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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와 어울리는 삶…통일로 승화 시킨 북한의 예술
[인터뷰] 파주시에서 대접받는 탈북단체, 임진강예술단 백영숙 대표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11/08 [15:38]

평양 태생의 탈북민 기자가 1997년 3월 이곳 서울에 와 살면서 가장 먼저 방문했던 타 도시가 바로 경기도 파주시다. 아마도 3만 탈북민 대부분이 설날이나 추석이면 파주시를 가장 많이 방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00만 실향민과 3만여 탈북민의 애환의 넋이 깃든 오두산통일전망대, 끊어진 철로 위에 그대로 멈춰진 신의주행 증기기관차가 있는 임진각, 분단의 상징이며 통일 1번지인 판문점, 이 모든 것이 경기도 파주에 있다. 국민 누구나 고향을 찾는 명절이면 더욱 북녘 고향이 그리운 탈북민들이다.

남한지역의 최북단 도시 파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 접경도시로 6·25전쟁의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이다. 전쟁과 죽음의 땅이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바뀐 역사의 현장이며 한반도의 평화수도로 다가올 통일의 전진기지이다.

이제나 저제나 ‘통일아! 어서 오라!’고 외치는 분단의 희생자들이 이 땅의 실향민과 탈북민들이다. 파주시에 정착한 탈북민은 대략 1000여명. 여기서 눈에 띄는 사람이 백영숙 ‘임진강예술단’ 대표이다. 파주스타디움에 있는 ‘임진강예술단’ 사무실을 방문해 백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64년 8월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7형제의 넷째다. 부친은 무산광산연합기업소 기사장이었고 55세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모친은 군(郡)상업관리소에서 책임일군으로 일했다. 1979년 성천여자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진의학대학을 추천받아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공부는 하고 싶었지만 나를 뒷바라질 할 모친의 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고 결국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무척 아쉬웠겠다.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이후 군대에 나가고 싶었다. 당시만도 여자가 군대 나가는 것은 매우 희귀한 풍경이었다. 매일같이 군사동원부 사무실 청소를 깨끗이 해주며 ‘꼭 군대에 나가게 해 달라!’는 간청을 관계자에게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1979년 5월에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6군단에서 신병훈련을 받았다. 이후 인민군 4군단 28사단에서 군사복무를 하고 최종 직속지휘중대 중대장(군사칭호 대위)으로 1987년에 제대하였다.

 

함북 무산서 출생…성천여자고등중학교 졸업

공부하고 싶었지만 뒷바라질 할 모친의 고생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고 결국 대학진학 포기

조선인민군에 입대 6군단에서 신병훈련 받아

군사복무 후 최종 직속지휘중대 중대장 제대

 

▶이후 경력을 말해준다면…

인민군 군관(장교)들이 제대 할 때, 좌급(영관급)은 인민무력부 총정치국에서 중앙당, 위급(위관급)은 사단 정치부에서 해당 도(道)당위원회로 보내진다. 황해남도 해주시당위원회로 배치를 받았다. 내가 속한 부서는 해주시내 외화벌이 기관 및 기업소를 정치적으로 관리하고 감독했다.

▶기억에 남는 일은 있는가?

제대 후 결혼하고 두 아들을 낳았다. 일반 주민들이 다소 존경하는 군관제대군인 출신이기에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열심히 일을 하였다. 해주시당위원회에서 근무한 지 7년 쯤 지난 어느 해 가을 갑작스레 놀라운 일 생겼다.

 

해주시당위원회에서 근무한지 7년 쯤 지난 해

시당위원회, 인민위원회 등 직원 집합시켜 놓고

당위원회의 모 부장 총살…당과 국가에 바쳐야

할 외화 갈취가 죄목, 극심한 두려움에 사직서

 

어느 날 아침 시(市)당위원회, 인민위원회, 경영위원회 등 기관 직원들을 전부 어느 장소에 집합시켜 놓고 시 당위원회의 모 부장을 총살했다. 죄과는 당과 국가에 바쳐야 할 귀중한 외화를 갈취하여 개인적 용도로 썼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흔하지 않은가?

