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2018.07.19 [23:03]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정치  경제  군사/외교  사회/NGO  탈북민  인터뷰  통일교육  오피니언  북한풍물기  생활/문화
오피니언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북한실체를 밝힌다] 보위사령부의 검열에서 살아난 사람들
‘고난의 행군’시기 생산한 강재의 일부/중국에 팔고…식량으로 강냉이 사들여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4/05 [15:26]

<김형수 객원기자>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살아난 인물들 중엔 혜산강철공장 지배인도 있었다. 당시 58세의 강승모 씨다. 혜산강철공장은 1980년대 말 양강도 당위원회가 철강재문제를 자체해결하기 위해 혜산시 검산동에 세웠다.

90년 초 양강도 혜산강철공장 신설

지방마다 강철생산기지들을 내올 데 대한 김일성의 방침에 따라 양강도 당국은 1988년에 시작해 1990년 초에 완공했다. 혜산강철공장이 신설되게 된 데는 김정일의 측근이었던 당시 양강도당 책임비서 염기순의 역할이 컸다.

1935년생인 염기순(廉基淳)은 군복무를 마치고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였고 김정일과 함께 공부를 한 간부였다.

대학 졸업 후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부터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1977년부터 강원도당 책임비서, 1988년부터 1991년까지는 양강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별 탈이 없이 승진의 길을 걸어 온 인물이었다.

1974년 김정일이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직을 맡고 있을 때 염기순도 함께 조직지도부에 근무하였다. 당시 염기순은 꼼꼼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일처리를 잘하여 김정일의 눈에 들었고, 그 덕에 부부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 ‘혁명전적지 관문도시’라고 불리는 양강도 혜산시는 도로와 철도가 발달하지 못해 외부로부터 지원이 매우 어려웠다. 특히 양강도 일대의 혁명전적지들을 개발하고 건설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철강재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양강도당 책임비서로 부임된 염기순은 강철공장 건설을 발기하고 중앙에 도움을 요청하는 제의서를 올렸는데 김정일이 쉽게 비준해 주었다. 강철공장 준공식을 가지던 날 염기순은 “내가 양강도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이라고 자랑을 했다.

양강도 인민들 속에서 염기순은 너그럽지 못한 간부로 인식돼 있다. 하지만 김정일은 염기순의 꼼꼼하고 한번 집착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격을 높이 평가해 1991년 12월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시켜 수하에 두었다.

김일성 사망 후 염기순은 조직지도부 1부부장에서 본부당(노동당 본부) 책임비서로 승진해 북한의 권력서열 2위까지 올랐다. 그런데 푸른제 명칭 러시아 군사학교에 유학했던 군 간부들의 반란사건에 염기순의 아들도 연루돼 처형되었다.

해군사령부에서 복무하던 아들은 북한의 중요한 군사비밀은 물론 염기순이 보관하고 있던 노동당 내부 비밀자료들까지 몰래 열람해 러시아 정보기관에 넘긴 것으로 밝혀졌다. 피할 길 없었던 염기순은 독극물에 의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배인 강승모, 검열의 첫 번째 표적

염기순의 최측근으로 혜산강철공장 지배인이었던 강승모는 보위사령부 검열의 첫 번째 표적이었다. ‘고난의 행군’시기 강승모는 공장의 직원들과 가족들을 먹여 살리면서 긴급한 철근생산 과제를 수행하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고난의 행군’ 시기 양강도는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산림자원을 마구 훼손해 수많은 통나무를 중국에 헐값으로 팔아먹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공장의 기계설비들까지 중국에 고철(파철)로 팔고 대신 사료용 강냉이 가루를 식량으로 사들였다.

혜산강철공장 역시 생산한 강재의 일부를 중국에 팔고 대신 식량을 들여왔다. 단순히 식량만 들여 온 것이 아니라 철근생산에 필요한 설비와 용광로를 돌릴 콕스도 수입해 들였다.

