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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은 북 현실의 증인…통일교육에도 이만한 적임자는 없다”
[인터뷰] 탈북재단사 출신 김선녀 통일안보강사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9/03/07 [15:27]

요즘 언론 매체에서 북한의 어두운 사회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 대부분 평양과 대도시의 밝고 아름다운 그림뿐이다. 꽃제비, 기계가 멎은 공장, 허름한 살림집,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의 안쓰러운 얼굴 등 과거 북한의 어지러운 풍경은 잠시 악몽에서 보았지 않았을까? 착각이 들 정도로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면 북한의 경제상황이 좋아져서 과거처럼 아사자나 유랑걸인이 없을까? 또한 수령인 김정은을 비판하면 아무렇지도 않을까? 정말 우리와 별다름 없이 행복한 사람들이 많을까? 그에 대한 확실한 증언자는 바로 탈북민들이다.

최근 입국하는 탈북민들의 증언을 들어봐도 국가서 식량배급을 안 주는 것은 여전하고 사적인 자리서도 수령 김정은이나 노동당을 비판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직도 북한주민들의 정신 사상을 옥조이는 ‘생활총화’(북한주민들이 한 주간 조직에서 자기의 사상을 총화 받고 남을 비판하는 회의)도 변함없다고 한다.

정권이 국민의 투표로 바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남한서 통일안보 교육은 특별하다. 가장 적임자가 바로 탈북민이고 그들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바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탈북민 김선녀 통일안보강사를 만났다.

▶고향과 학력, 경력을 말해 달라

1969년 4월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태어났다. 북한최대의 철광생산기지인 무산광산연합기업소가 있으며 국제적 규격으로 봐도 품질이 좋은 북한 철광생산량의 40%를 이곳에서 생산한다. 우리 형제는 4남매고 내가 둘째였다. 아버지는 ‘무산군외국인숙소’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무산광산유치원 교양원(교사)이었다.

무산광산연합기업소는 국제적인 기업이어서 러시아, 중국기술자 및 무역 관계자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그들을 위한 일종의 국제호텔이 ‘무산군외국인숙소’이다. 그 안에는 당구장, 외화상점, 영화관, 커피숍 등이 있다.

1985년 8월 무산호곡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북도 안전국장(남한의 지방경찰청장)인 고모부의 영향으로 청진상업학교(2년제)에 입학했다. 87년 졸업 후 청진시 수남구역 편의봉사사업소 양복점 재단사로 직업 배치를 받아 일했다. 고모부 덕에 무산에서 벗어나 도시인 청진으로 와서 공부하고 일할 수 있었다.

▶재단사는 인기 직업이 아닌가?

제조, 건설, 생산 등 어렵고 힘든 노동 현장과는 달리 깨끗한 환경의 실내에서 일한다는 장점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재단사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옷을 만들어주고 또 고쳐주는 일로서 나름대로 선망하는 직업 중에 하나이다.

1995년에 결혼을 하고 사직을 했다. 북한에서는 여자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살림을 명분으로 재직 중인 공장(회사), 기업소에서 사직할 수 있다. 이것은 평생토록 사직할 수 없는 남자들에 비하면 엄청난 특혜라고 봐야한다.

 

1969년 함북무산군서 출생…최대 철광기지

품질 좋은 생산량의 40%를 이곳에서 생산

청진상업학교 입학, 졸업 후 편의봉사사업소

양복점 재단사로 직업 배치를 받아 일해

 

▶사직하고 무엇을 하였나?

고난의 행군(최악의 식량난이 초래된 1990년대 중후반)시기 국가에서 주는 식량은 전무하고 사람들은 전부 장마당에 의존하여 생활하였다. 나는 개인부업(당국의 통제를 피해서 하는 개인사업)을 하였다.

7명의 주부 재봉공에게 재단한 옷감을 주어 1인당 월에 솜옷 1벌, 쫑대바지(몸에 착 붙는 바지, 일종의 청바지) 4개씩 만들게 하였다.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면 두 배의 이익이 생겼다.

6년 쯤 지나 옷장사로 청진과 무산을 오고가면서 우연히 한 청년을 알게 되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어린 안전원(남한의 의무경찰)인데 골동품 운송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 청년의 제안으로 골동품매매업을 하게 되었다.