그때는 1990년대 초반, 김일성이 있을 때다. 놀란 것은 총살된 부장이다. 사심 없이 당에 충실했던 일군인데, 아무리 국가외화를 갈취했어도 그게 사람의 생명을 파괴시킬 만큼 위중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후 풍문에 의하면 39호실 외화는 중앙당 헌납용으로 수령님(김일성)께 심려를 끼쳤다는 죄과였다.

▶정신적 충격이 컸겠다.

이후 부서에 출근해서 일을 못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가 왔다. 매일 보던 상급간부가 정치적 죄과로 처형되었으니 ‘나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르겠구나!’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후 사직서를 내고 집에 들어와 주부로 생활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했고 아비규환의 사태가 발생했다. 배급이 끊기고 도시에는 거지가 득실거렸다. 남편이 간경변증으로 사망했고 두 아들마저 굶겨죽일 것 같아 무산에 있는 친정집으로 큰아들과 함께 식량구입 길에 나섰다.

▶탈북동기가 뭔가?

무산 친정집에 있던 어느 날, 중국 연변의 친척이 왔다. 내가 심한 우울증을 앓는 걸 보고 ‘중국에서 치료를 했으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하여 18살인 큰아들과 함께 중국에 가서 일주일만 치료받고 오기로 가족과 약속하고 두만강을 넘었다. 2006년 10월이었다. 그런데 일주 뒤, 입북도강을 봐주기로 약속한 국경경비대원은 부대 이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어쩔 수 없이 북한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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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불안한 백영숙 대표는 타향인 중국에서 하루하루가 공포와 불안의 연속이었다. 중국 공안당국은 탈북자 색출에 현상금까지 걸고 혈안이 되었다. 일부 조선족동포들은 돈벌이 목적으로 운둔의 탈북자들을 신고하기도 했다.

그녀는 눈앞이 캄캄했다. 자기가 처녀시절 군복입고 지켰던 그 사회주의조국은 중국에서 보니 정말 가련하고 불쌍한 나라이고 인민이었다. 고난의 행군시기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는데 그 사무친 원한은 아직도 구천에 떠돌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척이 “중국에서 위험의 고비를 넘기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권유로 40대 초반의 조선족 총각과 결혼을 했다. 항상 북송공포에 두려운 자기와 아들을 지켜 줄 남자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백영숙 대표는 중국에서 4년간 살면서 남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기가 북한에서 교육받은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이 중국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걸 알고 북한에서 속아 살은 인생을 가슴 치며 후회하였다.

이후 친척과 남편의 도움으로 큰아들과 함께 중국을 떠나 제3국을 거쳐 2009년 5월 마침내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해 12월에는 중국에서 생명을 지켜준 고마운 남편을, 몇 년 뒤에는 북한에 있는 막내아들까지 데려왔다.

남편은 한국에 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지금은 남한사람보다 더 많은 월급을 타면서 일한다. 두 아들은 한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생활하고 있으니 백영숙 대표는 자기는 행복한 아내, 어머니라고 말한다.

 

우울증에 시달려 ‘중국에서 치료’ 권유 받아

18살 큰아들과 일주일 치료받고 오기로 약속

입북도강 약속한 국경경비대원 부대 이동으로

북한에 넘어가지 못하고 2006년 두만강 건너

 

▶사회생활 초기 무엇을 하였나?

하나원을 수료하고 임대주택을 소개받은 곳이 이곳 파주다. 북한 접경도시인 이곳 파주에는 대략 1000여 명의 탈북민이 거주하고 있다. 남편과 막내아들을 데려와야 하겠기에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고 사회에 나온 다음 날부터 종이공장에 취업하여 열심히 일을 했다.

▶임진강예술단을 소개해 달라

솔직히 말하면 ‘임진강예술단’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지난 2013년 가을 즈음 당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경기도 파주시협의회 김경선 회장과 파주시의회 안명규 의원으로부터 아주 특별하고도 중요한 제안을 받았다.

파주시 민주평통에서 전통예술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탈북민들의 정착지원을 위해서 전문예술단체를 만들 계획인데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다소 놀랐고 두려웠다. 내가 예술을 해본 사람도 아니어서 더욱 그랬다.