노동자들의 식량은 자체로 해결하는 원칙을 세웠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 스스로가 수매소들에 방치된 고철을 유휴자재 모으기 운동으로 거둬들이도록 했다. 양강도 무역관리국을 검열하던 보위사령부는 혜산강철공장에서 중앙의 비준이 없이 중국에 강재를 팔아먹은 자료를 수집하게 됐다.

제멋대로 공장의 생산물을 처리했다는 이유로 또 이 과정에 부정부패에도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판단만으로 보위사령부는 혜산강철공장 지배인을 체포했다. 보위사령부에서 그가 어떤 고문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그 일부만 알려져 있다.

1999년 5월 말에 보위사령부에 체포된 강승모는 7월말에야 석방되었다. 애초 북한 간부의 표준이라 할 만큼 배가 나오고 체구가 80kg 이상이었는데 감옥에서 풀려날 땐 가족들이 들 것을 가지고 밤중에 몰래 데리고 나와야 했다.

보위사령부는 자신들의 고문만행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무죄로 판결된 간부들을 밤중에 몰래 석방시켰다. 석방될 땐 수감된 이후부터 있었던 내용들을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동의하고 손도장을 찍어야 했다.

강승모 지배인은 혜산시 화전협동농장과 검산동 사이 산마루에 위치한 국가보위부 비밀감옥에 갇혀 있었다. ‘보위부 답사숙영소’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이곳은 가족들과 함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 대상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소금물 고문 받았다고 훗날에 실토

이곳에서 강철공장 지배인은 소금물 고문을 많이 받았다고 훗날 친구들에게 실토했다. 소금물 고문은 국물과 밥, 지어 마시는 물에도 모두 소금을 타 심한 갈증을 유발하는 고문이다. 갈증을 호소하면 또 소금물을 먹이는 방법이었다.

소금물 고문을 받으면 손발이 부어나고 변비가 와 몸을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이때부터 가혹한 물고문이 시작된다. 사람을 하루 종일 물탱크에 집어넣고 하루에 수십 번씩 주전자에 든 1.6리터의 물을 강제로 마시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고문을 받는 사람은 변소에도 못 가게 했다. 이런 고문을 3일 이상 받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물고문이 끝나자 다음은 마른 고문이라는 걸 들이 된다.

수감자에게 물을 주지 않는 고문인데 이 또한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특히 수사관들이 계속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여줘 조사를 받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해주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산강철공장 지배인은 밀수꾼이었던 김호철 처럼 감옥에서 죽지는 않았다. 밀수꾼 김호철의 별명은 ‘호빼’였다.

보위사령부는 옥사한 김호철을 부관참시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혜산강철공장 지배인이 풀려나게 된 데는 공장노동자들의 탄원이 많은 역할을 했다. 공장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살리려고 애쓴 대가를 그들은 탄원으로 보답했다.

지배인의 청렴을 호소하는 탄원서들이 연속 올라오는데다 그가 중국에 고철을 팔고 대신 용광로를 살릴 콕스와 철근을 만들 설비를 들여왔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문제는 석방된 지 한주 만에 다시 보위사령부에 구금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김정일 정권은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며 풀 먹는 집짐승인 토끼, 양, 염소를 많이 기를 데 대해 지시했다. 공장마다 우리를 짓고 토끼를 기르라는 건데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 지배인은 “나도 감옥에서 석방될 때 겨우 기어서 나왔는데 아내가 해준 토끼 곰을 먹고 벌떡 일어났다”고 말했다. 이것이 죄가 됐다.

보위사령부 내부에서 겪은 일을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는 보위사령부에 끌려 간지 3일 만에 다시 석방됐다. 대신 보위사령부라는 말만 들어도 눈이 뒤집히며 심각한 발작 증세를 보였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8/04/05 [15:26]  최종편집: ⓒ 통일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회원약관 개인보호정책 회사소개 한국통일교육학회 기사제보 보도자료
(140-806)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5-3 남영빌딩 201호
(주)통일신문(TEL:02-701-8347 FAX:02-701-8345)
Copyright ⓒ 2007 unityinfo.co.kr All rights reserved.