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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한민국에 와서 한의사 됐어요”
[인터뷰] ‘일산 100년한의원’ 한 봉 희 원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7/05 [14:26]

<림일 객원기자>

직업선택에서 개인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는 고등학교 및 대학교 졸업생들의 첫 취업을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남한의 도·시·군청에 해당) 노동행정과에서 취급한다. 비단 학교졸업생 뿐만 아니다. 인민군대에서 10년 이상의 군사복무를 마치고 제대하는 군인들의 첫 직장도 엄격하게 국가에서 배정을 하도록 규정에 되어 있다.

이직을 하려면 ‘뇌물을 포함한 비밀사유’는 있어도 합당한 이유는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직장이 ‘당에서 맡겨진 혁명초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성에 맞든 안 맞든, 좋든 싫든 당에서 배정한 직업에 평생 근무하는 주민들이다.

이런 폐쇄적인 사회에서 살다가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들에게 의무적으로 차려진 직업선택의 자유는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좋은 직업 찾기와 창업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래도 자기의 적성에 맞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탈북민들이 입을 모으고 있다.

탈북민 사회 80%가 여성이다. 이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찾아 취업을 했거나 사업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얼마 전 경기도 고양시에서 열심히 일하는 ‘일산 100년한의원’ 한봉희 원장을 만났다.

- 자신을 소개해준다면...

1976년 4월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OO공장에서 유능한 설계기사였고 어머니는 OO병원 내과의사였다. 형제는 3남매 중 둘째였다. 1993년 길주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997년 청진에 소재하고 있는 OOOO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배치를 받은 곳은 길주팔프(종이생산)공장이다.

- 인텔리 가족이었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당시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고지식한 할머니가 전후시기 주민등록 정리사업을 할 때 아침에 출근하신 할아버지가 그날 함흥시내 폭격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는데, 시신을 직접 보지 못한 안타까움에 실종이라고 얘기했는데 담당자가 황당하게도 ‘월남분자’로 기록해놓았다. 공산당은 대중을 속이는 정책이 아주 탁월하다. 말로는 “과오를 묻지 않고 다 같이 혁명을 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민들을 기만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 월남자 가족의 처우는 어떠했나?

한 마디로 불평등, 감시, 색안경 등의 표현이 적합하다. 우리는 월남자 가족으로 평생 당국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다. 아버지는 45살에 겨우 노동당에 입당하였고 업무에서 많은 발명 및 기술혁신을 했어도 그에 대한 표창은 전부 간부들이 갈취했다. 백주에 눈알 빼가는 날강도가 따로 없다. 어머니가 너무 분하여 중앙당에 신고하고 나서자 국기훈장 2급으로 대신하였다.

- 소녀시절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고등중학생 시절, 남동생 학급 담임선생이 겨울 방학에 부모님들 모두 출근하고 동생만 있던 집에 와서 책상유리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때마침 집 앞에서 유리를 들고 나오는 선생님을 만났는데 유리를 왜 가져가는가 물었더니 연구실에 걸린 수령님(김일성) 초상화에 쓰려고 한다는 것이다. 너무도 기가 막혔고 “초상화에 쓸 유리는 집주인 허락도 없이 빈 집에 들어와 담임선생님이 훔쳐가듯 들어가도 되는 세상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북한에는 개인의 사유재산이 전혀 없다.

- 대학기숙사 생활을 말해 달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 생활이 이어지는데 잠시도 쉴 틈을 안준다. 주로 학교관리자재, 농촌 및 인민군대 지원물자 상납 등이 있다. 시기마다 당에서 내려오는 전군중적 포치사업(행정지시)은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기숙사에 쌀이 없어 식량을 구입해오는 학생에게 자유시간을 주는 ‘식량방학’이 있다.

- 기숙사 식당의 식사 형편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무렵 기숙사의 식생활은 이랬다. 여름철 수업이 끝나면 학교당국에서 학생들에게 풀(독성이 없는 어떤 풀도 가능) 할당량이 떨어진다. 그러면 대학교 주변의 뒷 산에서 풀을 베어온다. 기숙사 식사는 아침에 풀을 데쳐서 만든 과자같이 작고 얇은 떡 3개, 가을에는 옥수수 2개, 겨울에는 강냉이 송치(옥수수 이삭의 속)를 갈아서 쓴 죽이었다. 강냉이 송치 죽은 짐승도 먹지 못할 사료나 마찬가지다.

- 수업 강의는 어떻게 짜져있나?

하루 3강의, 한 강의는 90분이다. 매 강의 사이에 10분간 휴식이 있고 낮 1시 경에 끝난다. 격일제로 수령(김일성·김정일) 역사과목이 있다. 수령의 발언과 행동은 교제가 된다. 수령의 출생과 인품, 도덕성을 포함해 시대별 혁명사상을 심오하게 배운다. 수령역사 교과목은 특별한 과목이어서 정치적 비중이 크다.

- 특별히 기억되는 것이 있다면...

1997년 대학졸업 해이다. 그해 2월 당중앙위원회 황장엽 국제비서가 중국 베이징에서 남조선으로 망명한 사건이 터졌다. 학생들은 모였다하면 소곤소곤 황장엽에 대한 소리를 몰래몰래 하기도 하였다. 대학당국에서는 3,4월 두 달간 매주 생활총화, 당생활총화를 밤늦게까지 진행하고 강연회를 더 자주 조직하였으며 모든 학생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가하도록 강요했다. 당연히 좋은 소리가 아니다.

- 자세히 말해 달라.