골동품은 주로 개성, 황해도 지역에서 발굴된 조선백자, 청자, 고려백자 등이다. 그것을 감별하기 위해 몇 달은 도서관에 몸을 파묻고 전문공부까지 하였다. 또한 청진시내 교외 모처에 화로를 만들어 모조 공예품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고난의 행군시기 국가에서 주는 식량 전무

사람들 장마당에 의존해 생활…개인부업

주부 재봉공에게 재단한 옷감 주어 1인당

매월 솜옷 1벌, 쫑대바지 4개씩 만들게 해

시장 내다 팔면 두 배의 짭짤한 이익 생겨

 

▶중국에서 북한 골동품은 왜 수집하는가?

사실 본토 중국인들은 북한 골동품에 관심이 없다. 중국 동북3성에 사는 조선족동포들이 북한에서 나온 골동품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에는 돈 많기로 소문난 한국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암암리에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단속이 되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하지만 또 공안에게 뇌물을 주면 풀려난다.

▶돈도 많이 벌었을 것 같다. 그만큼 어렵고, 위험한 순간도 있었겠다.

남들이 하던 말 중에 “고려청사, 조선백자 등 오래된 골동품이 돈이 된다!” “조금 위험해도 돈 되는 장사는 바로 골동품이다!” 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정말 돈이 되더라. 내가 북한에서 골동품장사를 하면서 3개월에 최대 1만 달러까지 벌어보았으니 말이다.

번 돈은 부모형제와 골고루 나누어 썼다. 하여 우리 집 식구들은 남들이 옥수수죽도 겨우 먹을 때 쌀밥을 먹으며 살 수 있었다. 당연히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분주소(파출소)에 불려갔다.

그동안 했던 골동품장사에 대해 이실직고 하였고 시 안전부로 ‘조사서류’를 넘기는 3개월 기간에 고민을 많이 했다. 이후로 수용소까지 갈수도 있으니 안 되겠다 싶어 지인의 영향을 빌려 다행히도 훈방처리로 풀려났다.

▶탈북 할 고민을 그때 하였겠다.

그렇다. 내가 정치적으로 당과 수령을 반대한 것도 아니고 노동당체제를 비판한 것은 더욱 아니다. 또한 사람을 해치거나 도둑질 한 것도 아니다. 오래전부터 국가에서 인민들에게 식량배급을 주지 않으니 어떻게든 가족이 굶어 죽지 않으려고 불법이지만 장사를 한 것뿐이다.

북한당국에서 주민들에게 배급을 준다면 누가 그 위험한 밀수를 하겠는가? 살기위해서 장사를 한 것이 죄라고 하니 기가 막혔다.

 

고려청사, 조선백자 등 골동품이 돈이 돼

골동품장사로 3개월 1만 달러까지 벌어

분주소에 불려 가 골동품장사 이실직고

지인의 도움으로 훈방처리로 풀려나

 

▶언제 탈출을 하였는가?

2002년 12월 21일 함경북도 무산군 상창리서 차디찬, 그 눈물의 두만강을 건넜다.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이지만 사람 못살 그 저주로운 땅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 꼬박 3일 낮에는 산으로 밤에는 마을길로 걸어서 연길에 도착했다.

그곳에 고모, 삼촌 등 친척이 있었다. 발에 동상을 입어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중국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 탈북민 임이 노출될 수 있었다. 하여 시골에 들어가 6개월간 여러 가지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여 회복할 수 있었다.

▶계속 연길에만 있었는가?

길림성 연길시는 탈북자가 많아 공안의 단속이 심하다. 사이렌소리만 들려도 나를 잡으려 오진 않나 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다. 또한 탈북자로 위장한 북한 보위원도 숨어있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은 후부터는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불안했다. 도저히 안심 할 곳이 못되었다. 이후 산서성 서안시로 거처를 옮기었다.

 

살기위해서 장사 한 것이 죄라니 기가 막혀

2002년 12월 상창리서 눈물의 두만강 건너

3일 간 낮에는 산으로 밤에는 마을길로 걸어

연길에 도착…발에 동상을 입어도 병원 못가

민간요법으로 여러 가지 치료를 하여 회복

 

▶거기서 무엇을 하였는가?

