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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 어때서?...열심히 살며 봉사활동은 덤이지요”
[인터뷰] ‘둥이네 통일가게’ 홍은혜사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6/14 [16:33]

판문점에서 있은 남북정상회담에서 눈길을 끈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평양옥류관 냉면’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본 회담 시작에 앞서 가벼운 인사말에서 “옥류관 냉면을 이 곳(판문점)까지 가지고 왔으니 대통령님께서 맛있게 드셨으면 합니다”고 하여 초반부터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날 저녁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있은 남북정상 만찬장에 남한의 토종음식과 함께 ‘평양옥류관 냉면’이 등장했다. 일부 외신은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다’는 말은 옛말이고 이제는 ‘평양냉면이 평화의 상징이다’고 타전하기도 하였다. 그 정도이니 서울에서 ‘평양냉면’ 열풍은 과히 대단했고 평소보다 5~6배나 되는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꼭 냉면뿐이 아니라 북한음식과 식품이 ‘2018 남북정상회담’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남한에서 북한음식 및 식품의 전도사는 당연히 3만 탈북민이다. 그들이 고향에서 먹던 음식과 식품을 그대로 남한에서 재현하고 또 중국을 통해 수입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인천 연수구에 소재한 특별한 가게를 찾았다.
탈북여성 홍은혜 사장이 운영하는 북한식품 판매전문점 ‘통이네 통일가게’이다. 기자가 가게를 찾은 당일도 전국의 인터넷 주문전화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시간을 모내는 홍은혜 사장과 만났다.

- 자신을 소개해 준다면...
1977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 고등중학교 목공선생이었는데 내가 8살 때인 1984년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피복공장 노동자였다. 형제는 내 아래로 남동생 2명이 있다. 1992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했다. 아버지 없는 집안에 내가 가장이 되어 두 동생을 굶기지 않으려면 공부고 뭐고 다 필요 없었고 오직 돈을 벌어야 했다.

- 무슨 장사를 하였나?
땔감용 나무로 시작했다. 깊은 산골에 들어가서 하는 작업으로 길이 30cm 둘레 5cm 정도의 화목 10대가 1단인데 이것을 시장에 내다가 4~5원에 판다. 하루에 적게 팔면 50단 많이 팔면 150단이다. 당시 쌀 1kg이 70원 하던 시기였다.
3~4년간 이렇게 번 돈을 밑천으로 먹거리(음식) 장사를 하였다. 북한에서는 보통사람들에게 음식장사가 가장 돈 잘 벌어지는 업종 중에 하나다. 사람은 누구나 밥은 먹어야 하며 국가에서 주는 식량이라고는 전무하니 말이다.

- 어떤 메뉴인가?
두부밥, 꽈배기, 찰떡, 송편, 과자, 사탕 등이다. 음식은 집에서 만들었고 당과류는 도매장사를 하였다. 북한에서는 당국에서 주는 배급에 의존하는 일반 주민들에게 있어서 떡과 사탕은 명절에나 먹어보는 귀한 음식이다.
이후에는 공산품장사도 함께 하였다. 라진선봉지역에서 중국산 의류를 가져다가 아래 지방에 내다가 팔았다. 제법 돈이 되었고 남들이 배고플 때 별로 고생하지 않으며 두 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계속 벌이가 잘 되었는가?

아니다. 돈 좀 벌만하면 꼭 불행도 있는 법인 것 같다. 수년간 거래를 하던 대방(장사 상대자)을 믿고 큰돈을 맡겼다. 후에 많은 물건을 받기로 하고 말이다. 차떼기로 하는 장사꾼인데 군인차량을 이용하여 제법 일을 크게 하는 사람이니 별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3~4년간 벌은 돈을 통째로 날렸다.

- 이후 어떻게 되었나?
사람이 꼭 죽으라는 법도 없는 것 같다. 중국에 고모가 살았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국 고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리라 결심하고 2003년 3월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을 밟았다. 엄연히 탈북이다.
국경 경비대원에게 1주일 후 돌아온다고 속였다. 고모를 찾는 시간이 일주일도 훨씬 넘겼고 한 달 만에 엉뚱하게도 인신매매에 걸려 중국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1년간 계속 우니 중국 남편이 고모를 찾아주었다.
놀랍게도 내가 중국에서 방황하고 있는 동안 두 남동생은 벌써 탈북하여 어느 새 한국으로 갔었다. 고모로부터 전화를 받은 남동생이 중국으로 날아왔다. 고모와 함께 내가 살던 지역에 온 남동생과 나는 그러안고 한참이나 울었다.
이후 중국 남편은 금광에서 사금 캐는 일을 하다가 어느 날 갱도가 무너지면서 사망하였다. 시집에서는 면목이 없다며 내 의사대로 하라고 했다. 중국에서 재혼하겠다면 알아봐주고 한국으로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하였다. 