“황색바람(자본주의사상)에 변질된 추악한 황장엽은 몇 푼의 달러에 눈이 멀어 자기를 키워 내세워준 당과 수령의 배려도 망각하고 남조선으로 도망쳤다”며 “가족과 동지도 배반한 패륜아고 혁명의 변절자”라고 맹비난하였다. 당국의 강연회에는 누구든 그 어떤 토를 붙일 수가 없다.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막기 위한 ‘주체담벽’ 쌓기에 학생들의 정신무장을 철저히 요구하고, 매우 사소한 개인사정도 용납되지 않았다.

- 탈북 동기와 시기는?

고난의 행군시절(90년대 중후반) 국가에서 주는 식량은 전혀 없었다. 청진역에는 하루에도 시체가 수십 구씩 생겼다. 졸업 후 대학에서 배운 ‘사회주의 우월성’,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는 완전한 거짓이며 이 사회에서 나의 미래와 희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의 출신성분이 자식의 운명을 결정하는 북한 사회에 끝없는 환멸을 느껴 북한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두만강을 건넜다.

- 중국에서는 안전했나?

꼭 그렇지만 않다. 아무리 친척이 있다고 해도 주변에는 탈북자신고 포상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중에는 포상금을 생계목적으로 하는 나쁜 사람도 있다. 언제 잡혀갈지 늘 불안하여 살수가 없었다. 북송경험이 있는 탈북자들의 증언은 간접적으로 듣는 것조차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 여기 저기 거처를 옮기며 살았다.

-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준다면...

도시는 공안이 시도 때도 없이 출연한다. 그것은 탈북민들에게 안 좋은 현상이다. 그리하여 도시와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있는 부잣집 별장의 목장사육공, 폐비닐재활용공장 노동자로 일을 하였다. 하루 10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남한으로 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2001년 8월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으로 왔다.

- 이후 어떤 생활을 하였나?

2003년 3월 강원도 원주에 소재하고 있는 상지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북한에서 배웠던 전자공학은 과감하게 접었다. 새로운 사회에 왔으니 새로운 공부를 하여 새로운 직업을 갖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한국에 온 다음 해 월드컵이 있었는데 당시 슬로건인 “꿈은 이루어진다!”가 가슴에 벅차게 띄던 때였다.

- 북한의 대학시절과 비교해준다면...

정말 기가 막히다. 북한에서는 대학생들이 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수령사상학습을 적지 않게 배운다. 그리고 학교에 바치라는 사회물자는 왜 또 그렇게 많은지... 남한의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꼭 자기에게 필요한 공부만 한다. 재학 중 휴학하고 다른 공부를 해도 되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도 된다.

- 대학시절 결혼까지 했으니 보기 드문 학력이다.

(웃음) 글쎄 운이 좋았다고 할까? 어쩌면 나는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인 것 같다. 여하튼 대학공부를 하는 도중에 연애는 물론이고 결혼까지도 할 수 있는 이곳 남한사회에 내가 산다는 것이 꿈같은 일이다. 대학생활 도중에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으며 아이를 낳아 육아를 하다 보니 2011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국가고시시험을 보아 합격하였고 이곳 ‘일산 100년한의원’을 개원하였다.

- 한 원장의 환자치료 철학은 뭔가?

단마디로 정리하면 정성과 최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이 돈이고 환자가 돈” 이라는 말도 있으나 많은 의사들이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사선서)에 충실하고 있다. 의사라는 직업은 원래 사명감 즉 부(금전)보다는 명예가 우선적으로 중시되는 직업이다.

- 하루 평균 몇 명의 환자를 보는가?

환자들의 내원은 계절별로 다른데 나름 특징이 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일반의원보다는 한의원이 그렇다. 우리 한의원 같은 경우 적을 때는 20~30여 명, 많을 때는 50여 명의 환자가 방문한다. 이중 40%가 60세 이상 어르신들이다. 기계도 오래 쓰면 녹이 쓸 듯 사람이 나이가 들면 병원을 자주 찾는 것이 당연하다.

- 환자들에 대한 주견은 뭔가?

환자들이 어떤 병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으나 그렇다고 지나친 걱정은 금물이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병세의 악화를 더 키우는 경우가 있다. 어떠한 병을 만나든 환자에게는 차분하고 침착한 마음이 우선이다. 괜히 다급하고 황급한 마음을 가지면 그것은 병치료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치료과정에서도 그렇다. 특히 한방치료는 신약치료와 달리 꾸준한 관리가 기본이다.

- 건강 유지에서 좋은 운동을 권장한다면...

사람은 노년기에 접어들면 자기 건강은 자기가 신경을 써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굳이 건강 유지에서 좋은 운동 한 가지를 권장한다면 “가급적이면 많이 걷기를 하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건강한 사람을 기준으로 일주일에 3~4일은 하루 1~2시간 정도씩 평탄한 길을 활개를 치면서 걸어주는 것이 좋다.

- 세 아이의 어머니이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애국자다.(웃음) 아이 키우기 힘든 요즘 세월에 신혼부부가 애 하나 둘 낳는 것이 보통인데 셋이나 낳았으니 이보다 더 애국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보물이고 축복이라고 믿는다. 다행히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어서 고맙다. 금쪽같은 내 새끼 셋을 볼 때면 하루 피곤이 말끔하게 사라진다.

- 끝으로 할 말이 있다면...

북한에서 나의 운명의 주인은 내가 아닌 국가였고, 김일성 부자였다. 남한에 와서야 진정한 운명의 주인으로서 내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고, 내가 꿈꾸는 모든 일들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이 사회를 위해 나의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게 내가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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