북한상점에서 근무하였다. 중국인들이 한국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이른바 ‘짝퉁 북한상점’이다. 북한상품(의약품, 그림, 수예품 등)을 마치도 북한사람이 직접 판매하는 것처럼 꾸며놓은 상점으로 간판도 북한식이다.

판매원이 한복을 입고 김일성 초상화(배지)까지 달고 북한 억양으로 한국관광객들을 안내하니 가게주인(지배인)은 제법 돈을 벌었다. 주인은 내가 탈북자인줄 알면서도 영업을 위해 공안에 신고를 안했고 직원들께 비밀에 부쳤다.

▶북한 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는 반응이 없었나?

그런 모방 북한상점이 한 둘이야 말이지. 내가 아는 곳만도 4군데다. 서안시는 인구 1,400만 규모의 초대형도시다. 북한공관 측에서 몰라서 놔두는지 알면서도 놔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형태든 돈을 벌겠다는 중국인들의 두뇌싸움을 이겨낼 방도는 없을 것 같다. 서안서 2년을 일했고 북한의 3살짜리 딸애가 걱정되었다.

딸애를 데려 온들 나는 중국에서 탈북자이니 호구를 만들 수 없다. 내 유일한 피붙이를 그 지옥의 땅에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여 중국에서도 나름대로 돈 잘 벌며 살 수 있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탈북자를 국민으로 받아주는 유일한 나라가 남조선(대한민국)이라는 걸 알고 한국 갈 결심을 했다. 2008년 1월 남한에 왔으며 그해 12월 중국브로커에게 돈을 주어 3살짜리 딸애를 업어오게 했다.

▶ 한국 사회에 나와서 처음 한 일은 뭔가?

인생 다시 태어났다는 마음에서 출발해 처녀시절에 하던 재단사 일을 다시 하였다. 경북 김천에서 2년간 옷가게를 하였으며 4년 전 경기도 성남시로 이사를 와서 이불가게를 2년간 하였다. 자유롭게 이사 다니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북한에서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재단 등 일하며 운전면허·바리스타 자격증 취득

2017년 7월 통일교육원에서 전문 강사 교육수료

통일강사 자격증 받아…전국 중고등학교·군부대

민방위교육장 방문, 강의하면서 북한 현실 전해

 

청소년들과 군인들 38선 위 북 너무 몰라

안 좋은 모습 이야기하면 외계인 보듯 해

교육부차원서 협력하는 통일교육 없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통일교육은 어떤 분야에서 하는가?

전국의 중·고등학교와 군부대, 민방위교육장이다. 요즘 우리사회서 청소년들과 군인들, 그리고 젊은 세대 사람들이 저 38선 위 북한을 너무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의 안 좋은 현실을 이야기하면 마치도 외계인 보듯 하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한국의 고등교육 교과목서 북한에 대한 현실알기 교육도 없거니와 교육부차원서 하는 통일교육도 없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쉽게 든다.

 

TV에 비쳐지는 평양의 화려함도 사실이지만

TV에 안 비치는 지방의 어두운 현실도 사실

통일위해서는 밝은 곳, 어두운 곳 모두 알아야

남한에 온 탈북민들 북한 현실 증명하는 증인

사실 그대로 국민에 알려주는 것 우리가 할일

 

▶강의의 포인트는 뭔가?

연사로써 내가 청중에게 주입시키려는 내용보다는 청중이 호기심 가는 질문을 유도하여 하는 방법이다. 처음부터 청중에게 차트식인 A안, 설명식인 B안, 두 방법을 섞은 C안 등을 제시하고 호응이 좋은 방안대로 시작한다. 어려운 말을 쉽게 설명하는 것이 고난도인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통일교육의 핵심은 뭐라고 보나?

북한의 있는 사실을 그대로 청중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요즘 TV에 비쳐지는 평양의 화려함도 사실이지만 TV에 안 비치는 지방의 어두운 현실도 사실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의 밝은 곳, 어두운 곳 모두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어두운 곳서 살다가 여기 남한으로 온 3만 탈북민들은 북한의 현실을 증명하는 산 증인이다. 통일교육서 탈북민 만큼 적임자는 없다. 우리 탈북민들을 통해 북한의 진실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바로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자유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으면 좋겠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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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3/07 [15:27]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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