▶어떻게 수락하였나?

귀동냥으로 들은 정보에 의하면 무슨 단체를 한다는 것은 자기 돈 절반을 보태어 하는 것이라는데 선뜻 용기가 안 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북한군에서 중대장을 했던 당신에게 그것이 기회일 수 있다. 이제는 우리 4식구가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사는데 남들에게 봉사도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며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남편을 든든한 정신적 후원자로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대표직을 수락했다.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물론이다. 사실 남한사회에서 우리 탈북민에 대한 인식이 크게 좋은 편은 아니다. 탈북민 3만 명 중에는 별의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 과거 핵실험과 미사일발사로 남한과 국제사회에서 분노를 자아낸 북한당국이다.

우리 파주시의 경우를 봐도 많은 탈북민들이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생계를 위해 살아간다. 내가 탈북민단체인 ‘임진강예술단’을 맡아 지역사회와 어우러져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우세했다.

▶본 단체는 언제 창단되었나?

2013년 10월 9일 발기인 대회가 있었다. 파주시장, 경찰서장, 민주평통자문협의회장, 시의회의장 등 시청과 유관기관 간부들이 모두 나왔다. 이는 그만큼 파주시가 우리 탈북민들의 사회정착에 대해 애정과 관심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이듬해 7월에 공식적으로 창단된 것이 ‘임진강예술단’이다. 창단 이후 지금까지 이곳 파주스타디움에 본 단체 사무실과 공연연습실을 제공 받아 운영하고 있다.

 

파주스타디움에 사무실과 공연연습실 제공 받아

연 80~100회 진행…과반이 직접 행사 계약

전국 및 지역사회에 각종 행사에도 초대받아

올 7월 28일 ‘임진강예술단’ 창단 4주년 공연

탈북민으로 구성된 예술단은 지속적이지 못해

 

▶한 해 평균 행사공연은 몇 개 하나?

2014년 7월에 창단 된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하게 연평균 80~100회의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 과반이 내가 발로 직접 뛰어서 행사를 잡는 것이다. 나머지는 전국 및 지역사회에서 각종 행사에 초대받아 가는 것들이다.

전국에 여러 개의 탈북민 구성 예술단이 있어도 우리만큼 지속적으로 연 100회 가까이 되는 공연을 하는 단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7월 28일 ‘임진강예술단’ 창단 4주년 기념공연을 파주시민회관 소공연장에서 진행했다.

▶평소 훈련은 어떻게 하는가?

우리 ‘임진강예술단’ 단원은 모두 20명이다. 적지도 많지도 않고 안성맞춤 한 인원이라고 본다. 평소 훈련은 공연이 없는 날을 선택해 월 3~4회 정도 한다.

오후 1시부터 저녁 6시까지 사무실 옆방에 있는 공연연습실에서 한다. 마이크, 스피커, 거울, 조명시설까지 갖춘 공연연습실은 30평 규모이다.

▶그동안 특별히 잘한 것이 있다면…

글쎄, 남들도 보통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예술단은 1년에 2회 이상 장애인 및 노인복지시설로 자원봉사공연을 간다. 장애인과 어르신들에게 노래와 춤으로 잠시나마 기쁨을 드리고 그들에게 맛있는 북한음식을 대접한다.

중국이나 제3국에서 상갓집 개만도 못하던 우리 탈북민들에게 자유를 맘껏 누리며 사람답게 살라고 이 땅에 받아준 대한민국 정부다. 그 고마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와 우리 예술단원들의 한결같은 심정이다.

▶감사한 분들도 많이 있을 것 같다?

우리 ‘임진강예술단’의 조은미 후원회장이다. 파주시 최초 탈북민단체인 ‘임진강예술단’ 설립이후 지금까지 매월 소중한 후원금을 기부해주신다. 그분 때문에 우리 예술단이 더욱 멋지게 북한예술을 알리는 전문예술단체로 성장했다.

또한 명예고문인 윤후덕 국회의원과 박 정 국회의원, 최종환 파주시장 등 많은 후원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는 것으로 그에 꼭 보답하려고 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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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08 [15:38]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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