- 한국행 경로는 어떻게 되나?
같은 형제인데 남동생은 대한민국 국민이니 당당히 여권을 갖고 중국과 한국을 드나들고 나는 탈북자이니 여권은 고사하고 공안이 무서워 숨어 다녀야 하니 정말 눈물이 나더라. 정말이지 중국에서 탈북자 신세는 개만도 못하다.
기필코 한국으로 가리라 결심을 하고 몽골로 이동하였다. 울란바토르에서 거의 1년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당시 대략 500명가량 있었는데 너무 많아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 오래 걸렸으며 2006년 1월 한국에 왔다.

정권수립 이후 북한주민들의 식생활은 철두철미 배급제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성인들은 재직 중인 공장과 기업소에서 배급표를 발급받는다. 17세 미만의 학생들은 부모의 직장에서, 대학이나 전문학교 학생의 경우 학교에서 받는다. 주부는 남편(세대주)직장에서, 노인은 동사무소에서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주민들에 대한 정상적 식량배급이 실시되던 시절 지역과 시기, 신분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쌀과 잡곡을 5:5에서 3:7정도의 비율로 배합하여 공급했다. 식량배급은 보통 15일마다 실시하였으며 배급 절차는 모든 주민들 소속 직장에서 발급받은 배급표에 준하여 거주지역의 ‘식량공급소’에서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홍수 등 자연 재해로 인해 식량난을 겪기 시작했다. 1995년 이후에는 사실상 국가의 배급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따라서 주민들은 대부분 장마당(농민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구입하거나 텃밭에서 경작하여 식량을 얻고 있다. 하여 개인의 식성과 기호에 의한 식생활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이다.비단 식량뿐만이 아니다. 사람의 식생활에서 꼭 필요한 간장, 된장, 기름(식용유), 소금 등 부식물은 인민반(대략 30~40가구가 1개 인민반, 남한의 주거지역에 있는 통과 비슷함)을 통해 배급표가 나오며 이걸 갖고 식료품상점에서 공급받는다. 부식물 배급 규정은 성인과 학생, 아동 등 연령대 별로 량이 제정되어 있다.
북한에서 보통 주민들이 육류를 접하기는 정말 힘들다. 평양시를 기준으로 김일성 생일, 김정일 생일 등 국가명절 때마다 당국에서 평양시민 1인당 200g의 돼지고기를 공급해준다. 그리고 기름(식용유)은 어른 월 300g, 아동 100g이다. 이것도 1990년대 초반까지의 풍경이었고 이후로는 이런 공급도 전혀 없다.
대부분의 북한주민들은 국가에서 주는 식량과 부식물은 전혀 없으니 모두 장마당에서 구입하거나 직접 만들어 먹는다. 이에 따라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 시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당국에서도 배급을 못 주는 책임도 있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강제 폐쇄는 못하고 묵시해주는 상태에서 활성화 되고 있는 장마당이다.

- 처음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하나원(통일부 산하 탈북민정착교육기관)을 나와서 인천에 거주지를 배정받고 3일 만에 식당일을 하였다. 음식을 나르고 청소를 하는 일에서는 전혀 남에게 뒤지지 않았는데 북한사투리 때문에 언어소통에서 다소 자신감이 적었다.
거기에 월급 차별도 느꼈다. 남들은 6개월, 1년 지나서 5만원, 10만원씩 월급을 올려주는데 나에게는 그런 조치가 없었다. 사장의 눈치를 보니 탈북자라고 편견을 놓는 듯해보였고 나도 월급을 올려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내가 남들보다 못한 것이 뭐냐고? 안 그러면 노동부에 신고를 하겠다고 말했다.
식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그리고 다른 공장에서 사출제조일도 하였다. 그러면서 밤에는 운전학원과 요리학원을 다녔다. 남한에서 운전은 필수이고 또 요리는 내가 북한에서부터 하던 음식장사와 비슷한 부분이어서 그 취미가 계속되었다. 일과 공부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느낀 점은 주변에 있는 ‘탈북자를 깔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내가 기필코 사장이 되리라’하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노력했다.

