식으로 한 달에 며칠 분주고, 또 어떤 때는 전혀 못주기도 하다가 김일성 사망 이후는 완전히 배급이 끊기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오직 먹을 것(음식)을 찾는 광기만 어렸다. 하루 자고 나면 ‘어느 집 식구들이 죽었다’ 또 하루 새면 ‘누구네가 죽었다’ 하는 소리만 들렸다.

 

희천공작기계공장에서 설계원으로 근무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 전역에

굶어죽는 사람 속출…‘고난의 행군’ 시작

식량배급 한 달에 며칠분 주고, 어떤 때는

전혀 못주기도 하다가 완전히 배급 끊겨

 

▶사람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겠다.

물론이다. 당시 10살 미만의 두 아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굶어죽겠다 싶어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래도 여자니까 사직서제출이 가능하지 남자들은 어림도 없다. 북한남자들은 종신토록 당국에서 지정한 직장에서 일해야 한다.

이후 시장출입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재단과 미싱(재봉) 기술을 배웠다. 그때 각 공장(기업소)들에서 자기네 공장 직원 단체복 만드는 임가공이 많았는데 각자 개개인에게 할당하기도 했다.

하루 평균 14~16시간의 노동을 했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대략 20벌의 노동복(단체복)을 만든다. 그렇게 번 돈으로 식량을 사먹는데 두 아들, 남편 이렇게 4식구가 옥수수밥이나 국수라도 끊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이 일을 6개월간 하다가 이후에는 중국컨테이너 중고 옷 소매장사를 하였다. 제법 이익이 남는 장사다.

 

10살 미만의 두 아들이 굶어죽겠다 싶어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 시장출입 하면서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재단과

재봉기술을 배운 것을 요긴하게 활용 해

공장직원 단체복 만드는 임가공 많았는데

개개인에게 할당…하루 14~16시간 노동

 

한 달에 20벌의 노동복 만들어 번 돈으로

두 아들, 남편 이렇게 4식구 옥수수밥이나

국수라도 끊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시장(장마당)에 대해서 말해 달라.

고난의 행군(지방마다 1~2년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1996~1999년 기간, 이때가 북한의 경제상황이 가장 안 좋았던 것이다) 이전에는 시장을 통제하였다. 자본주의 요소물이라며 합법적은 물론이요 임시로 생기는 시장도 허용 안했다.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서서히 묵인하면서 이후에는 합법적으로 승인해주는 체계로 전환하였다. 더 나아가서 상인들로부터 시장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운영하는 북한의 시장이다. 2000년 이후부터다.

2001년부터 시장 상인들의 돈을 받아 시장을 건설하였다. 말이 건설이지 그냥 넓은 공터에 비막이 지붕만 설치한 것이다. 그래도 공식적인 시장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여기에 1인당 자리는 가로세로 60cm 규모인데 이 자리 값이 만만치 않다. 그전에 있은 화폐개혁으로 돈으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대략 쌀 20~30kg 살 금액이다.

▶자리 값이라면? 보증금 아닌가?

아니다. 그 돈을 지불해야 시장관리소로부터 그 자리를 배정 받을 수 있으면 상인이 그 자리를 나올 때는 돌려받지 못한다. 그냥 국가에 바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매월 내는 시장사용료는 대략 쌀 1~2kg 살 금액이다. 단천시장의 경우 자리는 대략 1200석 규모였다. 이걸 관리하는 인민위원회 소속 사람은 5~6명이다.

시장 자리 수요는 대단히 높다. 일단 시장 안에서 장사는 합법적이기에 안심한다. 그렇지 않고 시장 밖에서 하는 불법적인 장사는 항상 단속반에게 쫓기어 다니는 신세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 단속원들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어떤 물건이든 강제로 압수당할 수도 있다. 정상적인 물건이라도 시장 밖에서 판매하면 위법이 되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시장 서서히 묵인하면서

이후에는 합법적으로 승인해주는 체계로 전환

상인들로부터 시장세금을 거둬들이면서 운영

북한의 시장은 대략 2000년 이후부터 활성화

시장안에서 장사는 합법적…시장 밖에서 하는

불법적 장사는 단속반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

 

▶단속반원이라면 어떤 사람들인가?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우선 OO상무 그루빠(특정시기 마다 조직되어 활동하는 단속반 주로 시당 소속), 보위원(시장 관할 경찰), 그리고 기동대(시 경찰) 등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단속원이 상인 자리에 와서 물건 1개를 갖고 간다.

그러면 뇌물을 갖고 찾아가라는 신호다. 허면 울며 겨자 먹기로 가서 술이나 담배를 찔러준다. 물건 값에 따라서 술·담배 규모가 다르다. 그렇게 한 달간 단속원에게 상납하는 술은 2~3병, 담배 20갑 정도. 안 그러면 더 골치 아프다.

