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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현주소를 찾는다] 민족보위성 초대부상 김무정의 숙청<1>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2비서로 추대/조선인민군 창군에 참여한 막강 권력자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8/02 [15:18]

김일성이 남조선로동당 출신들 뿐 아니라 중국공산당파, 소련파 등 항일 빨찌산파를 제외한 세력들을 종파라는 감투를 씌워 숙청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연안파의 우두머리라고 할 정도로 북한정권 내에서도 세력이 막강하여 당시 북한주민들 속에서 무정장군이라고 불리던 김무정은 1904년 함경북도 경성군 룡성면 근동리(현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동)에서 출생했다.

 

친필약력에서 반일애국의지 알 수 있어

 

그는 일본유학을 간다고 부모들에게 말하고는 1923년 4월에 중국 하북성에 있는 보정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했다. 졸업한 후에는 중국 공산당 소속의 포병부대 중위로 복무하였고 1925년 초에는 포병대위를 거쳐 다시 중좌(중령)로 특별승급(진급)되기도 했다.

국민당 군인이었던 그가 갑자기 공산당 소속의 중국로농홍군에 입대하게 된 데는 경성기독청년회에 가입하여 청년회 간부였던 이영으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는 1925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중국로농홍군에 입대하여 대위가 되었다.

홍군의 장교가 되고 나서 국민당 군대와의 전투들을 지휘하였고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지자 지하공작활동을 벌이다가 무창(武昌)에서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탈옥 후에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홍군 내에서도 명성을 떨치다가 1937년에는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으로, 그해 말에는 중국 최초의 포병부대인 팔로군 포병단 단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42년에 쓴 무정의 친필약력이 남아있어 그 내용을 보면 그의 반일애국의지를 잘 알 수 있다. “나는 조선에서 청년운동과 로동운동에 참가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어 세 번이나 옥살이를 하였다. 옥중에서 갖은 혹형을 받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혁명에 참가하였고…1930년부터 지금까지 홍군에 참가하여 여러 가지 투쟁을 진행해왔다.”

1930년 6월 중국공산당은 당중앙위원회가 소재한 상해에서 쏘베트지역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무정은 이 대회에 참가한 홍군 제5군 정치위원인 등대원과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그의 여동생인 등기와 결혼하였다.

무정은 중국공산당 당 중앙의 지시로 등대원과 함께 팽덕회가 이끄는 홍군 제5군에 합세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 당시 야전포와 산포로 적군함을 포격하여 격침시킨 공로로 중국 홍군내에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무정은 1940년 가을부터 중국공산당의 중앙당학교와 항일군정대학 출신 조선인청년들로 반일청년조직을 결성하는 사업에 착수하여 1941년 1월 10일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1942년 7월 10일부터 7월 14일에 열린 조선청년연합회 제2차대회에 참가하여 허정숙, 최창익 등과 함께 화북조선독립동맹을 확대 개편한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초대집행위원 결성모임에 참가해 조선독립동맹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항일투쟁경력 김일성보다 훨씬 높아

 

7월 14일에는 김두봉, 박효삼 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발족시키고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고, 그해 11월에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이렇듯 무정장군으로 불리던 김무정은 김일성보다 나이도 8살이나 위인데다가 항일투쟁경력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무정이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그 시기에 김일성은 1941년에 일제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극동군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다가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소련군함 푸가쵸브호를 타고 9월 19일에 원산항에 입항했다.

김일성이 소련군함을 타고 소련군 대위견장을 단 소련 군복을 입고 원산항에 입항한 지 2달이 지난 1945년 11월에 무정은 중국에서 북한으로 귀국했다.

사실 무정이 귀국할 당시 정치적인 야망이 대단히 높았다는 것은 그가 직업총동맹위원장이었던 서휘에게 한 고백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무정은 그에게 해방이 되었으니 이제는 발 벗고 새조선 건설에 나서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한때는 군인으로 조선을 위해 헌신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정치를 해야겠다고 한데서 잘 알 수 있다.

 

북한주민들에게 기대감과 지지 확산

 

결국 무정은 귀국하자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북한의 부수상직을 하였던 김창만과 함께 황해남북도를 다니면서 자기의 명성을 알렸다.

그가 황해도를 자기의 지지기반으로 하려고 했던 것은 평안도는 김일성이 장악하였고 함남도는 오기섭이 기반을 다져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북한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무정의 이런 행동을 지켜본 김일성은 그가 가진 명성과 자기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그가 불편해 언젠가는 제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무정장군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조선노동당계열의 공산당원들과 이영을 비롯한 장안파 공산당원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평양에서 따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촉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김일성은 한국에서 공산당활동이 비법화되면서 북한으로 들어온 남로당 계열의 공산당원들은 어디 갈 데도 없는 존재이기에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정을 비롯한 중국공산당계열과 소련파 계열은 잘못 건드리면 중국이나 소련에 다시 들어갈 수 있고, 그로 인해 중국이나 소련 당국으로부터 제동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겨 당시로는 무정 등 국외파 공산당 지도자들을 마구 대할 수 없었다.

광복 후에 북한에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찌산파와 중국에서 나온 연안파, 소련공산당 출신의 소련파, 국내파, 남조선노동당파 등 여러 파로 나뉘어져 서로 경쟁하면서 내부적인 권력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정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계열의 지도자들을 연안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중국 내륙지방인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도시인 연안시(延安)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연안시는 중국공산당이 1934년부터 1936년에 걸쳐 국민당 군대를 피해 내륙지역으로 이동하였던 2만 5천리의 대장정부터 중국 대륙 동남부에서 서북부로 근거지를 옮겨 공산당 본거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조선인 중국공산당원들도 이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여 연안파라고 부르고 있다.

김일성은 무정의 중국공산당과 홍군에서 차지하였던 지위를 무시할 수 없었고 그를 지지하는 북한주민들의 의사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당시 북한주민들에게는 김일성 장군 못지않게 무정장군에 대한 기대감과 지지가 확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정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비서로 추대되기도 하였고 조선인민군 창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건되면서 인민군 제2지휘소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9월 9일 북한정권이 수립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부상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무정장군에 대한 김일성의 불안은 점점 더 커갔고 서서히 숙청의 칼을 벼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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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02 [15:18]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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