- 가게를 언제 오픈하였는가?
이 가게는 북한음식을 전문으로 만들어 매장과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북한음식 홈쇼핑이다. 탈북민이 북한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례는 많겠지만 인터넷으로 홈쇼핑을 하는 것은 내가 처음이며 지난 2016에 개업을 했다.
평소에는 많은 시간 혼자서 일하지만 대목(명절, 휴가철, 연휴 등) 때에는 아르바이트생 10명을 1~2주 정도 쓴다. 그래도 일손이 모자라서 남편과 친정 식구들이 나와서 도와준다. 우리 가게에서 판매하는 음식과 식품은 모두 50여 가지에 이른다.
판매의 90%를 인터넷에서 진행한다. 음식과 식품을 고객이 인터넷으로 보고 금액을 송금하면 택배로 이루어진다. 인터넷으로 판매를 하다 보니 한밤중에 주문하는 고객도 있다. 그러니 24시간 일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출 액수는 공개하기 어렵지만 어떤 때는 ‘그래 내가 이 맛에 남한에서 사장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럴수록 내 가게 상품을 아낌없이 구입해주는 모든 고객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갖는다.

 

인천에 거주 배정받고 3일 후 식당일
음식 나르고 청소하는 일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았는데 북한사투리 때문에
언어소통에서 다소 자신감이 떨어져

밤에는 운전학원과 요리학원을 다녀
‘탈북자들 깔보는 시선’을 느끼면서
‘내가 기필코 사장이 되리라’고 결심
북한군의 총구를 뒤로하고 용감하게
자유와 생존을 위해 뛰쳐나온 탈북민

 

- 가게 이름이 특이하다
고민 끝에 ‘둥이네 통일가게’라고 지었다. 사람들이 ‘통일’이라는 글자만 봐도 내가 탈북민인 줄 대번에 안다. 탈북민이 어때서? 나는 북한군의 총구를 뒤로하고 용감하게 북한을 뛰쳐나온 탈북민이다. 자유와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한국에 와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첫째, 둘째는 딸 쌍둥이고 셋째는 아들이다. 그래서 가게 이름에 두 딸의 애칭인 ‘둥이’와 나의 소망인 ‘통일’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넣었다.

- 자부할 만한 일은 어떤 것인가?
작년에 인천 연수구청에서 관내 수백 명의 탈북민을 대상으로 ‘통일맘수기공모’가 있었다. 내가 북한과 남한에서 겪었던 시련의 고비를 생동하게 썼을 뿐인데 생각지도 않게 당선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1년에 두 차례씩 내가 소속되어있는 탈북민 단체에서 요양원 봉사활동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크던 적던 나의 노력과 시간을 바쳐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내 경험으로 보아 꿈은 꼭 이루어진다. 북한과 중국에서 사람답게 살겠다고 한국에 오겠다는 꿈을 꾸었더니 이루어졌다. 남한에서 결혼하여 두 딸을 낳은 후,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리라는 꿈을 가졌더니 그것도 이루어졌다. 사장이 되리라는 꿈도 이루어졌다. 지금의 일이 천직인 것 같다. 앞으로 3년 안에 지금의 가게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리고 정식 직원 5명을 두려는 꿈을 꾸고 있다.

 

탈북민 대상으로 ‘통일맘수기공모’ 당선
1년에 두 차례 단체에서 요양원 봉사활동
크던 적던 나의 노력과 시간 바쳐 어려운
이웃 위해 봉사활동 할 때가 가장 행복해


- 고마운 사람이 많이 있을 것 같다.
인천지역에 있는 통일민주협의회 구연모 사무처장님이다. 나이가 60세 쯤 되었는데 정말 나에게는 친정아버지 같은 분이다. 내가 힘들어 할 때 내 어깨를 다독이며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주시고 내 가게를 지역사회에 톡톡히 홍보해준다.
지방에 정착하여 결혼하고 떳떳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랑하는 두 남동생도 고맙다. 주변에서 간혹 탈북민 형제끼리 금전적으로 싸우는 것을 보면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내 두 동생은 너무나 성실하고 착하니까’ 하는 마음에 동생들이 자랑스럽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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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14 [16:33]  최종편집: ⓒ 통일신문
 
꿈은이루어진다 쥬쥬 18/06/28 [00:02] 수정 삭제
  꿈은이루어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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