----------------------------------------

북한당국은 2009년 화폐교환 때 일주일간의 시간을 주면서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바꾸어주었다. 그해 11월 시장에서 쌀값은 kg당 구권 2200원 가량이었다. 그러니 20원 정도에서 쌀값이 형성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하지만 2009년 12월 중순에는 50원, 2010년 1월 초에는 150원, 1월 중순에는 300원, 1월 말에는 600원 수준까지 쌀값이 폭등하였으며 800원까지 오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2개월 만에 물가가 최소 30배 이상 급등하였다.

가장 큰 원인은 만성적인 식량 및 생필품 공급 부족이다. 북한당국은 2010년 1월 들어 위안화(중국화폐)를 비롯한 모든 외환을 사용한 거래를 사실상 금지시켰으며 시장에서 거래되는 인민생활 상품 중 70% 이상이 중국산이었다.

일반 주민들과는 달리 간부들은 북한 화폐를 더는 믿지 못하여 진작부터 금, 달러, 유로화, 위안(元)화 등으로 재산을 저장해왔었다. 하여 간부들과 돈 주(큰 상인)들은 위안화나 달러화로 물건대금 거래를 하였기에 큰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시장의 장사꾼들의 경우 현금을 상대적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직격탄을 맞았다. 어떤 상인은 휴지보다 못한 북한화폐를 모두 몇 자루 강물에 버리고 자신도 그 강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불태운 것은 다반사였다.

주민들이 그동안 피땀으로 벌은 노력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여기저기서 화폐교환으로 빚어진 각종 인명피해가 도출했다. 결국은 당국이 주민들의 쓰지 않는 돈을 빼앗지 못해 무효화 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풍설에 의하면 당시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임을 공표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일이 이 화폐교환이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실패로 끝나자 이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김정은 측에서 2010년의 천안함 폭침을 기획했다는 소리도 있었다.

▶탈북하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여동생이 먼저 탈북해서 남한에 왔었다. 2011년 남편이 질병으로 사망했고 두 아들의 장래를 걱정했다. 큰아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 있겠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작은 아들만을 데리고 2011년 3월 양강도 혜산시 근처 압록강을 건넜다. 여동생이 보낸 브로커의 도움으로 라오스, 태국을 거쳐 6월 4일 한국에 왔다.

 

여동생이 먼저 탈북…2011년 남편이 사망

그해 작은 아들만 데리고 3월 양강도 혜산

근처 압록강 건너 여동생이 보낸 브로커의

도움으로 라오스, 태국 거쳐 6월 한국입국

 

▶사회에 나와서 무엇을 하였나?

2011년 11월 하나원을 나와 서울시 강서구에 있는 요양보호사학원을 다녀 자격증을 취득하고 우장산 천사요양원에 취직하였다. 여기서 거의 3년 가까이 근무하였다. 보람이 있었다.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

이후 대형마트 입점 모 수선(패션디자인) 체인점에 입사하려고 했는데 부결되었다. 이유는 탈북민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열 받아서 서울 중부시립기술교육원 패션디자인과 1년간 공부를 마치고 당당하게 자격증을 갖고 그 업체에 취업했다.

7년 전인가 서울에서 북한인권운동을 하시는 남한 분이 전화가 왔다. 자신의 단체에서 탈북민 수기를 책으로 내는데 여기에 삽입할 그림을 몇 개 부탁하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많았고 지금도 꾸준히 그리고 있다.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때 그린 그림은 탈북여성들이 중국에서 트럭에 실려 북송되는 장면, 보위부 감옥에서 잠을 재우지 않는 장면, 탈북여성이 중국에서 임신한 신생아를 보위부에서 물그릇에 담겨 자신이 죽이게 하는 장면 등이다.

 

북한인권운동 하는 분이 자신의 단체에서

탈북민 수기 책으로 내는데 여기에 삽입할

그림을 부탁하기에 흔쾌히 승낙,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많았고 꾸준히 그리고 있어

 

남한 남성들이 결혼 상대의 탈북여성을

보는데 대게 가난한 북한에서 못 먹고

배우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어 ‘서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54세에 자유의 땅 서울에 와서 주변의 요청도 있고, 결혼업체의 주선으로 재혼을 하려는 마음으로 남한남자 세 분을 만나보았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일부 남한 남성들이 결혼 상대의 탈북여성을 보는데서 대략 가난한 북한에서 못 먹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고향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할 일 찾고 있다. 때가 되면 나도 일어나 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림일 객원기자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9/03/21 [11:26]  최종편집: ⓒ 통일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회원약관 개인보호정책 회사소개 한국통일교육학회 기사제보 보도자료
(140-806)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5-3 남영빌딩 201호
(주)통일신문(TEL:02-701-8347 FAX:02-701-8345)
Copyright ⓒ 2007 unityinfo.co.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